바보처럼 시간을 쏟아부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
‘지속’은 일정한 리듬을 가진다.
베르그손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해요. ‘공간화된(수학적) 시간’과 ‘지속’이죠. ‘공간화된 시간’은 양적인 시간이고, ‘지속’은 질적인 시간이에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3시간은 ‘공간화된 시간’이고, 분주함에서 차분함으로 마음 상태(질)가 변했다면 그것은 ‘지속’인 거죠. 즉, ‘공간화된 시간’은 수학적 시간이고, ‘지속’은 체험적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에 대한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우리 의식에 의해 체험된 지속은 일정한 리듬을 가진 지속이며, 그것은 물리학자가 말하는 시간과는 분명히 다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속’이라는 것은 일정한 리듬을 가져요. 어떤 질적인 차이를 유발하는 ‘지속’은 일정한 리듬, 특정한 진동의 형태(파형)를 가진다는 것이죠. 음악을 생각해 봐요. 음악을 듣는 것은 대표적인 ‘지속’의 시간이죠. 음악을 듣는 “체험된 지속은 일정한 리듬을” 갖죠. 그 음악 자체도 일정한 리듬(선율)이고, 그 음악을 듣는 우리의 마음 상태도 일정한 리듬(차분함)을 갖게 되잖아요.
‘지속’은 무아지경의 상태
‘지속’은 일종의 무아無我 상태에요. 일정한 선율(리듬)이 우리 의식에 들어올 때, 우리 안에는 일정한 리듬이 만들어지고, 이 리듬에 따라서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죠. 바로 이 무아지경 상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분주함에서 차분함으로 바뀌곤 하잖아요. 이것이 음악을 ‘지속’으로 체험하게 되는 상태인 거죠. 다른 사례도 얼마든지 많아요.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할 때 우리는 ‘지속’을 경험하죠. “체험된 지속”은 춤이나 운동 통해 일정한 리듬 속에 빠져드는 일이잖아요. 춤이나 운동의 초심자들이 그것을 통해 ‘지속’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죠. 춤이나 특정한 운동이 몸에 완전히 배어있지 않으면 일정한 리듬에 빠져들 수 없으니까요. ‘지속’은 외부 대상의 일정한 리듬을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일정한 리듬을 생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이들이 이를 수 있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이러한 ‘지속’은 “물리학자가 말하는 시간과는 분명히” 다르죠. 물리학적 시간(공간화된 시간)은 양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동질적인 시간이죠. 반면 ‘지속’은 질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다질적인 시간이죠. 어떤 이는 음악을 100시간(공간화된 시간)을 들어도 ‘지속’(마음 상태의 변화)은 없을 수 있지만, 어떤 이는 음악을 5분만 들어도 ‘지속(마음 상태의 변화)’ 속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지속’은 다양한 리듬을 가진다.
사실상, 지속의 유일한 리듬은 없다. 많은 다양한 리듬들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더 늦건 더 빠르건 의식의 긴장과 이완의 정도를 나타내며, 그것에 의해 존재의 연쇄에서 그들 각각의 위치를 확정할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속’은 “일정한 리듬”이지만, 유일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어떤 일정한 리듬으로 ‘지속’의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리듬은 아니죠. 우리에게 다양한 ‘지속’의 순간들이 있잖아요. 이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죠. 우리는 직장에서도 ‘지속’을 경험하죠. 일이 너무 많을 때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잖아요. 이는 직장이라는 일정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지속’이죠.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긴장”된 ‘지속’만 있는 건 아니죠.
“이완”된 ‘지속’도 있죠. 우리는 퇴근 후에 연인을 만나 ‘지속’의 순간을 경험하게 되기도 하잖아요. 이는 사랑이라는 일정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지속’이죠. 이처럼, 우리는 “많은 다양한 리듬들을 상상할 수” 있죠. 직장과 사랑이라는 ‘지속’만 있는 게 아니죠.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할 때 우리는 다양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지속’을 경험하게 되잖아요. 이처럼 ‘지속’은 일정한 리듬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리듬이기도 한 거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생경한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돼요.
‘나’의 위치는 ‘지속’에 있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하루 혹은 일 년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연쇄에서 각각의 위치는 (어디에서) 확정”될까요? 물리적 위치일까요? 즉,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실제로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직장이거나 연인 곁이거나 음악회거나 체육관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은 ‘지속’ 속이에요. 그 ‘지속’이 우리가 서 있는 “각각의 위치를 확정”하는 거예요.
직장 회의 중 연인과 함께했던 파리 여행을 떠올리고 있다고 해 봐요. 그는 지금 직장에 있는 거예요? 파리에 있는 거예요? 한 사람의 위치가 그 사람의 질적인 변화를 촉발하는 공간을 의미한다면, 그는 명백히 파리에 있는 거죠. 진정한 시간(지속)이 물리학자가 말하는 시간이 아니듯, 진정한 위치(공간) 역시 물리학적 위치가 아니죠. ‘나’는 물리적 위치에 존재하지 않아요. ‘지속’ 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물리적 위치(직장)와 ‘지속’의 위치(파리)는 모순 관계가 아니에요. 무엇인가에 온 마음을 다하면, (‘공간화된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이뤄져요. 비록 지금은 직장을 다니지만, 간절히 화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그는 언젠가 결국 ‘사무실’이 아니라 ‘화실’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이는 ‘지속’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림을 그리는 ‘지속’이 그의 위치를 확정한 것이죠. 삶의 어느 순간만 잘라서 보면, 물리적 위치와 ‘지속’의 위치는 일치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 물리적 위치는 ‘지속’의 위치에 가닿게 돼요. ‘지속’은 언제나 질적인 변화를 촉발하니까요.
‘지속’이 어려운 이유
그런데 이러한 ‘지속’은 쉽지 않죠. 화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은 결국은 ‘화실’이 아닌 ‘사무실’에 머물게 되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지속’이 어렵기 때문이에요. ‘지속’이 어렵기에 “존재의 연쇄에서 (자신이 바라는) 각각의 위치를 확정”하기 어렵죠. 그렇다면 ‘지속’은 왜 그리 어려운 것일까요?
탄력이 같지 않은 지속을 표상하는 것은 의식이 체험하는 진정한 지속을 동질적이고 독립적인 시간으로 대체하는 유용한 습관을 들인 우리 정신에게는 아마 고통스러울 일일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속’은 동질적이지 않아요. ‘지속’은 다질적이죠. A가 느끼는 ‘지속’과 B가 느끼는 ‘지속’은 달라요. 심지어 한 사람에게도 매 순간 ‘지속’이 달라요. 사람마다 혹은 상황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르는 지점이 다 다르잖아요. 이를 베르그손은 ‘지속’의 탄력(탄성)이 다르다고 표현해요. 쉽게 말해, ‘지속’은 매 순간 탄력적으로 변화한다는 거죠. 바로 이것이 ‘지속’이 때로 고통스러운 이유죠.
우리는 “체험하는 진정한 지속”에 익숙한가요? “동질적이고 독립적인 시간”, 즉 ‘공간화된 시간’에 익숙한가요? 당연히 후자죠. 우리에게는 “유용한 습관”이 하나 있죠. 그건 ‘지속’을 ‘공간화된 시간’으로 “대체하는 유용한 습관”이에요. 이는 어떤 습관일까요? “연애하느니 알바를 하나 더해라”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죠. 이들은 ‘지속’을 ‘공간화된 시간’으로 “대체하는 유용한 습관”을 들인 대표적인 경우죠.
낭만적인 삶은 고통이다.
‘연애’는 ‘지속’이고, ‘알바’는 ‘공간화된 시간’이죠. ‘지속(연애)’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고, ‘공간화된 시간(알바)’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이 있죠. ‘연애’하는 것보다 이 직장 저 직장을 옮겨 다니며 ‘알바’를 많이 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죠. 즉 더 유용하죠. 바로 이것이 많은 이들이 ‘지속(연애)’을 ‘공간화된 시간(알바)’으로 “대체하는 유용한 습관”을 완전히 내면화한 이유죠.
화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은 정말 그림 그리는 시간(지속)을 좋아할까요? 한 사람을 사랑하려는 많은 이들은 정말 그와 함께 있는 시간(지속)을 좋아할까요? 낭만(순수 기억)적인 삶은 멀리서 볼 때 좋아 보일 뿐, 진짜 낭만은 고통스러운 거예요. 반대로 말해,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낭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화가를 꿈꾸는 이도, 한 사람을 사랑하려는 이도 모두 이미 “진정한 지속을 (공간화된) 시간으로 대체하는 유용한 습관을 들인” 상태일 거예요. 그러니 그들에게 낭만적인 삶은 “고통스러울 일일” 수밖에 없죠. 그림을 그리는(그 사람을 사랑하려는) 그 ‘지속’의 시간이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고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 그림을 그릴 시간(그 사람을 사랑할 시간)에 알바를 하거나 자기 계발을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지속’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어요?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존재의 연쇄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위치에 가지 못하는 이유죠. 사람마다 상황마다 탄력적으로 변화하는 ‘지속’이 마치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나’를 ‘지속’하게 만드는 일에 바보처럼 시간을 쏟아부으면서 산다!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위치가 있나요? 언젠가 서 있고 싶은 삶의 위치가 있나요? 세상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서고 싶다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들이 말하는 ‘노력’이 무엇인가요? “유용한 습관”일 겁니다. 진정한 시간(지속)을 ‘공간화된 시간’으로 대체하려는 유용한 습관 말이에요. 이는 효율성·생산성의 습관을 의미하죠. 즉 그들이 말하는 ‘노력’이란, 적은 시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려는 효율·생산적 습관을 의미하죠. 그런 ‘노력’으로는 결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의 위치에 서지 못할 겁니다.
물론 ‘공간화된 시간’은 ‘양’적 변화를 일으킬 수는 있을 거예요. 인맥을 넓히고, 영어 점수를 올리고, 통장 잔고를 늘릴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것으로 더 기쁜 삶, 더 행복한 삶이라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순 없을 거예요. 그런 ‘질’적인 변화는 오직 ‘지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니까요.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위치는 오직 ‘지속’으로만 가능해요. 이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죠.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있다면, 진정한 시간(지속)을 ‘공간화된 시간’으로 “대체하려는 유용한 습관”부터 버려야 해요.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효율·생산적인 “유용한 습관”을 버리려는 노력일 거예요. 또 그때 찾아오는 고통을 견디려는 노력일 거예요. 그 노력으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며, 한 사람을 사랑하며 ‘지속’에 머물 때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삶의 위치에 서게 될 겁니다. 바로 그것이 ‘행복’일 겁니다. 진정으로 ‘행복’을 바란다면, 하나 표어를 마음 깊이 담아두어야 해요. “나를 ‘지속’하게 만드는 일에 바보처럼 시간을 쏟아부으면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