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과 지각
‘지속’과 ‘지각’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우리가 ‘지속’하는 시간과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일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알아봅시다.
우리 내부를 관찰하면,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동시적이면서 구분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몇 분간 잠들어 있는데, 다른 사람의 꿈은 며칠, 몇 주를 차지하는 이와 같은 일을 지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가?
베르그손은 ‘지속’을 꿈이라는 형태로 설명해요. 두 사람이 똑같이 10분간 잠들었다고 해봐요. 이 둘의 ‘공간화된(수학적) 시간’은 똑같죠. 하지만 ‘지속’은 전혀 다를 수 있죠. 한 사람은 그저 10분 동안의 일을 ‘지각’한 것이지만, 나머지 사람은 그 10분 동안의 꿈을 꾸면서 며칠, 몇 주 동안의 일을 ‘지각’하기도 하죠.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기묘한 현기증을 느낀 적 없나요? 이는 낮잠을 자는 10분 동안 몇 주 혹은 몇 년의 삶을 ‘지속’했기에 발생한 현기증일 거예요.
우리의 의식보다 더욱 긴장된 의식, 말하자면 인류의 발전을 인간 진화의 커다란 단계들로 응축해서 목격할지도 모르는 의식을 가정하면, 그 의식에는 역사 전체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포함되지 않겠는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인간은 의식을 갖고 세계를 ‘지각’하죠.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각’할 때 우리의 의식은 작동하죠. 그런데 이런 일반적 의식보다 “더욱 긴장된 의식”도 있죠. 이런 “긴장된 의식”은 “긴 역사 전체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포함”되는 형태일 거예요. 마치 10분 동안 꿈을 꾸는 동안 몇 년을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지각’, 긴 역사를 요약(응축)하는 일
인류의 발전(진보)을 생각해 봐요. 약 190만 년 전, 인류가 처음 불을 사용하기 시작해서(호모 에렉투스), 약 40만 년 전 도구(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죠(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약 1만 2천 년 전에 농업혁명을 통해 정착민이 되었고, 약 5천 년 전에 국가와 문명이 시작되었죠. 이후 18세기의 산업혁명을 거쳐 지금의 현대사회에 이르게 되었죠. 우리는 이러한 장구한 역사(시간) 전체를 있는 그대로 목격(지각)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죠.
‘호모 에렉투스→호모 사피엔스→농업혁명→산업혁명→현대사회’ 이처럼 인류 발전의 장구한 시간을 매우 짧은 시간으로 요약해서 ‘지각’하죠. 이는 “더욱 긴장된 의식”을 통해 “인간 진화의 커다란 단계들로 응축해서 목격(지각)”하는 거죠. 마치 몇백 년의 이야기를 9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표현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따라서 지각하는 것은, 요컨대 무한히 펼쳐진 한 존재의 방대한 기간들을 더욱 강렬한 삶의 더욱 구분된 몇몇 순간들로 응축시키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매우 긴 역사를 요약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그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매우 긴 역사를 요약(응축)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거예요. 세계에는 “무한히 펼쳐진 한 존재의 방대한 기간(시간)”이 있죠. 지금 눈앞에 있는 돌멩이는 그저 돌멩이 하나인가요? 그렇지 않죠. 그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하던 무한히 펼쳐진 세계의 일부이죠. 큰 산이 큰 바위가 되고, 큰 바위가 쪼개지고 또 쪼개져서 지금 눈앞에 있는 작은 돌멩이가 되는 거잖아요. 즉, 그 돌멩이는 무한히 펼쳐진 존재이며 방대한 시간의 존재인 거죠.
우리는 돌멩이의 그 장구한 역사 전체를 ‘지각’할 수 없죠. 우리가 돌멩이를 ‘지각’하려면 돌멩이의 역사 전체를 매우 짧은 시간에 ‘응축’해야만 하죠. 그 ‘응축’을 통해서만 돌멩이를 ‘지각’하게 되는 거죠. 이 ‘지각’의 내적 원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봐요. 어느 원시인은 돌멩이를 어떻게 ‘지각’하게 될까요? 배고픔이라는 “강렬한 삶”(지속)으로 인해 “더욱 구분된 몇몇 순간(사냥)들로 응축시키는 것”으로 돌멩이를 ‘지각’하게 되겠죠. 쉽게 말해, 배고픔 때문에 먹이를 사냥해야 할 때, 방대한 역사를 가진 물질을 ‘응축’해서 돌멩이로 ‘지각’하게 되는 거죠. 이는 장구한 인류 진보의 역사를 몇 단계로 ‘응축’시켜서 목격하는 것과 동일한 내적 원리죠.
‘지각’의 내적 원리
지각한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즉, “지각한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거죠. 세계 속 모든 존재는 방대한 역사를 가져요. 하지만 우리는 그 방대한 역사 전체를 결코 다 ‘지각’할 수 없죠. 이때 우리의 (더욱 긴장된) 의식은 ‘지속’을 통해 그 존재의 방대한 역사를 ‘응축’하고 이를 통해 그 존재를 고정함으로써 그 존재를 ‘지각’하게 되는 거죠. 즉, 인간의 “더욱 긴장된 의식”은 ‘지속’(돌멩이의 역사)을 ‘응축’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지각’(사냥 도구로서 돌멩이)하게 되는 거죠.
지금 우리의 모든 ‘지각’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세계 속에 있죠. 이는 우리 주위에 무한한 ‘진동’(리듬)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상황인 거죠.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냄새, 바람, 기온, 습기 등등. 이 모든 ‘진동’(리듬)들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우리에게 와닿고 있는 상황인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 무한한 ‘진동’ 전체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죠. 그 무한한 ‘진동’ 중 우리의 ‘지속’에 따라 어떤 부분만을 ‘응축(고정)’하고, 그 ‘응축(고정)’된 부분만을 받아들여요. 이것이 ‘지각’인 거죠. 이는 비유하자면, 사랑(지속!)에 빠진 이들은 세계의 무한한 ‘진동’ 중 ‘너’와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응축’하고, 그 ‘응축’된 부분만 보게(지각) 되는 상황인 거죠.
‘지각’은 내부적이다.
이러한 ‘지각’은 자신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일까요?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일까요? 달리 말해, 우리가 받아들인 세계의 ‘진동’(리듬)은 외적인 것인가요? 내적인 것인가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나의 지각은 내 지속의 단 한 순간에 그 자체로서는 셀 수 없는 수의 순간들로 퍼질 것을 응축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나에게 분명히 내적인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나의 지각”은 “분명히 내적인 것”이죠. 즉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무한한 세계(진동)가 외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지각’하려면 자신의 리듬(진동)으로 ‘응축’해야 하기 때문이죠. “나의 지각은 내 지속의 단 한 순간에 셀 수 없는 수의 순간들로 퍼질 것(진동)을 응축”하는 거죠.
길을 걷다 옛 친구를 ‘지각’했다고 해봐요. 이는 단순히 옛 친구를 ‘지각’한 게 아니에요. 그날,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냄새, 바람, 기온, 습기 등등의 셀 수 없는 수의 순간들로 퍼질 ‘진동(리듬)’을 단 한 순간에 ‘응축’한 거죠. 그러니 우리가 외적인 것(옛 친구)을 ‘지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내적인 것”이죠.
우리가 옛 친구를 ‘지각’할 수 있었던 건, 우리 내부에 있는 ‘지속(리듬)’에 따라 ‘응축’했기 때문이죠. 즉 그 친구의 ‘지각’은 단지 그 친구(외적인 것)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친구를 ‘지각’할 수 있는 내적인 ‘안경’(지속)이 있기 때문인 거죠. 그 ‘안경’이 수없이 많은 ‘진동(행인·소음·냄새·바람·기온·습기…)’들을 ‘응축’했기 때문에 그 친구를 ‘지각’하게 되는 거예요.
‘지각’된 ‘물질’은 ‘지각’의 흔적을 안은 채로 ‘물질’계로 돌아간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의식을 제거하더라도, 물질계는 그것이 그러했던 대로 존속한다. 단, 당신은 사물에 대한 내 행동의 조건이었던 지속의 특수한 리듬을 제거했으므로 사물은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서 과학이 거기서 구별해 내는 만큼의 순간들로 나누어지고, 감각적 질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분할된 지속으로 펼쳐지고 더 용해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물질계)의 ‘지각’은 내적인 것이죠. 돌멩이를 ‘지각’해서 그것을 사냥 도구로 썼던 원시인을 생각해 봐요. 그때 이 돌멩이는 분명 그 원시인의 의식을 통해 ‘지각’된 내적인 것이죠. 그렇다면 그 원시인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원시인이 죽어서 의식이 제거되면, 그 돌멩이는 사라지나요? 그렇지 않죠. 원시인의 “의식을 제거하더라도, 물질계(돌멩이)는 그것이 그러했던 대로 존속”하죠.
원시인이 죽으면, 그의 “행동의 조건이었던 지속의 특수한 리듬”이 제거되어 “사물은 그 자신에게도 되돌아가” 겠죠. 즉, 사냥 도구로서의 돌이 아니라 그저 “과학이 구별해 내는” 물질적인 돌멩이로 돌아가겠죠.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돌멩이는 분자나 원자 단위로 쪼개져서 감각적 질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 속으로 녹아들겠죠. 즉 그 돌멩이는 물질계(세계)라는 “더 분할된 지속으로 펼쳐지고 더 용해”되겠죠.
세계는 모든 것이 연결되고 연속되지만,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물질은 모두가 단절 없는 연속성으로 연결되고 모두가 서로 유대를 맺고 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그만큼의 전율처럼 흐르는 무수한 진동들로 해소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물질은 모두 단절 없는 연속성으로 연결되고 모두가 서로 유대를 맺고” 있어요. 돌멩이는 다시 자연(물질계) 속으로 돌아가 다른 물질들과 연결되고 모두가 서로 유대를 맺게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어요. 물질계로 돌아간 사냥 도구서 돌멩이는 여느 돌멩이들과 같을까요? 그렇지 않죠.
긴 시간 원시인이 사용한 돌에는 사냥 도구로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겠죠. 손잡이 부분이 있다거나 날카롭다거나 하는 특성이 반영된 채로 물질계로 돌아가겠죠. 이러한 흔적은 돌멩이가 세계 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어도 사라지지 않아요.
원시인이 썼던 돌멩이는 물질계로 돌아가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채로 “단절 없는 연속성으로 연결되고”, 거대한 물질계와 “서로 유대를 맺게” 될 거예요. 물질계의 ‘진동’(돌멩이)이 나에게 들어와서 나의 ‘진동’(지속)과 겹쳐지고, 이때 새로운 ‘진동’(사냥 도구)이 만들어지겠죠. 그리고 이는 다시 물질계로 되돌아가 연속성으로 연결되고 서로 유대를 맺게 될 거예요.
세계(물질계)는 “단절 없는 연속성으로 연결되고 모두가 서로 유대를 맺고” 있지만, 그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 속에 있는 거죠. 이해가 어렵다면, 돌멩이라는 ‘물질’ 대신 한 사람이라는 ‘물질’을 생각 봐요. 한 사람이 죽는다고 것과 돌멩이가 세계 속으로 용해된다는 건 사실 과학적으로는 같은 현상이잖아요. 둘 다 분자와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사람이 죽은 뒤 남겨지는 세계와 온 마음을 다해 선행을 하던 사람이 죽은 뒤 남겨지는 세계는 같을까요? 과학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죠. 전자의 세계와 후자의 세계는 ‘물질’적으로 같을 순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달라질 거예요. 악 혹은 선을 행했던 이의 정신은 고스란히 남아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잖아요.
표면적 변화는 우주적 변형을 자신 안에서 응축하는 일이다.
변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깊은 곳에 있다. 우리는 변화를 여기저기에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질에 대해서는 안정적인 동시에 그 위치에 대해서는 움직이는 물체를 구성한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단순한 장소 변화는 우주적인 변형을 자신 안에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화가를 꿈꾸는 직장인이 있다고 해봐요. 그녀는 퇴근 후에 화실로 가요. 이러한 “변화(직장→화실)는 어디에나” 있죠. 직장에서 화실로 옮겨 가는 변화는 자신을 “여기저기에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변화일 뿐이죠. 이러한 표면적 변화는 직장과 화실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움직이는 물체(그녀 자신)를 구성”하죠. 이와 동시에 그 표면적 변화는 직장에서는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질)을, 화실에서는 화가라는 정체성(질)을 안정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주죠.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깊은 곳에” 있어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단순한 장소 변화는 우주적 변형을 자신 안에 응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직장에서 화실로 옮겨가는 변화는 단순한 장소 변화인가요? 그렇지 않죠. 화가를 꿈꾸는 직장인에게 화실은 그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아니에요. 온 세계가 변화되는 공간이에요. 퇴근하고 극장만 가도 기분 전환이 되잖아요. 화가를 꿈꾸는 직장인에게 화실은 그 마음에 몇백 배, 몇천 배 되는 마음의 전환이 이뤄지는 공간일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눈으로 보는 단순한 장소는 변화”는 그녀에게는 우주적 변형을 자신 안에 응축하고 있는 일인 것이죠.
그녀가 화실에서 “우주적 변형을 자신 안에 응축”해서 아름다운 그림(음악)을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고 해 봐요. 우리는 그 그림(음악)을 보며 그녀의 ‘진동’을 받아들이게 되겠죠. 그 아름다운 진동을 받아들인 우리 역시 조금 더 아름다운 진동을 세상 밖으로 내놓게 될 거예요.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들은 날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 더 덜 짜증을 내고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삶을 잘 살아야 하는 이유
한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그의 ‘진동’을 통해 변형된 ‘물질’이 다시 물질계로 되돌아가요. 물질계의 어떤 ‘진동’(규조토·나이트로글리세린)이 ‘뉴턴’이라는 ‘진동’을 만나 ‘다이너마이트’라는 새로운 ‘진동’을 만들었죠. 뉴턴이 죽고 나서 다이너마이트가 사라졌나요? 그렇지 않죠. 다이너마이트는 긍정적인 형태로든, 부정적인 형태로든 물질계 전체와 “단절 없는 연속성으로 연결되었고 모두(물질계 전체)가 서로 유대를 맺게” 되었잖아요. 이것이 ‘나’와 세계가 변화되는 원리죠.
우리가 어떤 ‘진동’(리듬)을 갖고 살면 그것은 반드시 세계(물질계)에 반영돼요. 이러한 세계의 진실은 아주 엄중한 삶의 진실 하나를 알려줘요. 우리가 삶을 제대로 살지 않으면 물질계 전체에 폐를 끼치는 거예요. 매일 피곤하고 우울하고 분노하면서 살잖아요? 그럼 세계 전체에 나쁜 ‘진동’을 내보는 거예요.
세상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싶나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나요? 거창하고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자신의 삶을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살아내면 돼요. 매일 조금 더 유쾌하고 기쁘게 살면 돼요. 그러면 우리는 세계를 유쾌하고 기쁘게 ‘지각’하게 되겠죠.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라는 ‘진동’이 우리의 ‘진동’을 통과해서 조금 더 기쁜 ‘진동’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게 돼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물질과 기억』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물질계(세계)의 ‘진동’이 베르그손이라는 ‘진동’을 통과해서 나온 ‘진동’ 아닌가요?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세계를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진동)를 얻었잖아요. 이는 베르그손이라는 철학자가 삶을 잘살아서 좋은 ‘진동’을 세계로 다시 돌려주었기에 가능한 일일 거예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거죠.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하고 오만한 생각 대신, 저의 일상적인 삶을 잘 살아서 좋은 ‘진동’을 만들고, 그것을 세계에 내보며 살고 싶어요. 각자의 삶을 잘살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나’ 하나 기쁘게 살기 위해서 아니에요. ‘나’ 하나가 기쁘게 살 때 그만큼 세계가 기뻐지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각자의 개인적인 삶을 기쁘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나’ 하나의 기쁨(슬픔)이 ‘나’ 하나의 기쁨(슬픔)으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그것은 곧 세계의 기쁨(슬픔)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