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산다는 건, ‘사랑(자비!)’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
‘운동’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란 무엇일까요? 베르그손은 우리에게 세 가지 세계가 있다고 얘기해요. 첫 번째는 ‘운동’의 세계에요. 이 세계는 우주적 ‘운동’(흐름)이 있는 세계죠. 즉 파동(진동)과 리듬의 세계예요. 이는 무수히 많은 진동(존재)이 ‘공명共鳴’하고 있는 상태에요. 바로 이 상태가 ‘운동’의 세계죠. ‘운동’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감각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세계예요.
두 번째 세계는 ‘물질’의 세계에요. 이는 감각적 질과 연장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즉 ‘물질’적으로 감각하는 세계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예요. 세계에는 많은 ‘운동’(진동)들이 있죠. 그 우주적 ‘운동’이 우리 몸의 감각적 질 내부의 ‘운동’으로 전환될 때, ‘물질’이라는 형태로 보이게 되는 거죠. 빛의 특정한 ‘진동(운동)’이 우리 눈(몸)에 들어와서 특정한 ‘운동’이 될 때, 빨간색 혹은 파란색이라는 ‘물질’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운동’의 세계고, 우리가 본다고 믿는 세계는 ‘물질’의 세계에요. 이 두 세계는 어떻게 관계 맺고 있을까요? 우주적 ‘운동’(진동·리듬)은 각각의 생명체의 ‘기억’과 ‘지각’에 의해서 저마다 다르게 ‘응축’(분할·분절·고정)된 채로 나타나요. 이것이 ‘물질’의 세계이고, 감각적 질과 연장의 세계인 거죠.
그래서 ‘물질’은 상대적이에요. 인간이 보는 ‘물질’과 동물이 보는 ‘물질’은 다른 ‘물질’이에요. 똑같은 사과를 보더라도, 인간은 둥글고 빨간 어떤 물체를 보겠지만 박쥐는 초음파의 형태로 보게 되겠죠. 대상(사과)의 파동(운동)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이 마주치는 존재(인간 혹은 박쥐)의 ‘기억’과 ‘지각’이 다 다르죠. 그 때문에 ‘운동’은 각자 다르게 ‘응축’(분할·분절·고정)된 채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거죠.
‘순수 공간’의 세계
세 번째 세계는 무엇일까요? ‘순수 공간’의 세계에요. ‘순수 공간’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 세계이고, 지성이 특정한 개념을 만들어서 재구성한 세계예요. 이는 언어적 세계이고, 수학적인 세계고, 물리학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순수 공간’은 ‘운동’의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포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세계인 거죠. 특정한 ‘개념’(순수 공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운동)’을 볼 수 있도록 ‘고정’(물질)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 돼요.
예를 들어 볼게요.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해봐요.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은 ‘공명(운동)’ 상태죠. 즉 여러 ‘진동’(대상)들이 중첩된 파동(진동)이고, 리듬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 ‘운동’을 볼 수 없죠. 이때 그 한 사람을 보기 위해 그 ‘공명’ 상태를 분할·분절·고정해야 하잖아요. 이때, 도움을 주는 ‘개념’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키가 168cm이고, 몸무게는 50kg이고, ENFP이며, 강박적인 면이 있고, A 대학교를 나왔고…’ 이런 ‘개념’들이 ‘순수 공간’의 세계죠. 이처럼 ‘순수 공간’은 지성이 어떤 ‘개념’(언어·수학·과학…)을 분출해서 재구성한 세계(언어·수학·물리학적 세계)를 바탕으로 ‘물질’(감각적 질과 연장)의 세계를 더 잘 구성할 수 있게 해주죠.
베르그손이 말한 세 가지 세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어요. 실재하지만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운동’의 세계. 인간이 지성을 통해 구성해 낸 ‘순수 공간’의 세계. 그리고 이 ‘순수 공간’의 도움을 받아 ‘운동’의 세계를 감각하게 되어 드러나는 ‘물질’의 세계. 이것이 베르그손이 말한 세 가지 세계에요.
선불교와 베르그손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는데, 그중 아주 매력적인 종파가 있어요. 선禪불교에요. 선불교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 ‘화두話頭’를 활용해요. 스승이 낸 화두를 푸는 과정에서 각자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거죠. 선불교를 좋아해서 종종 화두를 읽고 풀어요. 그런데 좀처럼 풀리지 않던 화두가 하나 있었어요. 베르그손을 공부하고 나서 그 화두가 풀렸어요.
점심 공양 전에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와 앉자 청량의 대법안 화상은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때 두 사람이 함께 가서 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대법안 화상은 말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무문관』 제 26칙 <이승권렴>
화두 내용은 간단해요. 스승이 밥 먹는 시간에 손가락으로 발(햇빛 가리는 물체)을 가리킨 거예요. 그러자 제자 두 명이 양쪽에서 발을 걷었어요. 그걸 보고 있던 스승이 “한 사람은 옳지만, 한 사람은 틀렸다.”라고 말하면서 화두는 끝나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어요. 긴 시간 알 수 없었던 이 화두가 베르그손의 말한 세 가지 세계를 이해하고 나서 풀렸어요.
법당 안의 세 가지 세계
이 화두에는 베르그손이 말한 세 가지 세계가 있어요. 먼저 법당 안의 상태를 살펴봅시다. 법당 안으로 햇볕이 강하게 들어오고 있었는지 발(커튼)을 쳐놓고 있어요. 이 법당에는 세 가지 상태가 있죠. ‘햇볕’이 보이는 상태, ‘발’만 보이는 상태, 그리고 ‘발’과 ‘햇볕’이 겹쳐 보이는 상태. 이는 베르그손이 말한 세 가지 세계와 정확히 대칭돼요. ‘햇볕’만 보이는 상태는 ‘운동’의 세계고, ‘발’만 보이는 상태는 ‘순수 공간’의 세계고, ‘발’과 ‘햇볕’이 겹쳐서 보이는 상태는 ‘물질’의 세계에요.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은 분명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지만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죠. 그러니 이는 ‘운동’의 세계인 거죠. 그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을 보려면 ‘발’이 필요하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햇볕(운동)’이 내리쬐는 세계를 분할·분절·고정해야 그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발’은 ‘순수 공간’의 세계를 상징하는 거죠. ‘발’을 통해서 보아야 비로소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을 볼 수 있죠. 이는 ‘운동’의 세계가 감각적 질과 연장으로 드러난 ‘물질’의 세계인 거죠.
베르그손은 ‘물질’을 본다는 건, 밝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둡게 보는 것이라고 말해요. 이 역시 이 화두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어요. ‘햇볕’만 있으면 밝지만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요. 이때 ‘발’을 통해서 ‘햇볕’을 가리면 어두워지죠. 바로 이 어두운 상태일 때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죠. 이것이 우리가 ‘물질’을 보는 상태일 거예요. 있는 그대로 세계는 ‘운동(햇볕)’의 세계인데, 우리는 ‘순수 공간(발)’의 세계를 통해 ‘물질(발+햇볕)’의 세계로만 있는 그대로(운동)의 세계를 볼 수 있잖아요.
왜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틀렸는가?
이제 이 화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죠. 두 제자가 ‘발’을 걷었죠? 그런데 왜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틀린 걸까요? 아마 제자 중 한 명은 ‘발’을 걷으라고 하니까 ‘발’만 보고 걷었을 거예요. ‘햇볕’이 내리쬐는 파란 하늘은 본 적도 없고, 보려고도 하지 않은 거죠. 이 제자는 ‘순수 공간’에만 사는 거죠. 반면 나머지 한 명은 ‘발’을 통해 ‘햇볕’이 내리쬐는 파란 하늘을 보았고, 이제는 그 파란 하늘을 직접 보려고 ‘발’을 걷은 걸 거예요. 즉, 이 제자는 ‘순수 공간(발)’의 세계를 이용해 ‘물질(발+볕)’의 세계를 보았지만, 끝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운동(햇볕!)’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거죠.
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상태를 ‘진여眞如’라고 말하거든요. 이는 진실로眞 있는 그대로如라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진여’의 상태이고, 이것이 곧 최고의 깨달음이라는 거죠. 불교에서 많은 경전을 공부하지만, 이는 모두 ‘발’(‘순수 공간’의 세계)인 거예요.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청명한 파란 하늘(‘운동’의 세계)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도구죠. ‘발’을 통해 ‘햇볕’이 내리쬐는 청명한 파란 하늘을 보았다면, 이제 ‘발’을 걷고 청명한 파란 하늘을 직접 보는 것. 이것이 ‘진여’이고, ‘해탈’인 것이죠.
두 제자 중 한 명은 ‘순수 세계(개념)’에만 머물렀을 거예요. 즉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언어(경전!)적 세계에만 머물렀을 거예요. 그래서 스승이 틀렸다고 말했던 걸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의 제자는 ‘순수 공간’의 세계를 충분히 활용해 감각적 질과 연장의 세계인 ‘물질’를 본 후 그 너머 ‘운동’의 세계까지 보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스승이 한 명은 맞았다고 한 걸 거예요.
삶을 잘 산다는 건, ‘운동’의 세계를 보며 산다는 것이다.
베르그손과 선불교의 화두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엄중한 가르침을 얻었어요. ‘지혜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 우리 역시 베르그손이 말한 세 가지 세계 속에서 살고 있어요. 삶을 잘 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운동’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좀처럼 ‘운동’의 세계를 볼 수 없죠. 어떤 이는 ‘순수 공간’의 세계에서만 살고, 또 어떤 이는 ‘물질’의 세계에서 살기 때문이죠.
‘순수 공간’의 세계에서만 사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경제학, 수학, 과학, 철학 같은 특정한 이론(신념)에만 빠져 사는 이들이겠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론가나 학자들이 이런 경우겠죠. 게임이나 가상 현실 속에서만 빠져 사는 이들 역시 이런 부류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이들은 ‘물질’의 세계도, ‘운동’의 세계도 볼 수 없죠. 이들은 그저 어떤 실재성도 없는 ‘순수’한 공간에만 머무는 이들이죠.
그렇다면 ‘물질’의 세계에서만 사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이들은 어떤 실재성을 보기는 해요. 하지만 이들이 보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이론(경제·수학·과학·철학)을 통해서 세계를 분할(분절·고정)시킨 단편적이거나 왜곡된 ‘물질’일 뿐이죠.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이나 현상을 보지 않고, “그건 비경제적이야!” “그건 수학적 태도가 아니야!” “그건 비과학적이지!” “그건 반철학적이야!”라고 말하는 이들이죠. 이들은 ‘순수 공간’의 세계에만 빠져 사는 건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세계, 즉 ‘운동’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거죠.
지혜롭게 산다는 것
지혜롭고 산다는 건 ‘운동’의 세계를 보며 산다는 거예요. 한 사람(현상)을 볼 때,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상태를 보는 것이죠. 그런데 ‘운동’의 세계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계잖아요. 이 세계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순수 공간’을 확보해야 해야죠.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발(이론·개념)’을 만들어야 해요. 그 ‘발’을 통해 ‘물질’의 세계를 보아야겠죠. 이해할 수 없는 ‘너’(물질)을 알아가기 위해 경제학, 수학, 과학, 철학 같은 이론들을 공부해야겠죠.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죠. 그렇게 ‘발(이론)’을 통해 ‘물질(너)’의 세계를 보았다면, 이제 ‘발(이론)’을 걷어야 해요. 열심히 특정한 이론을 공부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그 특정한 이론을 버려야 해요. 불교 경전의 말처럼,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려야 하는 거죠.
특정한 이론으로 파악한 ‘너’는 진짜 ‘너’가 아니잖아요. 이론으로 파악된 ‘너’는 ‘물질’일 뿐이고, 진짜 ‘너’는 ‘운동’이니까요. 경제학, 과학, 철학으로 ‘너(물질)’를 파악했다면, 이제 그 모든 이론을 내려놓고 다시 ‘너(운동)’를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운동)을 제대로 보는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이 과정 중 어느 하나도 건너뛸 수 없어요.
‘운동’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다.
우리네 삶이 그렇잖아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배우겠죠. 그 아이는 돈(자본)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법을 익히겠죠. ‘이 일을 하면 돈을 얼마 정도 벌고, 그 돈이면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요. 이 아이는 자본주의라는 ‘순수 공간’을 통해 세계를 ‘물질’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거죠.
그런 아이가 너무나 매혹적인 한 여자를 만났다고 해봅시다. 당연히 그 아이는 자본주의적로 ‘그녀’를 파악하겠죠. 그녀와 데이트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하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면 얼마짜리 선물을 해주어야 하는지 생각하겠죠. 그런데 이는 ‘그녀’라는 ‘운동’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순수 공간’을 통해서 ‘물질’적으로 본 것일 뿐이죠. 이런 식으로 삶을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그 아이가 지혜로워져서 삶을 조금 더 잘 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본주의라는 ‘순수 공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는 음악(파동)처럼 존재하는 ‘운동’이죠. 그녀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갈 때 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죠. 매 순간 변화하는 ‘그녀’의 호흡과 떨림(운동)을 느끼려고 해야죠. 그때 ‘순수 공간(자본주의)’을 통해 본 ‘물질’적 세계 넘어 ‘운동’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아름다운 선율(진동)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세계 말이에요.
‘운동’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고, 지혜롭게 산다는 건, ‘사랑(자비!)’의 세계에 이른다는 말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