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은 ‘운동’이다.
이제 ‘정신’과 ‘신체(물질)’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해 봐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주(세계)는 그 자체가 ‘지속’이고, 이는 내적 ‘운동’(진동·파동·리듬)이에요. 이는 세계의 근본이 ‘정신’이라는 의미죠. ‘진동·파동·리듬’ 같은 ‘운동’은 모두 ‘정신’적인 것들이잖아요. 베르그손은 궁극적인 입자(물질)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직 ‘운동’(진동·파동·리듬)뿐이죠. 그 ‘운동’들이 공명함으로써 세계의 다양한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가 보는 ‘물질’적인 현상은 모두 우주적 ‘운동(정신)’이 만들어내는 부대 현상 같은 거예요. 번개가 칠 때를 생각해 봐요. 우리는 그 섬광을 번쩍이는 어떤 ‘물질’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이는 ‘물질’이 아니라 우주적 ‘운동’(진동·파동·리듬)이 만들어내는 부대 현상 같은 거잖아요. 즉 ‘물질’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두 ‘운동’(진동·파동·리듬)인 거죠.
돌멩이도 내부에 ‘운동’이 있다.
‘물질’이 근본적으로 내적 ‘운동’이라면, 그것은 어떤 ‘운동’일까요? ‘물질(이라고 여기는 것)’은 일정한 리듬을 균일하게 반복하는 ‘운동’(진동)이에요. 돌멩이라는 ‘물질’을 생각해 봐요. 이를 흔히 ‘운동’(진동·파동·리듬)이 없는 상태라고 여기잖아요. 하지만 이는 세계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거죠.
돌멩이도 내적 ‘운동’(진동·파동·리듬)이 있어요. 다만 그 ‘운동’이 일정한 리듬이 균일하게 반복되는 진동일 뿐인 거죠. 모든 (유체·기체뿐만 아니라) 고체화된 ‘물질’은 내적 ‘운동’을 가져요. ‘뚜-뚜-뚜…’ 이렇게 일정한 형태의 ‘운동’을 가지는 거죠. 물 같은 유체적 ‘물질’도 마찬가지예요. 이 역시 일정한 리듬이 균일하게 반복되는 ‘운동’을 갖죠. 다만 고체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리듬, 즉 ‘뚜두-뚜두-뚜두…’ 이렇게 반복되는 ‘운동’을 하는 거죠.
산소와 수소 같은 기체적 ‘물질’ 역시 ‘운동’이에요. ‘뚜두두-뚜두두-뚜두두…’ 이처럼 유체보다 조금 더 복잡한 리듬을 갖긴 하지만, 이 역시 일정한 형태의 ‘운동’인 거죠. 즉, 우리가 ‘물질’이라고 여기는 모든 대상(돌멩이·물·산소·수소…)은 특정한 리듬을 갖고 ‘운동’하지만, 그 ‘운동’은 닫힌 형태(차이 없는 반복)의 ‘운동’인 거죠.
‘물질’도 ‘정신’이 있다.
흔히 무생물인 고체·유체·기체적 ‘물질’은 ‘정신’이 없다고 여기죠. 일반적으로 돌멩이나 물, 산소·수소에 ‘정신’이 있다고 보지 않잖아요. 하지만 베르그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진동·파동·리듬(운동)’은 ‘정신’적인 것들이잖아요. 그러니 무생물인 ‘물질’(돌멩이·물,·산소·수소) 역시 ‘정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죠. 무생물인 ‘물질’ 역시 분명 어떤 ‘운동’을 갖고 있으니까요.
연장적 물질은 그 전체로 고려될 경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보완되고 중화되는 어떤 의식처럼 존재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돌멩이나 물, 산소·수소 같은 ‘물질’은 일정한 리듬의 내적 ‘운동’을 갖고 있죠. 즉 ‘물질’(돌멩이·물·산소·수소) 역시 ‘운동’이기 때문에 그 역시 “어떤 의식처럼 존재”하는 거예요. 다만, 그러한 ‘물질’의 의식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보완되고 중화”된 상태로 ‘운동’할 뿐이죠. 즉, 돌멩이, 물, 산소·수소 같은 ‘물질’의 ‘정신’은 리듬(운동)이 동일한 상태인 거죠.
고체·유체·기체적 ‘물질’의 내적 ‘운동’은 항상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자신의 과거를 (특정한 외부의 힘이 없다면) 차이 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죠. 즉, 돌멩이(물·산소·수소)는 과거(기억)를 항상 단순 반복하는 거죠. 100년 전에 돌멩이(물·산소·수소)였던 ‘물질’은 100년 후에도 같은 ‘물질’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죠. 즉 무기물적 ‘물질’이 다른 존재로 진화하지 못하는 건, 그들의 ‘정신’이 항상 동일한 내적 리듬(운동)이기 때문인 거죠.
인간의 마음과 몸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의 ‘정신’(마음)과 ‘물질’(신체)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의 ‘정신’(마음) 역시 리듬(운동)이죠. 그런데 인간의 ‘정신’(마음)은 여느 ‘물질’의 ‘정신’처럼, 차이 없이 반복하는 리듬(운동)이 아니죠. 끊임없이 역동적인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적 리듬(운동)이죠. 우리의 마음이 그렇잖아요. 우리의 마음은 늘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하잖아요. 이러한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인간의 ‘물질’, 즉 ‘몸’이 구성돼요.
‘신체’라는 ‘물질’은 선율이에요. 고체·유체·기체적 ‘물질’들이 (차이 없는 진동들이 반복되는) ‘소리’라면, ‘신체’라는 ‘물질’은 (차이 나는 진동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음악’인 거죠. 이러한 세계의 진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죠. 살아 있을 때 인간의 심박 리듬은 어때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역동적으로 차이 나는 반복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리듬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돼요? ‘뚜-뚜-뚜-…’ 이렇게 차이 없는 반복의 리듬으로 전환되잖아요. 이는 인간의 ‘신체’(물질)가 고체·유체·기체적 ‘물질’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거죠.
인간(생명)과 돌멩이(무기물)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돌멩이(무기물)는 변하지 않죠. 돌멩이의 ‘정신’(리듬)은 늘 동일하죠. 이 때문에 돌멩이의 ‘물질’은 능동적으로(스스로) 변할 수 없죠. 돌멩이의 변화는 (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단순 이동과 마모뿐이죠. 하지만 인간(생명)은 전혀 다르죠. 인간의 ‘신체’(물질)는 능동적으로 변할 수 있죠. 100kg이었던 이가 70kg이 되기도 하고, 깡마른 사람이 근육질로 변하기도 하잖아요. 이는 인간의 ‘정신’(마음)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 ‘정신’의 독특함
그런데 이는 생각해 보면 신비로운 일 아닌가요? 사실 ‘신체’도 여러 가지 무기물(산소·탄소·수소·질소·칼슘·인·칼륨·황…)’들의 연합(유기물)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다른 어떤 무기물 혹은 유기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진화 가능성을 갖고 있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요? 여기서 인간의 ‘정신’의 독특성 혹은 중요성이 드러나요.
정신이 물질과 구별되는 이유는, 그때조차 정신은 기억, 즉 미래를 위한 과거와 현재의 종합이기 때문이며, 또한 정신은 이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시키기 때문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인간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기억’이죠. ‘기억’이 뭔가요? “미래를 위한 과거와 현재의 종합”이죠. 가난했던 ‘기억’이 있는 이들은 대체로 열심히 일하려고 하죠. 왜 그럴까요? 이는 가난했던 ‘기억’이 부유한 미래를 위해서 과거(가난)와 현재(직장)를 종합하기 때문이잖아요. ‘정신’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죠. 인간의 ‘정신’(기억)은 외부 ‘물질’들을 ‘응축’시키죠. 즉, ‘정신(기억)’은 한 ‘물질(운동)’의 리듬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축’시키는 활동이에요.
인간의 ‘정신’은 특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종합하기 위해서 외부 ‘물질(운동)’들을 ‘응축’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즉 ‘정신’은 ‘물질’의 진동을 ‘응축’해서 차이 나는 반복을 만드는 역할을 해요. 인간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꽃을 만지고 향기를 맡죠. 즉 ‘정신’은 여러 세계 존재하는 ‘물질(운동)들’을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의 방식을 통해 받아들이죠.
그런데 인간 ‘정신’의 이러한 수용은 돌멩이처럼 외부 대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용이 아니죠. 인간은 그림과 음악, 꽃 앞에서 어떤 감동을 받거나 특정한 욕망이 촉발되기도 하죠. 이는 그림과 음악, 꽃이 주는 ‘운동’을 시각·청각·촉각·후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기억)’이 어떤 ‘응축’을 하기 때문이잖아요.
이를 통해 인간의 능동적 변화가 가능한 거죠. 한겨울에 핀 꽃을 보고 받은 감동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촉발해 평범한 직장인이 화가가 되기도 하잖아요. 이는 그가 꽃을 보며 그의 '정신(기억)'이 어떤 응축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죠. 이처럼 오직 인간의 ‘정신’만이 자신의 과거(기억)를 단순히(차이 없는) 반복하지 않고, 과거(기억)를 ‘응축’시켜 전혀 다른(차이 나는) 리듬(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