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신’은 자유를 갖지만, 그 자유는 무한하지는 않다.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조금 더 논의해 봅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어요. 이는 ‘자유’와 관련되어 있어요. 첫 번째 특징은 인간의 ‘정신’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지지만, 그 자유가 무한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우리의 지각은 원천적으로 정신 속보다는 사물 속에, 우리 속보다는 우리 밖에 있다고 말했었다. 다양한 종류의 지각들은 실재의 그만큼의 진정한 방향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그 대상과 일치하는 그런 지각은 사실에서라기보다는 권리상으로 존재한다고 우리는 덧붙였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의 ‘정신’은 권리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운동’을 받아들일 수 있죠. “지각은 원천적으로 우리 속보다는 우리 밖에” 있죠. 쉽게 말해, ‘지각’의 대상(운동)들은 외부(사물)에 있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는 권리상으로 그림도 볼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철학책도 읽을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은 실제로 그 모든 ‘운동’들을 ‘지각’할 수 있을까요? (권리상 그럴 뿐) 사실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죠. 그림, 음악, 철학책에서 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 흔하잖아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바로 ‘기억’ 때문이죠.
구체적 지각에는 기억이 개입한다. 그리고 감각적 질의 주관성은, 바로 처음에는 단지 기억에 불과했던 의식이 무수한 순간들을 유일한 직관 속에서 응축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서로 안에서 연장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구체적인 지각에는 기억이 개입”하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감각적 질(상태)”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동일한 철학책을 읽지만, 그것을 감각하는 질적 수준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어떤 이는 아예 이해를 못 할 테고, 또 어떤 이는 표면적인 내용만 이해하고, 또 어떤 이는 심층적인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죠. 이는 사람마다 ‘기억’이 다 다르기에 발생한 일이죠. 이는 “감각적 질의 주관성”을 드러내죠.
감각은 ‘기억’의 ‘응축’에서 온다.
이 “감각적 질의 주관성”은 무수한 수의 순간(기억)들을 ‘응축’시켜서 발생하게 돼요. 이를 통해 ‘지각’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어떤 외부 대상(그림·철학)에 관한 특정한 감각(감동·이해)은 그 사람이 가진 ‘기억’들의 ‘응축’ 결과인 거죠. 이 감각을 통해 우리는 그 외부 대상을 ‘지각’(“이 그림은 아름답구나” “이 철학은 깊이가 있구나”)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두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A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찌들어 막노동 현장에서 일했던 ‘기억’을 갖고 있고, B는 어린 시절부터 해외에서 유학을 하며 그림과 음악, 철학을 접했던 ‘기억’을 갖고 있어요. 이 둘의 “감각적 질의 주관성”은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죠. A는 그림, 음악, 철학을 권리상 접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그것이 무엇인지 ‘지각’할 수 없겠죠. 반면 B는 그림, 음악, 철학이 무엇인지 ‘지각’할 수 있겠죠. 이 차이는 그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에 의해 발생하는 ‘물질(음악·철학)’의 ‘응축’ 차이죠.
한 사람의 ‘기억’에 따라 ‘응축’ 가능한 대상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가난하게 자란 A는 그림·음악·철학이라는 ‘운동’을 ‘응축’할 수 있는 ‘기억’이 없고, B는 그 대상들을 ‘응축’할 수 있는 ‘기억’이 있겠죠. 그 차이 때문에 ‘지각’의 유무가 발행하게 되는 거예요. 이처럼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에 따라 ‘응축’할 수 있는 ‘운동(대상)’이 있고, ‘응축’할 수 없는 ‘운동(대상)’이 있어요. 그리고 자신이 ‘응축’할 수 있는 ‘운동(대상)’만을 ‘지각’하게 되는 거죠.
이것이 인간의 ‘정신’은 권리상으로는 무한한 자유를 갖지만, 사실상으로는 한정된 자유를 갖게 되는 이유죠. A와 B 중 누가 더 자유롭나요? 당연히 B죠. ‘응축’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서 더 많은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이들은 자유롭죠. 반면 ‘응축’할 수 있는 대상이 적어서 더 적은 대상을 ‘지각’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덜 자유롭죠(부자유).
‘정신’의 자유에는 등급이 있다.
여기서 ‘정신’의 두 번째 특징이 나와요. ‘정신’의 수준에 따라 자유의 등급(정도)이 달라져요. 돌멩이, 개, 인간을 생각해 봐요. 돌멩이의 ‘정신’은 가장 수준 낮은 ‘정신’(기억 없는 정신)이고, 인간의 ‘정신’은 가장 수준 높은 ‘정신’(밀도 높은 ‘기억’을 가진 ‘정신’)이겠죠. 개의 ‘정신’이 그 사이에 있겠죠. 이런 ‘정신’의 수준은 자유의 수준과 비례하죠.
돌멩이는 ‘기억 없는 정신’(가장 낮은 수준의 정신)을 갖고 있죠. 그래서 돌멩이는 과거를 차이 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죠. 이는 ‘노예’의 삶과 유사하죠. 이처럼 돌멩이는 가장 낮은 자유도를 갖죠. 반면 개는 ‘기억’은 있지만 그 ‘기억’은 밀도 아주 낮죠. 그래서 과거를 어느 정도 차이 내면서 반복하죠. 이는 ‘상인’의 삶과 유사하죠. 자유롭게 세계를 여행하는 것 같지만, 이는 모두 이윤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는 삶이잖아요. 이처럼 개는 돌멩이보다 조금 더 높은 자유도를 갖지만, 그 자유는 상당히 제한적이죠.
인간은 어떤가요? 밀도 높은 ‘기억’, 즉 ‘순수 기억’을 갖고 있잖아요. 이 ‘순수 기억’을 통해 다양한 외부 ‘물질’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응축’시켜서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죠. 이는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죠. 이처럼 인간의 ‘정신’은 아주 높은 자유도를 갖죠.
'노예', '상인' 그리고 '자유인'
인간의 ‘정신’은 다른 어떤 존재의 ‘정신’보다 큰 자유를 가능하게 하죠. 모든 인간은 밀도 높은 ‘기억’(순수 기억)을 갖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높은 자유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니죠. 쉽게 말해, 모든 사람이 ‘자유인’으로서의 자유를 갖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분명 ‘노예’나 ‘상인’과 같은 자유도를 갖고 있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이러한 차이는 ‘기억’과 ‘응축’에 의해서 발생하죠. 즉 ‘기억’이 외부 ‘물질(운동)’을 ‘응축’하여 자신 삶에 삽입하는 만큼 자유의 정도가 커지게 되기 때문이죠.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죠. 그러니 ‘기억’이 ‘응축’할 수 있는 ‘물질’(대상)도 다르고, 혹은 그 ‘물질’을 ‘응축’한다고 하더라도 그 ‘응축’의 방식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죠.
철학책이라는 ‘물질’을 생각해 봐요. 철학을 공부하면 우리네 삶은 자유로워져요. 그런데 모든 이들이 철학책을 읽는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죠. 철학책이라는 ‘물질’(진동)을 ‘응축’할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응축’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응축’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갖는 자유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이 ‘응축’의 방식(방향·수준)은 각자의 ‘기억’에 의해서 결정돼요. 어린 시절부터 삶과 세계에 대해 고민하며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해봐요. 이 둘이 같은 철학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을 ‘응축’하는 정도는 아주 크게 차이가 날 거예요. 전자는 한 권의 철학책에서 아주 큰 자유를 얻을 테고, 후자는 아주 작은 자유를 얻게 되겠죠. ‘기억’에 따라 ‘응축’의 방식, 즉 그 철학책을 어느 수준으로 ‘응축’할 것인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응축’할 것인지가 달라져요.
‘기억’은 ‘물질’의 파동을 다르게 ‘운동’하게 만든다.
그러니 ‘기억’을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겠죠. ‘기억’은 ‘물질’(철학책)의 파동을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게 하는 ‘정신’ 활동이라고요. 동일한 물(물질)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잖아요. 철학도 마찬가지예요. 동일한 철학책도 스티브 잡스가 읽으면 자본주의가 되고, 철학자가 읽으면 인문주의가 되잖아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의 차이에 따라 철학책을 ‘응축’하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스티브 잡스는 어렸을 때 가난했어요. 돈이 없어서 밥 얻어먹으러 교회 다녔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기억’ 때문에 철학책이라는 ‘물질’의 파동이 자본주의라는 방향으로 운동하게 된 걸 거예요. 반면 (가난했다고 하더라도) 가난했다는 ‘기억’보다 세계와 인간의 고통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더 많았던 이가 철학책을 읽으면 세계를 조금 더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려는 ‘인문주의’가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일지라도, ‘자본주의자’보다 ‘인문주의자’가 훨씬 더 자유롭죠. 철학책을 읽고 탁월한 ‘자본주의자’가 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자유로울까요? 그가 얻은 자유는 단지 소비의 자유일 뿐이죠. 즉 그는 돈에 갇힌 부자유한 사람일 뿐이죠. 반면 철학책을 읽고 탁월한 ‘인문주의자’가 된 이는 다르죠. 그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게 세계를 볼 수 있고,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죠. ‘자본주의자’보다 ‘인문주의자’의 ‘정신’이 훨씬 큰 자유도를 갖고 있죠. 이는 ‘인문주의자’의 ‘정신(기억)’이 외부 ‘물질’(철학책)을 ‘응축’하여 자신의 삶에 삽입하는 부분이 더 컸기 때문일 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