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진화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이제 우리는 ‘진보’와 ‘진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큰 ‘진보’이며 ‘진화’이죠. 즉, ‘정신’이 외부 ‘물질’을 ‘응축’하여 자신 삶에 삽입하는 부분이 커진다는 것은 한 존재가 ‘진보’를 이루며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진화’해 나간다는 말이잖아요. 이 ‘진화’와 ‘진보’에 관한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정신은 지각 속에서 이미 기억이고, 현재 속 과거의 연장이자 진보이며, 진정한 진화로 뚜렷이 나타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의 ‘정신’이란 뭘까요? “정신은 지각 속에 이미 기억”인 거죠. 쉽게 말해, ‘정신’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할 때 그 속에 이미 있는 ‘기억’인 거죠. 몽둥이를 들고 있는 한 남자를 ‘지각’했다고 해봐요. 이 ‘지각’ 속에는 이미 과거 아버지와 선생에게 이유 없이 맞았던 ‘기억’이죠. 이는 “현재 속 과거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죠. 즉 지금 몽둥이를 들고 있는 한 남자(현재) 속에서 과거(아버지·선생)가 연장된 것이잖아요. 이것이 그 남자의 ‘정신’인 거죠.
그런데 베르그손은 이 “현재 속 과거의 연장”이 곧 “진보이며, 진정한 진화”라고 말해요. 의아하지 않나요? 현재(몽둥이 든 남자) 속에서 과거(아버지·선생)가 펼쳐진(연장) 것이 왜 “진보이며, 진정한 진화”인 걸까요? 오히려 그것은 퇴보이며 퇴행처럼 보이잖아요. 현재(몽둥이 든 남자)를 ‘지각’하며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아버지·선생)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현재 속 과거의 연장이 진보이며 진정한 진화”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진정한 진보는 ‘기억’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정신(기억)’ 작용을 곰곰이 되짚어 봅시다. 과거에 부당하게 폭력을 당했던 ‘기억’이 없다면, 현재 부당한 폭력 앞에서 저항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처음 겪는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며 속절없이 폭력을 당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과거에 부당하게 폭력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죠. 그 부당한 폭력을 회피하거나 혹은 그에 맞설 수 있겠죠. 과거의 그 부당한 폭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과거 폭력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무기력하게 다시 폭력에 순응하게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이는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 폭력의 ‘기억’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선택권(자유!)이 주어지는 거예요. 다시 폭력에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그 부당한 폭력을 회피할 것이냐? 아니면 맞설 것이냐? 폭력의 ‘기억’이 없다면 애초에 이런 선택권 자체가 주어지지 않죠. 과거 ‘기억’으로 지금 변화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지금 다른 선택지를 얻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진보이자 진정한 진화” 아닌가요?
이는 한 개인의 삶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표현이 있죠. 한 사회가 끊임없이 ‘진보’하며 ‘진화’를 이루려면 결코 역사(기억)를 잊어서는 안 되죠. 현재 속에서 과거가 연장될 때만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죠. 그렇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차이 나는 반복을 통해 조금씩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잖아요.
이처럼 “현재 속 과거(기억)의 연장”이 곧 “진보이며 진정한 진화로 뚜렷이 나타나게” 돼요. 한 개인이든 한 사회든, 모든 진보와 진화가 가능한 이유는 현재 속에서 과거(기억)가 연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즉, “지각 속에 이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기억’은 한 존재의 진보와 진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는 요소인 거죠. 기쁜 과거이든, 슬픈 과거이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네 삶의 ‘진화’와 ‘진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