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높은 ‘정신’은 ‘기억’이 충분히 전개된 ‘정신’이다.
돌멩이(무생물)는 돌멩이로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동식물은 특별한 질적 변화 없이 죽음을 맞이하죠. 오직 인간의 ‘정신’만이 이런저런 ‘진보’를 이루며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진화’할 수 있죠. 인간은 ‘진보’와 ‘진화’의 잠재성이 있는 수준 높은 ‘정신’을 갖고 있죠. 그렇다면 이 수준 높은 ‘정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베르그손은 수준 높은 ‘정신’을 “충분히 전개된 정신”이라고 말해요. 무엇이 충분히 전개된 것일까요? ‘기억’이에요. 우리의 정신은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접혀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아주 많이 접혀서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잘 보이지 않는 기억을 ‘순수 기억’, 상대적으로 적게 접혀서 잘 보이는 ‘기억’을 ‘상 기억’, 그리고 완전히 펼쳐져 몸에 붙은 기억을 ‘습관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수준 높은 ‘정신’이란, 무한히 접혀 있는 ‘기억’들을 더 많이 펼친(전개한) 정신을 의미하는 거예요.
수준 낮은 ‘정신’은 전개될 ‘기억’이 없는 ‘정신’이다.
이는 반대로 낮은 수준의 ‘정신’이란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돌멩이의 ‘정신’을 생각해 봐요. 이것이 “가장 낮은 정도의 정신”인 이유는 “기억 없는 정신”이기 때문이죠. 즉, 돌멩이는 애초에 전개될 ‘기억’이 있을 수 없죠. ‘기억’ 자체가 없으니까요. 돌멩이의 ‘정신’은 오직 (‘기억’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순수 지각’일 뿐이죠.
돌멩이의 ‘정신’은 즉각적인 작용-반작용만이 가능한 ‘순수 지각’의 상태인 거죠. 돌멩이는 누군가 건들지 않으면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누군가 발로 차면 그 순간 튕겨 나갈 뿐이죠. 그래서 베르그손은 “가장 낮은 정도의 정신은 물질(무기물)의 부분”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무기물은 외부 자극을 그저 ‘순수’하게 ‘지각’할 뿐이니까요. 즉, 돌멩이의 ‘정신’은 (인간의 ‘정신’과 달리) 외부 자극에 대해 어떤 반성(성찰)적 태도도 가질 수 없죠.
보통의 ‘정신’은 ‘기억’을 충분히 전개하지 못하는 ‘정신’이다.
동식물의 ‘정신’은 그보다는 조금 더 수준 높은 ‘정신’이죠. 꽃과 나무, 벌과 개의 ‘정신’을 생각해 봐요. 이들에게는 ‘기억’이 있죠. 꽃과 나무는 햇볕을 받았던 ‘기억’, 수분을 흡수했던 ‘기억’을 갖고 있죠. 그 ‘기억’들 때문에 햇볕이 있는 쪽으로 잎과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고, 수분이 있는 쪽으로 뿌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거죠. 꽃과 나무는 이런 ‘기억’을 전개해 나갈 수 있기에 외부 자극에 대해서 적절히 반응하며 자신을 변형할 수 있죠.
벌과 개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벌은 꿀이 있는 꽃을 ‘기억’할 수 있고, 개는 먹이를 주는 사람을 ‘기억’할 수 있죠. 그 때문에 벌은 꽃을 찾아 꿀을 얻어 벌집을 만들 수 있고, 개는 주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죠. 이들은 ‘기억’을 적절히 전개하여 자신을 변형해 나갈 수 있죠. 하지만 동식물 역시 충분히 수준 높은 ‘정신’이라 말할 수 없죠.
동식물은 분명 ‘기억 있는 정신’을 갖고 있죠. 그래서 (즉각적인 작용-반작용이 아닌) 작용과 반작용 사이를 ‘지연’시키며 행동할 수 있죠. 하지만 이들의 ‘정신’은 외부 자극을 충분히 ‘응축’하여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진보·진화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은 아니죠. 그것들(꽃·나무·벌·개)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정신을 갖고 있기에 (작용-반작용을 지연시키며 이런저런 변형을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뿐이죠. 동식물의 ‘정신’은 생존 수준의 반성(성찰)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거죠.
인간의 ‘정신’은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이와 다르죠. 인간의 ‘정신’은 아주 수준 높은 ‘정신’이죠. 인간은 돌멩이나 동식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기억’을 갖고 있고, 그것을 얼마든지 펼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기억’들을 펼친 만큼 더 많은 외부 대상(운동)을 ‘응축’하여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진보·진화할 수 있죠. 즉 ‘순수 기억’을 펼쳐서 ‘상 기억’이 되고, 그것이 완전히 펼쳐서 ‘습관 기억’이 되는 과정을 반복할 수 있죠. 쉽게 말해, 하나의 ‘습관 기억’에 고착되지 않고, ‘기억’을 전개해서 다양한 ‘습관 기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거죠. 니체가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의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말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죠.
어떻게 정신은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 나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그대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 ‘낙타’처럼 주어진 의무만 짊어지고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낙타(식물성)’적 ‘습관 기억’에만 머물지 않죠. 의무를 주려는 자를 물어 죽여 자유를 쟁취하려는 ‘사자’와 같은 존재로 도약할 수 있죠. 인간은 그런 ‘사자(동물성)’적 ‘습관 기억’을 형성할 수도 있죠. 그리고 끝내는 모든 것에 미소를 보내는 해맑은 ‘아이’로 질적 도약을 할 수 있죠. 인간은 무수한 ‘기억’들을 끊임없이 펼쳐서 ‘아이(인간성)’적 ‘습관 기억’을 형성할 수도 있죠. 이는 인간 ‘정신’은 과거의 ‘기억’을 펼쳐나가면서 반성(성찰)적 태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이러한 일은 우리네 일상에서도 드러나죠. 누군가 우리를 발로 찬다(비난한다)고 해서 돌멩이나 동식물처럼 반응하지는 않죠.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충분히 전개할 수 있죠. 그래서 폭력이나 비난 같은 외부 자극을 ‘응축’해서 전혀 다른 존재로 진보·진화해 나갈 수 있잖아요. 사업가들이 누군가의 비난을 성공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는 경우나 예술가들이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잖아요. 이처럼 인간은 여느 존재들의 ‘정신’과 다른 수준 높은 ‘정신’을 갖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기존의 자신과 다른 존재로 진화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