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른 여자들>은 다이애나 클라크의 동명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릴리와 로즈는 쌍둥이 자매이다. 어릴적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의 감정과 감각을 느끼곤 하던 그녀들은 자라면서 서로 다른 몸과 욕망을 갖게 된다.
언니 릴리는 폭식증을 앓는다. 그녀는 끊임없이 욕망을 갈아치우며 증폭시킨다. 애정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집착한다. 동생 로즈는 거식증에 시달린다. 그녀는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자신의 욕구를 없앤다. 섭식장애 시설에 갇혀 그녀와 비슷한 '마른 여자들' 과 함께 살아간다. 거울이 없는 그곳에서 로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마른 여자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내가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 로즈
겉으로 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는 릴리와 로즈, 폭식증과 거식증, 비대한 욕망과 마른 욕망은, 사실 같은 사람, 같은 증상, 같은 욕망이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다치게 하고, 부수고, 잘게 쪼개고, 미워하고 또 미워한다.
"너를 미워하지마" "네가 행복하길 바래"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와 같은 말들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더라도 때로 공허하고 가끔은 파렴치한 슬픔을 자아내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왜 바뀌는게 없지?' 라는 자책. 자책에 자책을 더하다보면 스스로가 싫어지고, 자기부정이 퇴적된 피부는 점점 감각을 잃어간다. 구멍이 막힌 혐오는 두 방향으로 분출된다.
모든 사람을 혐오하거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혐오하거나.
닳아버린 지문. 삭아버린 뼈마디. 그런 '몸'을 가진 '너'와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거식증으로 고통받는 또다른 친구 제나의 이모 그레이스는 잊을만하면 제나에게 연락을 한다. 잘 지내냐고. 이모 보러 오라고. 함께 운동하자고. 그리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손수 요리해서 먹자고. 제나는 그런 이모의 말을 긴시간 흘려 들어왔다. 생의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절망의 순간, 모두가 그녀를 떠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모를 떠올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저 좀 도와주세요 이모".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 그 아이들이 자기 발로 나와야 하는거야. 네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건강한 몸으로 곁에 있어주는거야.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계속 시도해." - 그레이스
제나는 그레이스와 함께 생활하며 몸도 마음도 조금씩 건강해져 간다. 하지만 자신만 살아남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친구들에게 다이어트와 거식증을 알려준 건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스는 등짝 스매싱을 갈기며 한국 아줌마의 우악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말투로 팩폭을 한다. 네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느냐고. 불행 속에 있는 사람은 제 발로 걸어나와야 하는 거라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끈기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 뿐이라고.
그레이스 이모가 제나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더라면 제나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것을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제나가 그레이스 이모를 찾아가 그녀를 믿고 따르지 않았다면 제나는 더 큰 슬픔의 나락으로 빠져버렸을 것이다.
결국 구원은 '나' 만을 통해서도 '너'만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은 '줄탁동시'다. 껍질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최선을 다해 쪼는 것. 보이지 않더라도, 안과 밖에서 각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언제 껍질이 깨질지 몰라도, 언제 빛이 스며올지 알 수 없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데굴 데굴 데굴 진짜로 온 몸이 다 부서졌어. 그리고 몇 달을 일도 못하고 병원에 있는데, 신기하더라? 내 몸이 날 살려내더라니까? 엄청난 회복력으로! 내 몸이, 내가 그렇게 미워한 내 몸이 내 편이었어! 적이 아니라! 그 때 알았지. 내 몸과 사이 좋게 지내야한다!" - 그레이스
아름다운 외모에 매달리며 살아가던 젊은 시절의 그레이스 이모는 어느 날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불행히도 온 몸의 뼈가 부서진 채 병원에 누워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혐오했던 나의 마음이 바로 내 편이었다는 것을.
살고 싶은 마음. 음식이 앞에 있으면 손을 뻗어 먹고 싶은 마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 싫어하는 걸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마음. 잘 살고 싶은 마음. 예뻐지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 소중히 대해지고 싶은 마음.
그건, 맘놓고 실컷 따라해도 되는, 원없이 닮아도 되는, 온통 흡수하고 빨아들여도 되는 마음. 회복하는 마음.
내 몸이 내 편이기 때문에 참 다행이다. 네 몸이 네 편이기 때문에 참 다행이다. 가끔은 누구도 너를 지켜줄 수 없을 테니까. 우리들의 몸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것이기도 하다. 쌍둥이 릴리와 로즈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텔레파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네가 쓴맛을 느끼면 나도 불현듯 쓴맛을 느끼고, 네가 단맛을 느끼면 나도 불현듯 단맛을 느끼니까.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만의 감각으로 그 암호를 전달받으니까. 누군가는 정수리의 뜨거움으로 누군가는 무릎의 간질거림으로 신호를 받으니까. 누군가는 글에서 누군가는 음악에서 열쇄를 발견하게 되니까. 숱한 시간을 거슬러서라도 그 흔적은 반드시 도달하게 되니까.
나는 '너'를 위해 '나'를 지키고 싶다.
마지막 장면, 로런과 그레이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말한다.
"어서와. 기다렸어."
연극 정보
제목: 마른 여자들
연출: 박주영
기간: 2025년 9월 10일 ~ 2025년 9월 28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한정수량) 티켓 및 작업노트: https://docs.google.com/presentation/d/1Npie5n-R2NqvP7yeuIa9j2W_v_UrdzTk/edit?usp=drive_link&ouid=116514815321900843791&rtpof=true&sd=true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_T4O-a3llYo?si=ldMjEUwKpq_8j-5t
원작소설
제목: 마른 여자들 (다이애나 클라크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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