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글쓰기

by 홍보경

올해 3월부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평일 매일 두시간씩 카페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생계를 위한 나의 주 수입원은 쿠팡이다. 주 1회에서 4회 쿠팡 물류센터에에 단기사원(일용직)으로 출근하고 있다. 퇴직금을 모두 소진한 몇 달 전부터는 주 2~3회 고정적으로 일을 나간다. 쿠팡 일을 나가는 날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긴장을 한다. 자유롭게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에 최대한 집중해서 시간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끝낸 뒤, 늦은 오후 통근버스를 타고 쿠팡 물류센터로 향한다. 내가 일하는 곳은 식자재를 다루는 신선센터이다. 근무 시간은 오후 5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귀가 통근 버스가 새벽 3시에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우면 거의 새벽 4시가 되어 잠이 든다. 쿠팡을 다녀온 다음날엔 오후까지 피로감이 남아있는 편이다. 야간근무의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이다.


최근 쿠팡 사태가 한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매주 쿠팡으로 출근하는 쿠팡 단기사원인 나로서는 생계가 달린 일이라 남의 일이 아니다. 전국민적으로 탈팡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센터 내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물량이 줄었다는 것이 체감된다. 일용직이고 계약직이고 정규직이고 너나 할 것없이 조금씩 날이 서 있다. 근무 신청을 해 놓으면 하루 전 날 확정문자가 오는데, 혹여 근무를 못하게 될까봐 그 시간이 되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당장 다음주 다다음주에 필요한 돈을 생각하면 심장이 조여들기도 한다. 그간 근태 관리를 잘 해와서인지 최근 몇 번 일을 못 나가기는 했어도 다행히 생계에 문제가 생길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쿠팡과 컬리 물류센터 사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네이버 카페에 들락거리곤 한다. 어디 센터에서는 출근 신청이 연달아 반려라더라, 어디 센터엔 물량이 줄어서 출근 확정이 났다가 갑자기 취소가 되었다더라, 하는 게시글들이 어쩔 수 없이 눈에 밟힌다. 정 안되면 컬리 같은 다른 물류센터나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구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외국계 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종종 평택에 있는 공장에 외근을 가곤 했었다. 공장 생산팀에서는 일손 부족과 비용절감을 위해 일용직 노동자들을 단기 채용했다.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저런 일을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그들보다 시급 두세배를 더 받는 좀 더 '번듯한' 직장인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장에 거래처 직원들을 초대하여 공장 생산 라인을 견학시키고 자사 제품 퀄리티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자료로 피티를 할 때에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생산팀장이 층별로 공장을 소개해 줄 때에도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몸을 써가며 노동하는 이들은 이 사람들인데, 이렇게 하루 몇시간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얼마만큼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 공장과 서울 사무소간에 생산 스케쥴이라던지 품질 문제로 서로 갈등이 불거질 때에도 어느편에 서야할 지 알 수 없었을 때. 그리고 결국 본사에서 내가 속해 있던 사업부를 매각한다고 결정되자,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 공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장이 웃으며 "공장 문 닫고 집에 가라고 하면 되죠" 라고 가벼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젊은날부터 이십년 이상 그 공장에서 일하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기르셨다던, 차장님과 과장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언어화하거나 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없을정도로 그들의 사정을 지워냈으니까. 그만큼 나와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본사에서는 말 잘하고 아래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는 사람일수록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 내가 직장 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그들에게만 잘 보이면 됐다. 귀찮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나를 하이라이트 할 수 있는 일들에 숟가락만 얹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매출을 일으키기 위해 영혼을 팔아가며 영업을 해야했다. 혹은 농장에 가서 그들의 지저분한 삶(실제 농장에서 성과를 보려면 농장주의 가정사부터 해서 수익구조를 빠삭하게 꿰고 있어야 하기에)에 직접 개입하거나. 나는 그 모든 일들이 귀찮고 시큰둥했기에 매사에 적당히 일하는 스탠스를 취하곤 했다.

한국으로 오는 외국 상사들을 보좌하다 보면 자괴감이 들었다. 정말 다양한 국적의 인간들을 만났다.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그리스. 호주.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인도. 방글라데시. 하지만, 직장의 이해관계 안에서 국적은 큰 의미가 없었다. 유일하게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을 때는 지방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그리스에서 온, 아주 지독하다고 소문난 (그가 한 번 방문하면 모두가 초긴장상태가 되곤 했다) 글로벌 프로덕트 매니저와 충남 서산의 어느 사료회사 공장엘 방문했다. 일정을 마치고 우리끼리 식사를 한 뒤 한적한 논밭이 펼쳐진 언덕에 있는 어느 카페에 갔다. 그가 평상시와 다른, 어쩐지 우수에 찬 표정으로 논밭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뜻밖의 말을 했다. 이곳을 보니 자신의 어릴적 고향이 생각난다고 했다. 자신이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녀봤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이 곳의 이 풍경이 가장 고향과 닮았다고 했다. 그 특유의 까칠한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리스에서 나고 자라 아테네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국가 부도 사태 이후로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 그 때 부모님과 친인척은 모두 그리스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 날 카페에서 그의 표정이 여태까지 그의 행태와 너무나 달라 마음이 이상했다. 다음 날 그는 예의 그 표독스럽고 옹졸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쿠팡은 내가 알지 못하던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의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이제는 내가 가장 언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공장 (물류센터) 노동자가 되었다. 부끄럽게도, 한동안은 나의 이런 상황을 비관하고 부정했었다. 쿠팡에 출근해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저들과 나는 달라. 나는 꿈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고 있는거야' 라며 자위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동의 시간이 온 몸을 관통하고 각인되어 가며,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절절하게 절감하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 버스에서 졸다가 정거장을 놓쳐 걸어와야 할 때. 종점까지 가버려 택시를 타고오던 날 택시비가 아까워 나 자신에게 화가 날 때. 출근카드를 분실해서 공제되는 1만원이 아까워 카드를 회수하고 계신 아줌마에게 애꿏게 성질을 냈을 때. 몸이 힘들어 서로 짜증과 신경질 그리고 텃세를 부리는 아줌마들이 경멸스러울 때. 냉장과 냉동 챔버에서 일하느라 거칠어진 손을 자꾸만 주머니 속으로 숨기게 될 때. 그럴 때마다 서글픔이나 자기연민 따위나 느끼는 내가 죽도록, 너무나도, 싫었다. '이럴 줄 모르고 퇴사한거야? 이 정도 각오도 하지 않았던거야?' 하는 마음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괴로웠다.


그들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회적 자아는 백수에 무직인 30대 중반 여자이다. 나는 아직 나의 정체성을 '글 쓰는 사람' 혹은 '작가'로 말할 수 없다. 매일 쓰고, 또 쓰지 않는 삶이 두려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세상에만 갇혀 있다. 단절되어 있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자각은, 육체적 고통과 돈이 없음이라는, 내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현실의 감각이 일깨워 주었다. 그 때부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고된 업무 강도에도 매일 출근하시는 4~50대의 계약직 아주머니 아저씨들. 그들의 손목에 감겨 있는 압박붕대들. 일을 마치고 업무복을 갈아입을 때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곡소리. 무릎보호대와 허리 보호대 그리고 어깨 보호대를 찬 몸들. 나도 며칠 일하면 아픈 곳이 생기는데 저 분들은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시니 얼마나 힘들까. 나는 그나마 젊은 육체와 그동안 해온 운동으로 인해 길러진 체력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지만 저 분들은 그렇지 않을텐데. 식사시간에 들려오는 여러가지 사연들 ("우리 나이에 여기서 나가면 받아주는데도 없어"). 가족과 자녀 이야기들. 이분들은 어떤 삶을 감당하며 살아오고 계신걸까. 나는 이렇게 내 혼자의 삶도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젊은 관리자 친구들의 모습들을 보고 생각한다. 3교대로 돌아가는 근무 스케쥴의 특성상 이 일을 하면 몸이 상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휴일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을텐데. 저 친구들은 몸 관리라도 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 휴대폰 비용을 낼 돈이 없어 휴대폰이 정지되는 바람에 확정 문자가 오는지 확인할 수 없어 애가 탄다는 사람의 이야기. 사채업자에게 온 빚 독촉 전화를 받고 쩔쩔매는 사람을 탈의실에서 봤더던 이야기. 내가 모르던 세상이 쏟아져 들어와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이 흩어진다.


정규직으로 직장에 다닐 때, 한번에 몇십만원 쓰기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가벼운 마음으로 버는 족족 쉽게 탕진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뒤집어서 기만적으로 믿었다. 부끄럽지만 그 때 하던일이나 쿠팡이나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환경이나 강도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왜 타인들의 고통에 이토록이나 둔감했나. 왜 조그만 고통에도 힘들다고 생각하고 불행하다고 여겼나. 왜 현실에 대해 이토록이나 무지했나.


최근 2020년 10월 과로사로 사망한 고 장덕준 씨 사건에 대해 쿠팡 김범석 의장의 충격적인 발언이 밝혀저 화제가 됐다. 27세의 장덕준씨는 쿠팡 대구칠곡물류센터에서 1년 6개월간 일용직으로 일해왔다. 그가 맡아왔던 업무는 '워터 업무' 였다. 내가 주로하는 센터에서도 남성분들이 워터업무를 맡는다. 남성이 주로 하는 이유는 힘을 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신선식품 포장에 들어가는 아이스팩이나 드라이아이스를 박스째로 하루에도 수백개씩 날라야 한다. 그 밖에도 중량이 나가는 자재들을 옮겨야 하고 이런저런 잡무들을 맡아서 하곤한다. 그래서 관리자들이 포장하는 사원들 손이 느리다고 채근할 때, 확성기를 가지고 포장사원들 옆을 돌아다니며 "빨리빨리 안하시면 그 자리에서 워터로 빼버립니다. 여자라고 안 봐줍니다." 라고 협박조로 말하곤 한다. 모두 꺼려할만큼 힘든 일이라는 뜻이다. 장씨는 쿠팡에서 일하는 동안 체중이 무려 15 kg이나 줄었다고 한다. 그가 쓰러진 것은 야간 노동을 마치고 새벽 6시경 귀가한 후였다. 사인은 급성 심근겅색이었다. 단시간 내에 근육을 많이 써서 발생하는 횡문근융해증까지 의심된다고 밝혀졌고, 근로복지공단은 장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김범석 의장은 근무상황이 담긴 CCTV 영상 중 그의 노동 강도를 축소하고 혹독한 노동 환경을 은폐하려 했다. 시간제 노동자이기에 열심히 일했을리가 없다고 말했다. 쿠팡 측에서는 산재처리를 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CCTV를 숨겼다고 한다. 또한 그가 15 kg 이나 체중이 줄었다는 것을 '과도한 다이어트' 때문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그의 계좌 결제 내역을 살피며 다이어트에 관련된 지출이 없었는지 증거를 확보하려 했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수가 있을까? 그가 한 번이라도 물류센터에서 일을 해 보았더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화가 났다. 그 날 물량만큼 출고를 해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노동자들은 한시도 쉬는 시간이 없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일을 하다보면 관리자가 방송으로 화장실 자주 가지 말라는 방송을 많이 한다. 화장실을 가더라도 15분 이상 다녀오지 말라고 하고 눈칫밥을 준다. 퇴근하기 전 마지막 10분까지도 쉬지 말고 일하라고 압박을 넣는다. 포장을 할 때에도 손이 느린 사원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한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어머니뻘 되는 사원들에게 험한말을 쏟아내는 꼴도 여러번 보았다. 멀티 포장은 3인 1조로 일해야 하기에 최대한 그들 속도에 맞추어 해야하는데, 아무리 빨리 손을 놀려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엔 여러 사람에게 안좋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혹여 관리자에게 찍혀 근무를 못하게 되거나 불이익이 생길까봐 그들의 눈치를 봐가며 열심히 일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분 초 단위까지 짜내어 일을 시키는 상황인데 어떻게 시간당 급여라 열심히 일할리가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가.

2020년부터 현재까지, 쿠팡 물류센터 및 배달 플랫폼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가 약 29명에 달한다고 한다. 쿠팡이 산업재해를 은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내부 문건' 중 업무 중 사고 피해를 입은 노동자와 작성한 합의서에서, 사고 노동자에게 '기밀 유지'를 요구하며 언론 및 노동조합과 접촉을 차단하고 있다고 한다. 그 방법이 아주 치밀하고 교묘하다. 이런식으로 합의를 하여 알려지지 않은 사고와 죽음이 있을수도 있다는 뜻이다.


뉴스에서는 매일 쿠팡의 악덕한 행태들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주주들의 눈치를 보며 미국에는 막대한 돈을 써가며 로비를 하면서 정작 대부분의 돈을 벌어들이는 한국에서는 이용자들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심이 없다. 온 사회가 규탄을 하는데도 이에 대해 김범석 의장은 일언반구도 없다. 청문회에는 한국말을 모른다는 말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미국인을 내보낸다. 국회 출신 보좌관들을 빼내어 대관 인력으로 채용해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미국까지 가서 집단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국회에서는 추징금 부과나 영업정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모든 떠들썩한 상황 속에서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나는 이 노동을 하며 얼마간 안도했던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직장을 다니며 내가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받는 것에 대해 느꼈던 부채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적어도 쿠팡을 하면서는 덜 느낄 수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있었다. 비로소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것 같다는 마음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드러나는 쿠팡의 행태와 밥벌이에 쫓기고 있는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며 '떳떳한 마음'이니 '부끄러움'이니 뭐니 하던 나의 마음이 기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진심은 이랬던 것이었다. '김범석이 나쁜놈인 건 맞지만 얼른 사과하고 적당히 사건이 해결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생계에 타격이 없었으면 좋겠다. 영업정지나 완전히 망하게 하는것까진 좀 아니지 않나. 쿠팡을 이용하는 수많은 국민들도 생각해 줘야지. 이만큼 싸고 편리한 곳이 어디 있다고. 쿠팡 하나에 연결된 노동 인력이 얼마나 많은데.'

노동자들이 얼마나 죽어나갔든, 다른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생하든, 국민들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든, 그것이 내가 일하고 있는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직장을 다니며 느꼈던 노동자들에 대한 상대적인 부끄러움 같은 것들은 모두 거대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삶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럽고 치사스러운 직장생활을 피하고 싶었던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김범석에게 분개했던 이유는 그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이 아파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부당하고 내가 모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분은커녕 나 하나 밥벌이 하기에도 벅차 허덕거리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니 괴로웠고, 그러한 괴로움조차도 정당하지 못한 뻔뻔한 괴로움인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나는 '나의 생계'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두 갈래에서 찢어지는 마음을 견디고 싶지 않아 어느 한 편을 택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선’과 습관적으로 혼동되곤 한다. 마치 내가 그것들을 진짜 느끼기에 분개하는 것처럼 나 스스로를 속이곤 한다. 그 이유는 내가 함께 아파할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의 선‘과 ’사회적 선‘ 두 가지를 떼어 놓고 싶다. 사회에서 선하다고 치부되는 가치가 옳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

진짜 적은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면서도, 입버릇처럼 잘못 되었다고 말하던 '자본주의'가 이제 무엇인지 모르겠다. 돈의 무서움을 몰랐던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나도, 돈의 무서움을 알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도, 여전히 세상과 괴리되어 있다. 무엇이 어떻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바꾸어 나가야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아무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없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초라한 내 모습만 선명하다.


겁쟁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아마도 그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주저하고 있는 마음을 바라 본다. 이제 더 이상 멈춰있을 수 없다. 서두르려고 한다. 지금의 부끄러움 그리고 비루함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물러나지 않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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