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일 자체의 폭력을
건너온 작은 아기가
아직 안 보이는 눈을 꼭 감고 있다.
첫 손주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보고
다가오는 얼굴의 기척에
작은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노년의 나 자신이
아기로 분장하고
울부짖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아기가 살아갈 세월은
그 가혹함에서
나의 칠십 년을 넘어설 것이다.
작은 아기는
질문할 언어는 갖지 않았으나
섬세한 미니어처 손가락을 벌려
자꾸 무언가를 잡으려 한다.
시코쿠 숲의 전승에
'나의 나무'가 있었다.
골짜기에서 살고 죽는 이들은
숲에 '자신의 나무'를 갖는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나의 나무' 밑동에 안착한다.
시간이 흐르면
영혼은 골짜기로 내려가
태어나는 아기의 가슴으로 들어간다.
'나의 나무' 밑에서
아이가 마음을 다해 빌면
나이를 먹은 자신이
만나러 와준다(와줄 때가 있다).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온 나라가 다 같이 전쟁을 했다.
아이였던 우리는 노래했다,
나라님 곁에서 죽고 싶네, 후회는 하지 않겠네,
나라님이
인간의 목소리로
전쟁에 졌다고 통고한 날
라디오 앞에서 교장이 서서 외쳤다.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
맑은 하늘에 침묵이 메아리쳤다.
숲으로 들어가 삼나무와 노송나무 혼성림을 빠져나가면
활엽수가 밝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에 서 있는 전나무 대군락이
우리집 사람들 모두의 '나의 나무'다.
나는 젊은 나무 한 그루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든 나에게
묻고 싶다고 바라면서······
나는 다시 살 수 있는 걸까?
노을 진 숲속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공포심에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
풀고사리숲 사면으로 뛰어들었다가
머리를 부딪히고 허공으로 굴러떨어졌다.
상처투성이인 나를 벌거벗기고,
당신이 따온 약초
기름을 발라주면서
어머니는 탄식했다.
아이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해도 되나?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가 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긴 동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마음을 공유하며 싸웠고
백혈병과도 싸웠던 친구가
만년에 연구 주제로 삼은 건
어떤 유의 예술가가 죽음을 앞에 두고 선택하는
표현과 삶의 방식의 스타일.
그들은 평화로운 원숙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전통을 거부하고 사회와의 조화를 거부하고
부정성의 한가운데에
홀로 꼿꼿이 선다. 그리고,
일찍이 없었던 독창성에 도달하는 이들이 있다······
뉴욕 병실에서 보낸 마지막 팩스.
노년의 내면을 찢어버리는 모순을 두려워 마라.
곤경을 꿰뚫어보고 그 너머로
손을 내밀라,
불안정한 지면을 딛고 서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바로 그 노년의 곤경에 처해 있고
까탈스럽게 고립중이다.
부정의 감정과 더 친밀하다.
자신의 세기가 쌓아올려온
세계를 파괴하는 장치에 대해서라면
부정한들 이상할 건 없지만
그 해체를 향한 시도 대부분에
의구심도 품고 있다.
내 상상력이 쓴 소설 따위가
어느 만큼의 영향이 있었나, 싶어
어질어질해지는 땅 위에 웅크리고 있다.
그날, '나의 나무' 밑에서
나에게 오는 시간이 늦었던 노인은
지금의 나다.
소년에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태어난 지 일 년 지난
손주에게 내가 지금 봤을 터인
노인과 닮은 모습은 한 치도 없다.
팽팽한 피부에 빛을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그 옆에 웅크린 내가 처한
노년의 곤경.
그건 깨뜨릴 수도
넘어설 수도 없지만,
깊이를 더할 수는 있다.
친구는 미완성으로 남은 책에 그렇게 썼다.
나도, 노년의
부정의 감정에 깊이를 더해간다면
불안정한 땅에서
높은 곳으로 내밀 손만은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부정성의 확립이란
어중간한 희망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 어떤 절망에도
동조하지 않는 일이다······
여기에 있는 순수한 한 살 아이가
모든 것에서 새로이,
왕성하게
무언가를 찾는다.
내 안에서
어머니의 언어가
처음으로 수수께끼가 아니게 된다.
작은 아이들에게 노인은 답변하고 싶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만년양식집』 중)
- 오에 겐자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