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쓸 자격

by 홍보경

나는 글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고 커서가 깜빡이는 빈 화면을 바라본다. 무엇이라도 쓸 수 있지만 아무것도 쓸수가 없었다. 지난주 공모전에 단편소설 두 편을 투고했다. 그 이래로 점점 더 두려워왔다. 글에 대해서. 글이라는 것이 뭔지. 왜 쓰는건지.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인지.


끝을 향해 나름대로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나에게 있어 끝을 추동해 왔던 건 어떤 조바심 같은 것이었다. 증명, 아니 어떤 증거 같은 것. 그건 무엇에 대한 증거였을까. 나의 삶에 대한 증거일수도 있고, 믿음에 대한 증거일수도 있고, 절박함에 대한 증거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껍데기일 뿐이었다.


어떤 소감 같은 것을 바깥에 내놓을 마음이 있었나. 사실은 그랬다.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글을 써서는 안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글도 소감의 일종이므로 나는 이 글을 씀으로써 글을 써서는 안되는 사람임을 못박는 것일테다. 사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끝을 맺는 과정을 해내야만 한다고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홀로 밀어붙이는 과정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 날 느꼈던 감정은 아마 안도감에 가까웠던 것 같다. 하지만, 혹여나 자랑스러운 혹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느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 섞여있는 만큼 나는 작가이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감정을 며칠이 지난 지금 떠올려보면 그저 씁쓸한 마음이 든다.


당선에 기대를 했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기에 그런 기대는 없었다고 확신하지 못하겠다. 다만 당선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건 말 그대로 통과의례 같은 것이니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글 뿐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 혹은 하고 있는 일들을 잘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하루에도 그런 사람들은 내 삶에 수도 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므로 당선에 기대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반쯤은 이미 심증과 물증이 확실한 채로 수사에 응하러 가는 죄인같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안될 것을 알고 하는 투고였기에, 그저 마감 일정만 맞추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마감일자까지 미루어왔고 그렇기에 속마음으로 내심 찝찝했다. 진력을 다해 투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누군가가 진심을 다해 썼느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알았기에, 난 도무지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진심을 나에게 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당선자는 몇 명이며 발표일이 언제인지 정도를 꾸역꾸역 읽어냈다. 마치 그 날짜를 내 마음에 담아놓지 않으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들키고 말 거라는 듯이.


***


투고 다음 날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였던 시절 썼던 단편소설 <불과 먼지>를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나는 글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며칠동안 몇 편의 소설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쯤은 죽은 사람 같은 기분으로 넋이 자꾸만 놓아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썼던 글들이 부끄러웠다.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소설이 쓰고 싶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좋은 글을 쓰는 '작가' '소설가'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달랐다. 내가 썼던 글들은 그저 내 마음과 감정을 쏟아내는 형편없는 글에 지나지 않았다. 나를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내 마음은 이랬던 거라고, 내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부리는 어린애의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내심 그것이 찔렸는지, 어떤 글에서는 화자를 내가 아닌 타자로 설정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 해보고 싶어서도 있었지만, 솔직한 속내는 그의 시선으로 나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 글은 절망과 비탄뿐인 끝장면을 품고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글을 써 나가다가 보니 단단히 굳어있던 슬픔의 감정이 조금은 부드럽고 유해진 감정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 글은, 절망적인 끝장면에서 기약없는 희망이 첨가되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라진 장면으로 끝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래도 나는 내편에 서서 집요하게 그의 이해만을 바랐음을 부정할 수 없었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의 삶을 훔쳐다가 내 글의 소재로 써왔다는 나 스스로의 비난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글을 다 마무리짓고 나서야 그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글은 진정으로 정직하지도 못했으며, 아무런 유용도 없으며,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할 것이며,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가장 비겁한 도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불안감에 잡아먹혀 알량한 증거로 남기기 위해 결국은 투고를 해버렸다는 것을. 이후로 나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감이 견딜 수 없이 몰아쳤다.


한 이년 전쯤이었을까. 지방 외근이 잦았을무렵 나는 발표자료를 들여다보면서 운전을 하곤 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 km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크루즈 모드를 꽤나 맹신했고, 무엇보다 내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고가 날 리 없다고 가볍게 여겼다.


그러다가 영등포 역 앞에서 작은 접촉사고를 내게 되었다. 퇴근 시간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혼잡스러운 도로 상황에서 카톡을 주고 받다가 바로 앞에 있는 마티즈를 살짝 박았다. 외관상으로 보기에도 아무런 흠집이 없었고 상대 운전자도 다친 곳이 없었기에 보험사를 통해 간단히 마무리 되었다.


그 날 나는 스승과의 식사 약속자리로 가는 길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것에 대한 변명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라도 되는 양 방금 있었던 사고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자 스승이 예의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꾸짖었다. 나의 부주의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까지 불행으로 몰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그 때까지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의 꾸지람에 삐죽거리는 마음이 먼저 들었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하고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나. 나는 내가 낸 사고로 인해 발생한 죽음과 고통을 진심으로 느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창동 감독의 아들은 한 늙은 트럭 운전수의 부주의에 의해 죽었다. 그러고도 나는 살겠다고, 살아서 움직이고 웃고 떠들고 즐겨왔다. 그 낯짝으로.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닿는게 싫었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위선과 가식이 역겨웠다. 사실 그건 나에게 비춰진 것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안다. 진짜 역겨운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 끔찍하게 구역질 나는 자기보호, 살아보겠다는 마음, 결국 내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아무 잘못 없는 타인을 증오하게 만든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수가 없다.


***


"네가 개 한 마리 죽인거야"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내가 그 개를 소재로 글을 거의 마무리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개 산책 알바를 하며 처음에는 10,000원을 받았고, 오가는 거리를 핑계로 13,000원으로 올려받았다가, 7-8월 여름기간 동안 5,000원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그 개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키우고 있었고 나는 그 집 아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18,000원으로 올려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안간 그 개를 다른 집으로 보낸다고 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예전에 한 번, 그 개를 안락사를 시키려다가 할머니의 반대로 겨우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었다. 원체 집 안에서 골칫거리였던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이것저것 요구한 것들이 아들을 성가시게 했음이 분명했다.


내가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약아빠진 계산심리가 들어 있었다. 그 개가 나를 잘 따른다며, 요새 예전과 다르게 활기가 돌고 말썽도 덜 부린다는 이야기를 주인 아들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그 집에서 일을 하고 계신 요양보호사 아주머니와 함께 산책을 나섰던 적이 있었다. 보호사 아주머니 말로는 할머니 심성이 무척 깐깐해서 지나쳐간 보호사가 수두룩 하다고 했다. 자신도 그 감옥같은 집 (그 집은 다세대 주택 가장 꼭대기 층인데, 계단에서 바로 대문과 미닫이 중문으로 이어져 있어서 확실히 더 갑갑한 느낌을 준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만 두겠다고 하면, 그 때마다 주인 아들이 돈을 자꾸만 올려줘서 붙잡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조건 (나의 무기와 상대방의 약점)의 조합을 가지고 흥정을 했고 결국은 개 한 마리를 죽게 만들고 말았다.


사실 여름 두 달 동안 돈을 올려달라고 했던 것은 나의 뒤틀린 심보가 크게 작용했다. 개 산책을 시키다가 내가 소중히 생각하던 오토바이 키와 열쇠고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만원 남짓한 돈을 받으며 내가 왜 이런 피해를 보아야 하는건가,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의 부주의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으레 그래왔듯 원망할 누군가를 찾았다. 그렇게 돈이라도 많이 받자는 심보가 들었던 것이었다. 사실 개 산책을 통해 돈을 벌고자 했던 나의 마음조차도 내가 가장 환멸감을 느끼는 위선 중 하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늘 그러했듯이 눈 감고 지나치려 했다가, 결국 나의 여러가지 미심쩍은 선택들의 연쇄로 인해 내가 저지른 또 다른 폭력의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주인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개를 당분간 키우기로 마음을 바꿨다면서 다시 산책을 시켜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이제 개 산책 알바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일까? 부끄럽게도 한 번도 진지하게 답해본 적이 없다. 작년 말 즈음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설 수업 첫 시간에 이 질문을 받았다. 그 때에도 난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피했다. 무어라고 답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난 분명 이 질문을 진심으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삶에 대해 정직하게 써 내려가 가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나에게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의나 정의가 깃든 거창한 주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진심을 다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썼던 기억 속의 진짜 글들에는, 내 영혼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었다. 그런 글들을 쓰다보면 맑은 눈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그런 글을 쓰지 않았다. 끝을 향해 과열 되었던 마음이 식으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현실이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써 왔던 글이 좋은 평가라도 받게 된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아이가 죽고 일년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소설이란 것으로 도대체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서라고 했다. 나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글을 잃어버려서 얼른 찾아야만 한다는 공포와 갈증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의 고통은 세상과 사랑과 타인을 잃은 고통이었고 나의 고통은 그저 나를 잃은 고통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좋은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난 그저 되는대로 내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에겐 글을 쓸 자격이 없었다. 나는 글 앞에 한없이 가벼웠다.


글 쓸 자격이 없는 나는 글을 써도 되는 것일까. 글에 대한 지금의 내 마음은 언제나처럼 거짓에 불과할 것이다. 고통도 부끄럽고 부끄러움 자체도 부끄러운 시간들이다. 나는 그 시간들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 이 무겁고 진득거리는 시간들 속에서 그 질문들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수밖에 없다.


진짜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나에 대한 역겨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만약 글을 쓸 자격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진짜 글을 쓰는 것만이 나에게 허용된 자격일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걸 알 것 같다. 나는 진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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