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의 몸 (3)

by 홍보경
"할머니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나는 꿈꿀 시간조차 없었어." - 김복동 할머니가 여러분에게 건네는 말 中,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어설픈 '꿈'에만 집중되어 무슨 글을 써야할지 헤메고 있을 때였다. 주어진 글을 써내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다 정의기억연대에서 주관하는 수요시위를 마주쳤다.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그 시위를 처음 참여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손톱 밑의 가시만 신경쓰느라 나보다 고통받는 타인들에게 긴 시간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 가 보았다. 곳곳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할머니들의 자취들이 보였다. 할머니들의 원통하고 한 맺힌 글. 그리고 할머니들이 당했던 적나라한 피해와 그에 관한 사진들. 일본에 대한 사죄 촉구 운동의 역사. 그리고 할머니들이 그리신 그림, 쓰신 글들, 손수 제작하신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한 켠에 김복동 할머니를 기리는 소규모의 섹션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음력 3월에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하셔서 2019년 별세하셨다. 1940년 만 14세에 일본군 성노예로 강제 연행 되셔서 1947년까지 중국 광동,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에서 '위안소'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셨다. 끌려간 지 8년째 되던 22세에 귀향하셨고 부산에서 농사, 함바집, 횟집 등을 운영하며 생활하셨다. 1992년 1월, 67세에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사실을 공개하였고 그 이후로부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과 전시 성폭력 근절을 위한 활동에 남은 평생을 바치셨다.


김복동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성노예제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이름일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이름을 들어볼 길이 없었다. 수요집회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날,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는 장소 반대편에서 위안부가 창녀라고 욕하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처음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을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복동 할머니에 대해 궁금해졌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은 위안부 피해자임을 사회에 알리고 나서부터 할머니의 삶을 기록했다. 할머니의 일생은 참 기구했다. 1992년부터 1998년의 기간동안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에서의 피해사실에 대한 일본의 사죄 촉구 활동을 활발히 펼치셨다. 그러나 1998년 돌연 모든 활동을 접고 다시 부산 다대포로 돌아가신다. 그로부터 12년만에 다시, 살아서 끝끝내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아내리라 결심하시고는 여든 다섯살에 다시 길 위에 서신다. 평화의 우리집에서 이순덕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거주하시며 인권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셨다.


때는 2012년. 아베 내각이 부활하고 전쟁범죄 국가의 이미지를 감추는 역사수정주의를 내세워 본격적인 역사 왜곡에 박차를 가한다. 평화헌법 개헌을 추진하고 침략전쟁의 과거사를 부인하고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해 부인하며 강제 연행의 증거가 없다며 잡아 떼기 시작한다. 혐한과 과거사 부정을 일삼는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참을 수 없어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90년대 중반 일본 교과서에 실렸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후 20년동안 사라지거나 축소되어 왔던 것이다. 할머니는 일본 주요 도시 순회 강연을 강행하신다. 할머니들이 모두 아파서 다닐 사람이 없다면서 해외행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 직접 방문하고 2015년 90세의 나이로 유럽 순회길에 오르신다.


2015년 급작스럽게 한국 일본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기시다 총리가 주재한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한일 위안부 합의. 일본정부가 10억엔을 내는 대신 소녀상 철거와 대외적인 비판을 그만두겠다고 멋대로 합의해버린다. 그것은 20여년 길 위에 외쳐온 그 어느것도 명시되지않은 굴욕적 합의였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인정이나 참여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 일본은 공식적으로 사죄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끝까지 본인의 입으로 사죄하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바란건 그저 내가, 우리가, 일본이 그랬다. 죄송하다. 용서해달라. 이 말 한마디 뿐이었는데.


끝까지 공개 사과를 하지 않는 아베 총리, 그리고 전우원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다시 한 번 일본을 방문하신다. 재일조선학교에서 공부하는 여학생들의 손을 꼭 잡고 니들이 고생이 많지 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전재산을 기부하신다. 할머니에겐 자식이 없다. 오랜 위안부 생활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죄책감을 평생을 가지고 사셨다. 2018년 아흔셋의 나이에 마지막 수요시위에 참가하셨다. 2019년 1월 28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 하셨다.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박물관에 방문했던 나는 그곳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발자취를 기록한 영상을 보면서 비어있는 눈물을 흘렸다. 한 남학생과 외국인 여학생 커플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계 없는 타인의 아픔을 느껴보려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결해보였고 너무나 닮고 싶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 이후 위안부 증언집을 읽기 시작했다. 첫째로 고통스러웠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내 손톱 아래 고통이 더 커보이는 마음 때문에 독서가 지지부진했다. 그 시간동안 나는 나를 고문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생긴 가슴의 응어리가 정말 말 그대로 가슴을 틀어막고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왜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까?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인간일까? 나는 왜 아름다운 인간이 되지 못할까? 응어리를 녹이거나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이 없다면 나는 더더욱 나만 아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걸 기꺼내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 행동으로 마음으로 그러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할머니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13세에서 20대 초반의 나이로, 공장이나 간호인력으로 취직시켜준다고 속이거나 아니면 정말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 싱가포르,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수없이 많은 일본제국의 식민지에 위안소들이 있었고 그 어린 소녀들은 타지로 끌려가 강제로 군인을 받아야 했다. 하루에도 4~50명의 군인을 받았고 거부할경우 구타를 당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머니들은 성병에 걸리기도 하셨고, 성병에 걸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한달에 한두번 606호 주사를 맞았다. 그 주사를 맞으면 입에 고약한 냄새가 올라오고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삿쿠(콘돔)을 끼려고 하지 않는 남자들이 많아 여자들은 자꾸 성병에 걸렸다. 임신을 하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뱃속에서 죽거나, 낳더라도 다른 곳으로 입양을 보내야만 했다. 애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자궁을 들어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증언을 한 할머니들은 위안부 생활을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도 불법적인 계약이 할머니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도망갈수도 거부할수도 없는 위안소 내에서 그녀들은 그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성노예와 다름없었다. 군인들은 돈을 냈지만 할머니의 절대다수가 그 돈을 받지 못했다. 많은 여자들은 그 상황을 버티기 위해 담배나 아편에 중독되었다.


식사는 대부분 밥 조금과 단무지였으니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죽는 사람도 태반이었고 어떤 여자들은 미쳐버리곤 했다. 김복동 할머니의 경우에는 그 많은 국가들에서 위안소 뿐만 아니라 산속의 부대에까지 원정 위안을 갔다고 한다. 원정위안의 경우 대부분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방 부대인 경우가 많았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조차 텐트 안에서 군인을 받았다고 한다. 나쁜 군인이 있었는가하면 게중에도 여자들을 불쌍히 여겨 탈출을 도와주거나, 중간중간 바람을 쐬어 주거나, 아이를 낳고 함께 살게 되거나, 치료에 도움을 주거나 등 크고 작은 도움들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슬픔속에서 서로를 연민하는 관계는 기쁨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해방되었을 때 한국 사람들이 귀국하는 배를 타고 돌아와 부산에서 내렸다. 할머니들은 돌아와서 부모집으로 귀향한 경우도 있었고,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부모 볼 낯이 없어서 귀향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어떤 할머니들은 배운게 도둑질이라면서 매춘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못 낳거나 남편에게 구박을 받거나 첩으로 들어가거나 나이가 많은 남성에게 팔려가듯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할머니들의 삶은 그 이후로도 가난하고 외로웠다. 위안부 시절 얻은 성병과 전쟁 중 당한 부상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을 이고 살아야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1992년 김학순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하기 전까지 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할머니들은 그 사실을 가슴에 뭍어두고 살아야 했다. 몇몇 할머니들은 공개적으로 증언을 했지만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족들, 특히 자식들 앞길에 해가 될까봐서였다. 그 한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문득, 스승의 책 에서 읽었던 『피해의식』 에서 읽었던 길원옥 할머니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가?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 너무 늦었구나. 길원옥 할머니가 올해 2월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TV를 켰을 때, 눈앞에 펼쳐진 참사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혹하더군요.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라고 하니 이 불쌍한 생명들을 어찌하나 싶었습니다. 내가 "일본에 저렇게 피해가 커서 어떻게 하냐?" 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일본 생각만 해도 밉지 않으냐고요. 사실 일본이 밉기로 치면 나만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13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6년동안 악몽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죽은것만도 못한 날들이었죠. 죽으려고 약을 먹어도 사람 명이 억지로는 안되는지 죽어지지 않습디다. (중략) 우릴 이렇게 만든 일본 정부는 70년 동안 사과 한마디 없어요. 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만들었으니 일본도 폭삭 가라앉아버려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TV에서 너무 참혹하고 슬픈 광경을 보니까 내가 당한 건 잠시 잊어버렸어요. 아이구, 아이구, 저걸 어떡하나. 몸과 마음이 성한 데가 없지만 마을 전체가 떠내려가고 발전소가 폭발한다는데, 내가 아프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어요. 세상에 그런 무서운 난리가 어디 있겠어요. 옛날 우리네들이 당할 때는 이보다 더 큰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더 무서운 일도 생기네요. 사람이라면 그런 참사를 보고 다 같은 마음일 겁니다.
우리는 1992년부터 20년째 매주 수요일이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배상하라고요. 이번 주만은 구호를 외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국가적 재난을 겪고 있는 일본 정부에 당장 뭔가를 요구하는 건 사람으로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중략)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도 아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고통에 빠져 있는지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그 사람들이 단 한 명이라도 덜 다치고, 더 빨리 쾌유하기를 빕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어요. 지금은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죠. (중략) 이 무시무시한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일본인들에게 힘내라는 격려를 하고 싶어요. - 길원옥 할머니 인터뷰


자신의 피해의식에만 빠져 있는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한다. 길원옥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김복동 할머니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피해받은 일본인들의 슬픔에 연대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대지진의 피해자를 돕기 위한 모금을 제안하며 첫 번째로 기부를 하시기도 하셨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피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들의 삶에도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들은 2015년 베트남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성폭력 및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과 함께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한국군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를 인정하는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피해자이기 그녀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로서 가지는 수치심과 치욕을 넘어서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일테다. 이제 할머니들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할머니들이 온몸으로 살아오셨던 생애가 절대 꺼지지 않을 등불로 남아있다.


전쟁은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할머니들의 증언 중 전투의 최전방에서 원정 위안을 갔던 분의 증언을 읽고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폭격을 맞은 캠프에서, 머리 위에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참호에서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도 여자들을 겁탈하는 군인들의 이야기였다. 위안소에서 전투를 앞둔 군인들은 수척하고 우울해 했으며 한차례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돌아온 남자들이 그 어느때보다 난폭하게 여자들을 짐승 다루듯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 전쟁이 없는 이곳에도 존재하는 성에 얽힌 수많은 뒤틀어진 양태들. 매춘부들과 그녀들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들. 그 안에 내재하는 폭력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진짜 전쟁들을 생각한다. 며칠을 자다가 뒤척였다. 그들의 슬픔은 나는 손톱만치도 느끼지 못하는데도 그 이야기들을 잠깐이라도 스치고 상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불행과 어둠의 미풍이 스쳤다. 끝없는 무력함과 좌절 공포 그리고 절망감이 들었다.


이 시리즈의 1편부터 지금까지의 글을 쓰는 동안 주변 사람과 미묘한 관계의 변화가 있었다고 느꼈다. 수요시위에서 시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 그리고 내가 상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변화한 것 같다고 느낀다. 그들에게 화가났던 마음에서 그들이 안쓰러웠던 마음으로 변했고, 나 스스로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환멸감을 오래도록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더 나에게 실망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실망해야할지 막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조금의 틈이 생겼다고 느낀다.


가부장제와 성폭력, 그리고 여성으로서 겪는 갖가지 차별들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고 포기하고 나를 괴롭혔던 이유는 바로 나의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그 피해의식이 어떻게 생겼고 왜 이렇게까지 증폭되었는지는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니었다. 나는 피해의식을 가진 나의 모습을 긍정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아픔만을 보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니까. 그건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니까. 그러나 현재 나의 주소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영원히 그 자리를 맴돌게 된다. 피해의식의 미궁에 갇히게 된다. 이제 나는 나의 피해의식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넘어졌던 그 자리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피해의식에 휩싸였다면 사랑하거나 싸워야 한다. 피해의식을 치유하는 데 그 두 가지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중략) 피해의식에 휩싸인 피해자들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 싸움은 진짜 가해자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략) 우리 시대의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의 피해자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돈 많은 이들과 싸우거나 돈을 더 벌려고 싸워야 하는가? 성역할이 피해자들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남자 혹은 여자와 싸워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엉뚱한 적들과 싸우다 보면 피해의식이 치유되기는커녕 자신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테다. 자본의 피해자들은 '자본 그 자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 성역할의 피해자들은 '성역할 그 자체 (구분짓기)'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이 진정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황진규


진짜 용기는 무엇일까? 사랑하거나 싸울 용기이다. 고마운 친구의 추천으로 임철우 작가의 이별하는 골짜기를 읽었다. 소설에는 위안부 피해자였던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매일 떠날 채비를 하고 역전에 나타나지만 목적지가 없는 기차표를 끊곤 집으로 돌아가신다. 그 모습을 역사 폐지로 인해 조만간 일자리를 잃게 될 시인이 바라본다. 시인은 티켓다방에서 매춘을 하던 여성의 자살 전 마지막 전화를 받게 된다. 시인은 사랑을 몰랐으며 시를 몰랐다. 그는 이제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었고 별어곡역의 마지막 역무원이 된다. 이별하는 골짜기. 김복동 할머니도 길원옥 할머니도 이별하는 골짜기를 넘어가셨겠지.


한강 작가는 임철우 작가의 소설을 읽고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렇게 기어이 고통받고 이별하며 상처받고 숨어들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주는 사람들이다. 한강 작가와 더불어 뜻하지 않게 자주 마주쳤던 소설가가 있었다. 김 숨 작가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 넋두리 같다. 서사는 뭉개져있고 대신 말하는 사람들의 언어로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그건 증언집과 더 닮아 있었다. 위안부 증언집에서 증언을 기록했던 채집가들은 그렇게 말했다. 발화된 증언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글들은 그렇지 않을까. 그들 자체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그릇이 되는 것. 아니, 그 사람 자체가 되어 마치 그 사람의 혼을 덮어 쓰고 그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싸우는 것이 글 쓰는 사람들의 임무이지 않을까.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용기. 사랑하거나 싸울 용기.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창녀의 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