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 1843년 청년 헤겔주의자

인간 마르크스 읽기

by 홍보경

# 프로메테우스


마르크스는 1836년부터 1838년 3년동안 강의실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빚을 자주 졌다. 그는 당시 베를린의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꼈다. 당시 헤겔 좌파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학계에 침투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설파하여 주류로 올라서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헤겔 좌파들에 대한 숙청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1840년 보수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가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며 모든 출판물에 대한 검열이 시행되고, 학문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낮이면 담배를 피우며 하숙집에 앉아 책과 글에 파묻혀 있다가 저녁이면 박사 클럽에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셨다. 그는 당시 교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 본인의 학문적 열정과 현실 참여에 대한 의지가 가장 컸겠지만, 아마도 그의 연인인 예니와 결혼하기 위해서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헌사가 바로 장인인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 앞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못마땅해 하던 장인어른에게 떳떳한 사위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 헤겔 좌파들과 교류하며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탐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헤겔 철학에 깊이 빠져 있던 그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은 마르크스만의 철학을 정립하게 되지만, 이즈음의 그는 헤겔 철학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뭔가가 무엇인지 탐색하는 첫 걸음으로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헤겔의 철학을 무작정 비판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시기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뒤에도 1873년 헤겔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마르크스를 통해 배움이란 무엇인지 생각 해보게 된다. 진정한 감사와 존경은 무조건적인 추종도, 야비한 비판도 아니었다. 쉽게 추앙하고 쉽게 비난했던 나의 모습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거의 30년 전, 헤겔의 변증법이 여전히 유행하던 시절에 나는 헤겔 변증법의 신비적 측면을 비판했다. 그런데 『자본』1권을 작업하는 동안, 공부를 좀 했다는 독일 서클들에서 말깨나 하는 까다롭고, 불손하고, 범속한 아류들이 마치 레싱의 시대에 모제스 멘델스존이 스피노자를 대하듯이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하는 것을 낙인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공개적으로 나 자신이 그 걸출한 사상가의 제자임을 공언했으며, 심지어 가치론에 대한 장 여기저기에서 헤겔 특유의 표현 방식들을 가지고 장난을 쳐보기도 했다. 변증법이 헤겔의 손에서 신비화의 고초를 겪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변증법의 일반적인 운동 형식을 의식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제일 먼저 제시한 사람이 바로 헤겔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자본론』제1권, 카를 마르스


당시 프로이센 왕국은 1789년 대혁명으로 인해 봉건제에서 민주제로 진보한 프랑스와는 달리, 여전히 전제군주의 절대적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복음주의 기독교를 국교로 내세우며 종교적 교리를 통해 국민들을 통치하고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다. 헤겔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준은 이러한 프로이센 왕국에 대한 입장이었다. 헤겔 우파는 국가 권력을 옹호하고 그들의 체제에 편승하는 보수적인 세력이었고, 헤겔 좌파는 그 반대였다. 그들의 차이는 특히 기독교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두드러졌다.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들은 종교를 사회 구성원간 불평등을 합리화하고 복종을 강요하는데에 이용했다. 헤겔 우파는 종교 역시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따라 변화해왔다고 생각했고, 기독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진보된 종교라고 생각했던 헤겔의 입장을 고수했다. 좌파 세력들은 이러한 기독교적 질서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종교에 대한 해방 = 정치적인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정한다. 논문의 제목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였다. 주제를 보고 놀랐다. 법학과 학생이자 나중에는 자본에 대한 책을 쓴 마르크스 아닌가. 그에게서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 특히나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그는 서문에서부터 신에 대항하는 선전포고를 한다.


세계를 정복하는 자유로운 심장에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는 한, 철학은 적들을 향해 계속해서 에피쿠로스처럼 외칠 것이다. "군중의 신들을 파괴하는 것이 불경이 아니라, 군중의 사상이 신들에게서 나왔다고 우기는 것이 불경이다." 철학은 감추지 않는다. "한마디로 나는 모든 신들을 싫어한다." 는 프로메테우스의 선언은 곧 철학의 고백이며, 인간의 자기 의식을 가장 높은 신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 대항하는 구호이기도 한다. 인간의 자기 의식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카를 마르크스



첫장부터 이런 구절이라니, 아주 대담하기 그지없다. 흥미로웠던 것은 마르크스 이전까지 에피쿠로스를 인간의 '자유'를 외치는 프로메테우스같은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 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을 표절했다고 여겼으며, 중세 시대에는 쾌락주의라고 비난 받아왔다. 교부 철학자이던 가쌍디가 그 의미를 재조명하긴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신의 권위 하에서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우연'으로부터 출발하여 '실천'을 거쳐 신을 부정하고 인간 자신에게 내포된 '자유의지'까지 나아간다. 그가 이미 이 때부터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을 발견했으며 그대로 살아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두 사람 모두 같은 지점에서 시작해서 정반대의 결론을 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데모크리토스는 세계가 원자 (atom)과 허공 (void)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원자론의 창시자였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원자에 대한 정의 (모든 물질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의 출발점이 바로 데모크리토스였다. 에피쿠로스도 그의 원자론을 받아들인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출발점은 ‘감각’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후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한 명 (데모크리토스)이 회의주의자(Skeptiker)라면 한 명 (에피쿠로스)은 정설가(Dogmatiker)고, 한 명 (데모크리토스)이 감각의 세계를 주관적 가상으로 본다면 다른 이 (에피쿠로스)는 객관적 현상(나타남)으로 본다. 감각의 세계를 주관적 가상으로 본 이 (데모크리토스)는 경험적 자연과학과 실증적 지식에 몰두했으며, 실험을 행하고, 도처에서 배우고, 먼 곳까지 돌아다니고 관찰하면서 배운 것들에 대한 불안을 나타냈다.

현상 세계를 실재적인 것으로 보았던 다른이 (에피쿠로스)는 경험을 비웃었다. 그 자신 안에서 만족된 사유의 평온함과 내적 원리로부터 지식을 획득하는 자립성이 그에게는 체화되어 있었다. 이 모순은 더 고차원적인 것이 된다.

감각적 자연을 주관적 가상으로 보는 회의주의자이자 경험주의자는 그것을 필연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사물의 실재적인 실존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현상을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는 철학자이자 정설가는 모든 곳에서 우연만을 보며, 그의 설명 방식은 오히려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을 지양하는 경향을 띤다.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이 논문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을 통해 헤겔 철학 비판에 대한 토대를 구축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던 헤겔 좌파마저도 현실과 이성을 거꾸로 보고 있다고 여겼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데모크리토스는 절대적이고 필연적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여겼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관을 얻기보다 하나의 새로운 인과관계를 발견하고 싶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모든것이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일어나고 진리에 이르는 다수의 원인이 있다고 여겼다. 데모크리토스과학자였고, 에피쿠로스철학자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헤겔의 제자들은 모두 좌파이든 우파이든, 데모크리토스의 입장에 더 가까웠거나, 적어도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오독했다.


그래서 루크레티우스가 편위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방향을 틀 때 생기는 최소한의 기울기)를 숙명(Fati foedera)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는 옳았다. 그가 이것을 곧바로 의식에 적용하고 있듯이 원자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편위라는 것은 맞서 싸우고 저항할 수 있는 원자의 가슴 속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카를 마르크스


창피하지만 몇몇 구절들을 읽으며 눈물이 났다.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지만 나의 이해와 능력 부족으로 그의 통찰을 통합하여 전달할 자신이 없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가 에피쿠로스를 통해 숙명에 저항하는 인간 자유의 정신을 재조명했다는 것 (자유 의지), '편위'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모순'을 화해시키는 비결정적이며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 ('자기 모순'과 '자기 부정'에서 '자기 긍정'으로의 전환), 개별적 존재자들은 타자와의 관계 ('충돌')라는 우연 속에서만 비로소 현실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타자를 통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타자성의 긍정). 그가 진정한 유물론자로 거듭나게 되는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이 논문을 읽고 그가 했던 유명한 말을 다시 읽었을 때 울컥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이 논문을 1841년 완성했고 보수적인 베를린 대학교 대신 상대적으로 학위 수여에 너그러운 분위기이던 예나 대학에 제출했다. 예나대학 학장의 추천사에서 그가 얼마나 촉망받는 젊은이였는지 알 수 있다 ("제출된 논문을 보시면 이 학생이 얼마나 총명하고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는지, 그리고 얼마나 박식한지 아실 겁니다. 제가 이 학생을 정말 유능하다고 생각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드디어 1841년 4월 15일, 그는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다음 한 해동안 그는 뚜렷한 목표 없이 본, 트리어, 쾰른을 왔다갔다 했다. 고향인 트리어에 들렸을 때에도 그는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 대신 병든 남작 (예니의 아버지)와 예니에게만 신경을 썼다. 불안했던 예니는 마르크스에게 결혼을 재촉하지만, 일자리도 없고 고정적인 수입도 없는 그로써는 신중할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불행히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집에서 정기적으로 지급된 용돈이 끊기고, 어머니가 남편의 유산 중 마르크스의 몫을 지급하지 않았다 (!). 편지에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쳤는데 너무 하신거 아닌가 싶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어머니 헨리에테 마르크스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다는 소식에 "자본에 대해 쓰지만 말고, 자본을 좀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웃픈 일화다.


# 귀여운 맷돼지


1841년 7월, 마르크스는 본으로 가서 브루노 바우어와 함께 지내며 그 지역 부르주아지들과 기독교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하고, 교회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당나귀를 타고 도시의 거리를 내달리고, <무신론자이자 적그리스도인 헤겔을 심판하는 최후의 수단> 이라는 익명의 풍자글을 쓰는 식이었다. 익명이었지만 글의 저자는 쉽게 밝혀졌고,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승인 브루노 바우어가 신학 대학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도 대학 교수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는다. 결국 그는 쾰른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쾰른은 프로이센 전체에서 정치적으로나 산업적으로 가장 발전되어 있던 라인란트에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였다. 이미 지역의 부르주아지들은 전제군주제와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근대 경제에 어울리는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며 대중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쾰른의 술집에서는 민주주의, 자유 언론, 통일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혁명가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모여들기에 안성맞춤인 도시였던 셈이다. 마르크스는 이 곳에서 자유주의적 신문이었던 <라이니셰 차이퉁 (라인신문)>의 편집자가 된다. 편집장은 아돌프 루텐베르크였지만 그는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살았으므로 실질적인 책임자는 마르크스나 다름없었다.


프랜시스 윈은 이 시기를 기록한 챕터의 제목을 <귀여운 맷돼지>라고 이름 붙혔는데, 이는 예니가 마르크스를 부르던 애칭 중 하나였다. 실제로 그의 외모와 성격은 어딘지 맷돼지 (wild boar)를 닮은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다른 별명으로는 '무어인' 도 있었다. 그의 가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지인들에게 주로 불리우던 별명이었다).


쾰른의 사업가 구스타프 메비센은 마르크스를 가리켜 "트리어 출신의 카를 마르크스는 24살의 유력한 인물이다. 그의 뺨, 팔, 코, 귀에서는 숱 많은 털이 빽빽하게 솟아 있다. 그는 오만하고, 충동적이고, 정열적이고, 한 없는 자신감에 차 있다." 고 묘사했다. 마르크스를 처음 만났던 사람들 대다수가 이런식으로 그의 특이한 외모를 묘사했다. 확실히 그의 외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던 모양이다. "마치 존경을 요구할 권리와 힘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민중의 지도자로 태어났다" 라던지, "즉시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리던지 하는 찬사들에서 미루어 보듯이 말이다. 베를린 박사 클럽이나 그가 쾰른에서 새로 활동했던 쾰른 서클 사람들은 모두 마르크스보다 여덟에서 열 살 연상이었음에도 대부분 그를 연상처럼 대접했다고 한다.


귀엽고 인간적이라고 느꼈던 것은 마르크스가 머리카락과 수염을 일부러 길렀을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윈은 그들이 1852년에 썼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킹켈에 대한 조롱의 글에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등장한다고 했다.


런던은 이 존경받는 인물에게 그가 훨씬 더 큰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새롭고 복잡한 격투장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그 시즌의 새로운 사자가 되었다. 그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당분간 모든 정치적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그의 집에 은둔하며 턱수염을 길렀다. 그것이 없으면 어떤 예언자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망명객의 영웅들』,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는 대학 때 구레나룻을 기르기 시작해서 평생동안 갈기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런던시절 프로이센 스파이는 그것이 신기했는지 자신의 상관에게 "그는 전혀 면도를 하지 않는다"고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콧수염 기르기에는 엥겔스도 동참을 했다. 19살이었던 엥겔스는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일요일은 콧수염의 저녁이었지. 나는 콧수염을 기를 수 있는 모든 젊은 남자들에게 회람을 돌려, 이제 마침내 모든 속물에게 겁을 줄 때가 왔는데, 그렇게 하는 데 콧수염을 기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해주었어. 그래서 속물 근성에 도전하여 콧수염을 기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명을 했지. 금방 여남은 명이 서명을 했어. 그러고 나서 10월 25일, 우리 콧수염이 한 달쯤 자랐을 때를 공동 콧수염 축제의 날로 정했어" - 엥겔스가 1840년 10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 정말. 이렇게 귀여울수가 있나. 공동 콧수염 축제의 날이라니. 축제의 날에 외쳤다는 건배사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속물은 얼굴을 호각처럼 깨끗하게 면도하여

뻣뻣한 털의 짐을 회피한다.

우리는 속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콧수염이 자유롭게 번창하도록 놓아둘 수 있다.


콧수염의 번창을 기리며 이십대 남자애들이 모여서 진지한 모습으로 건배를 하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너무 귀엽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타고나길 뛰어난 웅변가는 아니었다. 약간 혀짤배기 소리를 냈고 라인강 유역의 거친 악센트 때문에 오해를 사곤 했다. 그가 우상화되거나 악마화 될 때에도 마르크스의 거친 외모와 언변이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이니셰 차이퉁> 시절의 그는 한편으로는 정열적인 ADHD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술을 마시고 난장판을 벌이거나,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여 친구를 집에 가두고 따귀를 때리며 괴롭히는 등 예측 불가의 모습을 보여주어 동료들에게 호감과 반감을 모두 샀던 것 같다.


마르크스가 <라이니셰 차이퉁>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동료들은 그가 지적으로 끓어오르듯 격하고 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사소한 일에서는 정신을 놓고 사는 듯한 모습, 어떻게 보면 귀엽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선술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근시인 눈으로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다른 탁자로 가서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신문을 향해 손을 뻗곤 했다". 저널리스트인 카를 하인첸은 이런 마르크스의 모습을 관찰하며 재미있어 했다.

"기사가 잘린 것에 대해 검열관에게 항의하러 간다면서, 호주머니에 문제의 기사를 넣는 대신 다른 신문, 또는 심지어 손수건을 쑤셔넣고 부리나케 달려나가기도 했다."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는 정말 예니와 엥겔스에게 잘해야 했다.


# 독설하는 언론인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만 골라 괴롭히던 '강약약강'이 아니었다. 1842년 5월, 그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대담한 글에서 자칭 '자유주의적 반대파'의 허약한 태도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한다. 그는 거침없는 독설가였다.


"그러나 이 의회 내의 언론 자유 옹호자들은 전체적으로 그들이 옹호하는 자유와 아무런 현실적 관계가 없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생사가 걸린 요구로 체득했던 적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머리의 문제이며, 거기에서 심장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는 괴테를 인용하면서 - 괴테는 화가가 여성의 어떤 아름다움을 제대로 그리려면, 실제로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를 한 사람이라도 사랑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언론의 자유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그 자유를 옹호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사랑한 경험이 있어야 한닥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회의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은 언론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동안에도 부족한 것 없이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이 대목을 읽고 부끄럽고 괴로웠다. 나 역시 자유를 '생사가 걸린 요구'로 여겼던 적이 없었다. 나는 중산층 부모를 두었고, 그렇기에 현재의 생활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르크스 평전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부르주아지 출신이면서도 자본주의를 해체시키는 철학을 삶에서 실천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 아버지를 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그런 그들이 여러 국가에서 추방당하고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키며 혁명을 이룩하려 했다는 점이 대단해 보였다. 어쩌면 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이 다른 누구보다 진심이었기에,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계급에 대해 거스름이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후에 주장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존재이며, 그들이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우연의 영역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 관계와 배치들이었다.


그는 <라이니셰 차이퉁>에서 사실상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정부와 그 반대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헤겔 좌파까지 적으로 돌리게 된다. 특히 그는 헤겔좌파들이 국가, 교회, 가족 등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화려한 방탕을 정치적 의무로 포장하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다.


지금은 진지하고, 씩씩하고, 취하지 않은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나서서 고귀한 목표들을 달성해야 하는 때다. 이런 시기에 야비하고 불량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은 큰 목소리로 단호하게 꾸짖어야 한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 본인이 본에서 바우어와 함께 술에 취해 거들먹거리고 교회에서 소란을 피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수도 있는 법이었다. 어쨌든 진정성이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나보다. 실제로 그는 편집장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기존의 허약하고 공허한 말만 내뱉기에 바쁘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냉철한 태도로 대하며 "공산주의를 논의할 생각이면, 다른 태도로, 좀 더 철저하게 논의할 것을 요구합니다" 라고 답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에 대해 논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철학, 신학, 법학은 모두 배웠지만, 정치와 경제에서는 초보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나중에 이를 인정했다.


<라이니셰 차이퉁>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카를 마르크스


그러니까 그도 어떤 면에서는 집에서 용돈을 받아 타 먹던 세상 물정에 대해 잘 모르던 새파란 이십대 청년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농민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모아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잔가지 하나를 집어가도 징역형을 받을 수 있었다. 더욱 터무니없는 일은 범법자는 삼림 소유자에게 변상을 해야 하는데, 변상 가격을 삼림 소유자가 정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합법화된 강도 행위를 보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마르크스는 또 깊은 생각이 뒷받침되지 않은 논증을 그 자체의 논리로 깨부수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도 얻었다. 지방 의회의 어떤 귀족 얼뜨기의 논평 -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나무를 훔치는 일이 절도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 을 보도하면서, 마르크스는 특유의 귀류법으로 힘차게 써나갔다.

"이것에서 유추해보면 그 의원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따귀를 때리는 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은 따귀를 때리는 일이 살인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따귀를 때리는 일은 살인으로 선포해야 한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하지만 당시 프로이센은 언론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심했고, 프로이센 관료들은 이미 이 발칙하고 불온한 신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지사였던 폰 샤퍼는 1842년 11월에 <라이니세 차이퉁>의 논조가 '점점 건방져간다' 고 불평했고, 당시 바지(?) 편집장이었던 루텐베르크가 해임된다. 정식 편집장 자리에 앉게 된 마르크스는 어떻게든 신문사를 유지시키기 위해 주지사를 안심시키는 편지를 쓴다. 그는 여기서 <라이니셰 차이퉁>은 오로지 "독일 국민 전체와 더불어 승승장구하시는 전하를 축복하고" 싶어할 뿐이라고 했다. 천하의 마르크스가 이토록 유연한 대처를 하다니. 그가 이런 식으로 적에게 꼬리를 내리는 건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에게 <라이니셰 차이퉁>이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서글펐다.


불행히도 1843년 3월 말로 <라이니셰 차이퉁>의 출판 허가를 취소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급속도로 인기를 얻고 있던 신문이었기에, 라인란트 전역에서 왕에게 구제를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폐간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한 주 전 썼던 모젤의 포도주 농부들의 경제적 곤경을 방치하는 당국에 대한 비난 글이 원인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후에는 더 강력한 힘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가 프로이센 왕에게 직접 폐간 요청을 했던 것이었다. 1월 4일자에 실렸던 러시아에 대한 통렬한 비난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군사정치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프로이센은 그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곳 분위기 때문에 숨이 막히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유를 위해서라 하지만 그런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은 좋지 않지요. 몽둥이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위선, 어리석음, 엄청난 독단에 질렸습니다. 또 우리 쪽에서 알랑거리고, 피하고, 말 몇 마디를 놓고 지나치게 따지는 것에도 질렸습니다. 결국 정부가 나에게 자유를 돌려준 셈이지요." - 마르크스가 루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가 보기에 독일에서는 그가 재기할 수 있는 미래가 없었다. <독일 연보>나 <라이니셰 차이퉁> 말고도 그가 신경써야 할 사람들 (아버지와 미래의 장인)도 모두 죽었다. 헤겔 좌파였던 동료 아르놀트 루게는 독일을 떠나 프랑스에서 <독일-프랑스 연보>를 만들겠다며 마르크스를 초대한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 소유욕과 결혼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예니와 약혼을 한 지 7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카를이 베를린에서 떠들썩한 대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예니는 트리어에서 그를 기다리며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떠날까봐 전전긍긍했다. 편지의 그녀의 불안이 종종 드러났는데, 카를은 그녀가 흔들린다는 증거로 잘못 해석하기도 했다.


"당신이 내 사랑과 정숙을 의심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오, 카를, 당신은 정말 나를 모르고, 내 입장을 알아주려 하지 않고, 내 슬픔에 무심해요. .... 당신이 잠시라도 여자가, 그것도 나처럼 독특한 상황에 처한 여자가 되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물론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을 줄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나뉘지 않은 그대로 남자에게 영원히 줄 수밖에 없겠지요. 또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 여자는 남자의 사랑 속에서 완전한 만족을 발견해야 하고,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을 잊어야 하겠지요." -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를이 정치적인 발언으로 대학가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불안해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일이에요. 사랑하는 귀여운 카를, 여기 고향에는 희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의 애인, 당신의 운명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주세요."


한편으로는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하긴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순종과 정절이 미덕이었을테니 예니도 거기에서 에외일 수 없었겠다. 어쨌든 예니는 정말 카를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녀는 카를이 그녀가 말한대로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걱정하긴 했지만 반대를 한 적은 없었다. 결혼생활 내내 예니는 카를의 둘도없는 지지자였고, 그녀가 했던 일들은 진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의 반골 기질과 괴짜스러움을 좋아했던 것 같다. 문제는 카를이 너무 빨리 변해간다는 점이었다. 예니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트리어의 명문가 출신의 그녀는 사교계 모임에서 다른 귀족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했지만 카를의 앞에만 서면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그가 너무 커보여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한마디도 할 수 가 없어요. 혈관에서 피가 멈추고, 영혼은 떨려요."-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실 그녀의 불안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었다. 카를은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베티나 폰 아르님에게 매력을 느끼고 가깝게 지내곤 했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어머니뻘이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예니도 마르크스보다 4살 연상이었으니, 그는 연상 킬러였나보다. 어머니를 무척 싫어했으면서도 어머니 같은 여자, 한없이 자신을 품어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정말 눈치 없게도 베티나를 트리어로 데리고 가서 예니와 만나도록 하기도 했다. 심지어 예니의 앞에서 베티나가 마르크스에게 함께 외출하자고 하자 (그것도 밤 9시라는 늦은 시간에), 예니를 두고 그 여자를 따라 나섰다.


예니는 카를을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그가 불구가 되어 그녀 곁에 영원히 머무르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그녀 스스로도 그것이 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그래서 당신의 지난 편지를 받은 뒤에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분쟁이나 결투에 말려들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괴로웠어요. 밤이나 낮이나 당신이 부상당하고, 피를 흘리고, 아파하는 모습이 보여요. 카를,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생각을 하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에요. 당신이 오른손을 잃은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 적도 있어요. 카를, 그때 나는 그것 때문에 황홀감에, 행복한 느낌에 젖었어요. 그렇게 되면 나는 진실로 당신에게 불가결한 존재가 될 것이고, 당신은 늘 나를 곁에 두고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또 그렇게 되면 나는 당신의 모든 귀중하고 고귀한 생각들을 받아 적으면서 정말로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도 그녀의 마음과 같았던 적이 있었으니 그녀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얼마나 카를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실제로 그녀는 마르크스의 집필활동에서 엄청나게 많은 역할들을 했다. 마르크스는 심한 악필이었는데, 그의 필체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던 사람은 예니와 엥겔스 단 두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예니는 그의 원고를 정리하고 필사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도맡아 했다. 남편의 사유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했다. 아마 마르크스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 같다. 진정으로 훌륭한 편집자는 그녀같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매달리기만 했지 사랑으로 헌신한 적이 없었다. 예니는 소유욕을 통해 소유욕을 넘어섰던 것 같다. 진정으로 절박한 사랑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예니의 관습적인 친척들은 그녀가 무직에 무일푼이며 이미 악명을 얻기 시작한 유대인과 결혼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녀의 오빠 역시 그들의 결혼을 막으려 했다. 그녀를 끝까지 지지해주었던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 베스트팔렌 남작 부인이었다. 1843년 6월 19일 오전 10시, 결국 그들은 사람들의 구설수를 피해 트리어에서 50 마일 떨어진 온천 휴양지 크로이츠나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측 하객은 예니의 어머니, 남동생, 그리고 지역의 친구들 몇몇 뿐이었고, 슬프게도... 카를의 친척과 가족은 단 한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예니의 어머니가 신혼 살림에 보탤 돈을 주었는데, 두 사람은 라인강으로 떠난 신혼여행길에서 만난 가난한 친구들을 배불러 먹여 주느라 그 돈을 일주일도 안 되어 탕진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예니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었겠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남작 부인의 집에서 얹혀 살며 동료 루게로부터 <독일-프랑스 연보> 창간 계획에 대한 소식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낮이면 카를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엄청난 강도로 독서를 하고 글을 썼고, 저녁이면 예니와 함께 강까지 산책을 나가곤 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이 때가 두 사람에게 유일하게 낭만적이고 설레는 신혼 생활이 아니었을까 싶다.


# 사랑과 실천: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헤겔 법철학 비판』


이맘때쯤 카를은『헤겔 법철학 비판』을 홀로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글은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등장하는 국가 개념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게서 영감을 받고 그를 열렬히 추종하기 시작한다. 포이어바흐 역시 헤겔의 제자로, 관념적이었던 스승의 철학에서 유물론으로 나아가던 선두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를 통해 카를은 주어와 술어의 도치를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법을 터득한다. 예를 들면,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는 것. 헌법이 국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헌법을 창조한다는 것. 헤겔 철학에서의 주장을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우면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후에 포이어바흐에게서도 한계를 느끼게 된다.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여전히 추상적이고 수동적인 지식에 머무른 채 현실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신을 만든다고 주장했지만, 왜 인간이 신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감정이 인간의 본질적 감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반면 마르크스는 달랐다. 그는 구체적 인간들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다.


여기서 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에세이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로까지 관통되는 그의 종교와 신에 대한 관점의 핵심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인간이 신을 '만들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왜?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으니까. 국민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국가는 그들의 울부짖음과 신음소리를 외면했으며,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고 수탈하기만 했으니까. 그 깜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절박하고 절망적인 마음으로 도움을 구할 절대자를 찾았던 것이었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바로 종교로 나타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카를 마르크스



사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은 마르크스가 그의 과거 동료였던 브루노 바우어의 유대인에 관한 글을 비난하기 위해 썼던 글이었다. 놀라웠던 것은 이 글 때문에 마르크스가 반유대주의자 라던지 유대인 혐오자라는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글을 직접 읽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말을 반복하며 종교를 철폐해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마르크스가 보았던 종교와 유대인 문제는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브루노 바우어는 핍박받는 유대인들을 구원해 주겠다는 취지로 그 글을 썼던 것 같지만,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바우어는 유대인들의 문제를 그들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써의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에서 찾는다. 그는 유대인들이 이 사상을 기반으로 그들만의 특별한 공동체를 만들어,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와 대립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었다. 신학 베이스와 어느정도 헤겔의 계승자로써의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던 그는, 헤겔의 역사의식과 비슷하게 기독교가 가장 발전된 형식의 종교라고 보았다. 물론 그는 그 기독교에서 마저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무신론자였지만, 어쨌든 유대교보다는 기독교가 더 발전된 형식의 종교이기에, 우선 유대교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에게 유대인 문제는 철저히 오직 종교적인 문제였다.


우리는 유대인의 비밀을 그들의 종교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의 비밀을 현실의 유대인에서 찾는다.

무엇이 유대교의 세속적인 근거인가? 실천적 욕구, 사욕이다.

무엇이 유대인의 세속적인 제의인가? 악덕 상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유대인의 세속적 신인가? 화폐야말로 유대인의 세속적 신이다.

악덕 상행위와 화폐로부터의 해방, 따라서 실천적인, 실질적인 유대교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해방일 것이다. -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카를 마르크스


이 구절만 읽으면 마르크스가 반유대주의자나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 (유대인은 상업에 능하며 이기적인 고리대금업자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편견을 편견대로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편견 자체가 유대인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서도 '왜?' 에 주목한다. 왜 유대인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유대인'을 '유대인스럽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유대인스러움'은 무엇일까? 바로, 화폐와 자본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제력을 이용해 왔던 것이었다. 마치 인민이 고통 속에서 아편으로써 종교를 찾았던 것처럼, 유대인도 고통 속에서 아편으로써 자본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와 자본은 인간이 구원을 요청하는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대인이 혐오의 대상이 된 근본적인 이유는 모두가 한정적인 자본(신)을 욕망한다는 데에 있었다.


"유대인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힘이 그들의 정치적 권리와 빚는 모순은 정치와 화폐의 힘 일반 사이의 모순이다. 정치가 화폐에 대해 관념적으로 우위를 행사하는 동안, 정치는 사실 화폐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카를 마르크스


그 당시 시대상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통찰력에 소름이 돋았다. 마르크스에게 유대인의 문제는, 당시 정치와 자본 그리고 종교의 복잡한 관계성의 핵심을 드러내주는 요체였다. 그는 이 글에서 유대인을 비판하지도, 동정하지도, 그들의 역사를 찬미하지도 않았으며, 글의 형식과 내용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것이 나에게 엄청나게 놀라운 점이었다.


그는 유대인 문제를 통해 종교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종교가 아니라 자본이 정치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치적 해방을 위해서는 인간적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적 해방을 이룰 수 있을까?


헤겔은 이에 대해 '국가'라고 답했다. 그는 가족 -> 시민사회 -> 국가의 순서로 공동체가 발전해 나간다고 보았다. '가족'은 사랑과 유대감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이지만 규모가 작다. '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가족'들이 모인 공동체이며,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이기적인 개인들이다.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통합하고 다스리는 주체가 '국가'이다. 헤겔이 생각하기에, 세계 역사는 자유의식의 발전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절대정신이었다. 이 절대정신이 현실에 가장 잘 구현된 공동체가 바로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국가를 가장 이상적인 최고 단계의 공동체로 보았다. 국가의 기반인 헌법과 의무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실현하는 방법이었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헤겔도 마르크스도, 시민사회에 내재된 근본적인 모순은 비슷하게 파악한 것 같다. 마르크스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문을 기초로 제정된 프랑스 헌법을 통해 시민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타자와 관계하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데, 헌법에서 말하는 '인권'은 오히려 인간들을 분리하여 개별적인 원자로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고립된 단자 Monade').


제6조. "자유는 타인의 권리에 해를 입히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 1793년 프랑스 헌법

그러나 자유의 인권은 인간과 인간의 결합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분리에 기초를 둔다. 그것은 분리의 권리이고, 자기 자신으로 철수한 편협한 개인의 권리이다. 자유권의 실천적 적용이 사적 소유권이다. 사적 소유의 인권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제16조. 사적 소유권은 자신의 재산, 수입, 노동의 성과, 자신의 근면을 임의적으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시민의 권리이다.- 1793년 프랑스 헌법

따라서 사적 소유의 인권은 타인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그것을 처분할 권리, 즉 사욕의 권리이다. 그 개별적 자유 및 자유의 응용이 시민사회의 토대를 형성한다. 시민사회는 모든 인간이 타인 속에서 자유의 실현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제한을 발견하도록 한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카를 마르크스


이러한 헌법을 토대로 구성된 시민사회는 이기적 인간들을 모아놓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만 그 보편성 때문에 각각의 개별자에게는 의식되지 않는, 원시 국가의 단계에 불과하다. 헤겔은 이러한 이기적 시민들을 '공민' (헌법에서 말하는, 법을 통해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공동체적 존재)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부분이 헤겔의 헛발질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와 '공민'을 기준으로 시민사회를 끼워 맞추려고 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헤겔은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속에서 조화시킬 뿐이다" 라고 비판했던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달랐다. 부자와 가난한자가 귀족과 천민이 뒤섞여 사는 사회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고 어영부영 이상적인 말들로 구성된 헌법과 권리로는 인간이 진짜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진짜 열쇠는 '시민사회' 속에서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들 개개인에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갈등 그 자체였던 것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 추상적 공민을 자기 안으로 환수하고, 자신의 경험적 삶 안에서, 개별적 노동 안에서, 개별적 관계 안에서 개별적인 인간으로 유적 존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더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 안에서 그 자체로 분리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해방이 완성된다 -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카를 마르크스


헤겔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아마도 헤겔은 겁쟁이였을 것 같다. 타자가 우글거리는 세계가 무섭고 잔혹한 정글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타인과 아주 사소한 갈등만 생겨도 쉽게 포기하고 회피를 하곤 했다. 아예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위선적인 관계를 맺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아 절망스럽지만, 다시 마르크스를 통해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남작 부인의 집에서 파리로 떠나며 대기하던 시기에, 『헤겔 법철학 비판』과 『유대인에 대하여』를 쓰던 그 시기에, 포이어바흐에게 프로이센의 보수적 궁정 철학자 폰 셸링에 대한 파괴 작업을 제안하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포이어바흐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포이어바흐는 이론 자체를 완벽하게 연마하기 전에 이론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보냈다. 반면 마르크스는 그 둘이 불가분이라고, 또는 불가분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실천만이 완벽을 만들어낸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이론과 실천, 성찰과 수행, 앎과 삶은 인간의 두 다리다. 우리는 그 두 다리로 매 순간 걸어 나가야한다. 그토록 들어왔던 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잔혹하고 두렵게 등을 떠미는 것만 같다.


프랑스에서 모든 것이 되고자 하면 그것으로 뭔가는 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도 아무것도 될 수 없다. 프랑스에서는 부분적 해방이 보편적 해방의 기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보편적 해방이 부분적 해방의 절대조건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글들을 보면 이런 변증법적 도치와 대조가 수사학적 표현으로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는 비평을 종종 받곤 했나보다. 이에 대해 프랜시스 윈은 마르크스를 옹호하고 나선다.


마르크스의 이런 스타일상의 지나침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의 악덕은 동시에 미덕이기도 하며, 역설과 도치, 대조법과 교차대구법에 중독된 정신의 표현이다. 때로는 이런 변증법적인 열정이 공허한 수사를 낳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놀랍고 독창적인 통찰을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마르크스는 어떤 것도 당연시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뒤집어보았다. 사회 자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강한 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천한 자들을 높일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헤겔 비판에서 처음으로 답을 제시했다. 필요한 것은 "근본적 사슬에 묶인 계급, 시민 사회의 계급이면서 시민 사회의 계급이 아닌 계급, 모든 계급을 해체하는 계급이다 .... 하나의 특정한 계급으로서 이렇게 사회의 해체를 담당하는 계급을 프롤레타리아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윈이 왜 마르크스의 이론 그 자체보다도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 집중하여 이 평전을 썼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는 마르크스를 진심으로 애정하고 존경했던 것 같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한 제자가 바치는 스승에 대한 헌사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계급은 그 위의 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에 나서는 순간 그 밑의 계급과 투쟁에 말려들게 된다. 따라서 제후는 왕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관료는 귀족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브루주아지는 이 모두에 대해 투쟁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 『공산당 선언』,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이 혁명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철저함으로 유명한 독일은 철저한 혁명이 아니면 혁명을 이룰 수 없다" 고 말하며 독일 혁명을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브루주아지에 대한 혁명이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라고 생각했다. 1843년 가을, 마르크스 부부는 파리로 건너가 혁명가로써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1818년 ~ 1838년 대학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