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 1838년 대학 시절

인간 마르크스 읽기

by 홍보경

# 유년시절과 가족


마르크스는 공식 신앙이 복음주의 신교인 나라 안에서 가톨릭이 지배적이던 도시 출신의 부르주아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자 무국적자로 죽었으며, 어른이 된 후 부르주아지의 멸망과 민족 국가의 소멸을 예측하는 데 삶을 바쳤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종교, 계급, 국적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내린 저주라고 생각했던 소외를 스스로 체현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 트리어 브뤽커가세 664번지에 있는 집 2층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9명 (4남 5녀, 마르크스는 그 중 셋째)의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대가족이었다. 누이들을 엄하게 대했다고 하는 것 말고는,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막내딸 엘레아노어에 따르면 그는 어린시절 누이들에게 억지로 지저분한 케이크를 먹이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누이들이 그 케이크를 먹으면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가 보냈던 편지들이나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리어는 라인란트 (Rheinland, 라인강 유역의 프로이센 서부지역)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오래되고 보수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는 도시였다. 아버지 히르셸 마르크스는 어느 정도 재산이 있고 교육도 받은 중간 계급의 유대인이었고, 어머니 헨리에테 역시 네덜란드 유대인 상인 가정 출신이었다. 트리어는 나폴레옹 전쟁시기 프랑스로 합병되었다가 다시 프로이센 제국에 통합 되었는데, 프랑스 합병 시기에 기존의 게르만적 문화와 다른 프랑스 문화의 자유로운 분위기 (언론의 자유, 헌법의 자유, 종교적 관용)를 받아들이면서, 유대인들은 잠깐 맛본 자유로 인해 프로이센 제국의 유대교 탄압에 오히려 더 반발심을 느끼게 되었다. 1812년 프로이센 칙령에 의해 유대인들은 공직이나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없게 되었기에 이러한 차이는 더욱 극심해졌다. 히르셸은 유대교에 종교적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았었고, 그의 신분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루터파 기독교 (개신교)로 개종을 하며 하인리히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15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으며, 1819년에는 방 열개짜리 개인 소유 주택으로 이사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부유하고 인정받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르셸은 나폴레옹 지배 시기에 정치, 종교, 인생, 예술과 관련된 자유로운 프랑스 사상에 매료되었고 계몽된 시민들이 다니는 정치와 문학 토론장인 트리어 카지노 클럽의 열성적인 회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카를과 같은 부류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장남인 그에게 집착과 간섭이 심했고, 아마도 젊은 카를의 생각에 기만적이고 이중적이라고 여겼을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그의 젊은 혈기를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어머니 헨리에테의 관심은 오직 가족 뿐이었다. 그녀가 마르크스의 대학시절 보냈던 편지를 보며 가슴이 콱 막혔다. 그녀가 우리 엄마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카를, 청결과 질서를 절대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해야겠구나. 건강과 쾌적함이 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네 방을 자주 닦되, 꼭 시간을 정해놓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엄하게 타이르고 싶구나. 사랑하는 카를, 일주일에 한 번씩 스펀지와 비누로 방을 닦도록 해라. 커피는 어떻게 해먹니? 네가 끓여 마시는 거냐? 맛은 어떠냐? 네가 집을 어떻게 꾸려가는지 모든 것을 알려다오". - 헨리에테가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건강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피해야 한다. 너무 덥게 지내도 안 되고, 포도주나 커피를 많이 마셔도 안 되고, 자극적인 것을 먹어도 안 되고, 후추나 양념을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담배는 절대 피우지 말고, 밤에 늦게까지 앉아 있지 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라. 또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카를, 몸이 다시 좋아질 때까지 춤은 추지 마라." - 헨리에테가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고, 아버지 하인리히가 그녀의 부인에 대해 했던 말까지도 우리 아빠가 엄마에 대해 하는 말과 소름끼치도록 똑같았다.


"너도 네 어머니를 알잖느냐, 네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이 많은 사람인지......" - 하인리히가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분위기의 가정에서 그가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을지 알만했다. 그는 가족, 종교, 국적과 단절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여러가지 사정들로 인해 그 결심을 지키지는 못했다. 특히나 언제나 궁핍했던 그는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끊임없이 쓰곤 했다. 절친한 동료 엥겔스의 연인 메리 번스가 죽었을 때에는 조문이랍시고 어머니에 대한 폐륜(?) 발언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학비, 집세 독촉이 심하다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 카를이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기의 마르크스는 언제나처럼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죽으면 받을 유산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절친의 애인 조문 편지에 어머니에 대한 저런 발언을 써서 보낸 걸 보면 마르크스는 사이코패스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친구의 깊은 슬픔 앞에서 내 고통만 생각하고 마르크스의 폐륜급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던 적이 있었다. 혹은 직접적으로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빠져들었던 적이 많았다. 입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냥 내가 욕을 먹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랬으니 차라리 카를처럼 순수하고 솔직한 것이 낫다. 실제로 엥겔스와 메리번스 일화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극 T스러운 답장을 받고 상처받아 서운하다는 답장을 보냈는데, 마르크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왠만한 일들에 대해서는 군말없이 지원하고 서운함을 내비치지도 않았었기에 그 사건이 유일하게 자신의 서운함을 드러냈던 것이었다. 마르크스 역시 워낙 강한 자존심과 성격 때문에 좀처럼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엥겔스의 편지를 받고 진심을 다해 사과를 했다. 마르크스의 사과를 받은 엥겔스는 바로 마음을 풀고 그 사건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을 보고 참 많이 부끄러웠다. 나였더라면 친구의 슬픔에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슬픈 척 하던가, 친구가 화를 내는 것이 서운해서 사과를 안 하거나 (심지어 나보다 더 큰 고통에 빠져있는 친구인데도), 나의 고통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해서 아무리 사과를 받아도 뒤끝 작렬이던가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이 에피소드가 마음에 많이 남았다. 찌질하고 쪼잔하고 비겁한 나에 비해 두 사람은 진실되고 멋있는 사람들이었다.


# 나르시시스트 오타쿠 로맨티스트


카를은 1830년 트리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자기 동창들에 대해 '시골뜨기'라며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건 그의 지성이 그들을 훌쩍 뛰어 넘을만큼 깨어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리어 고등학교의 교사진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자였고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일 정도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그의 혁명가적 자질을 키워내는데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된다.


1835년 카를은 본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18살에 약한 가슴 때문에 병역을 면제받았을 정도로 몸이 약했다. 그럼에도 본대학에서 보내는 1년 동안, 그는 술과 담배에 탐닉하고 난잡한 소동들을 일으키는 등 젊은이 특유의 경박함으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는 결국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로 그를 전학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했다.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트리어 시절 학교 친구였던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의 누이 요한나 베르타 율리아 예니 폰 베스트팔렌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학식으로 인기가 많은 여자였다. 베스트팔렌 가문은 프로이센의 지체높은 귀족이었다. 그런 가문 출신의 그녀가 네 살 연하의 연하의 부르주아 출신 유대인과 결혼하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금기시 되는 일은 연상 여성과 연하 남성의 결혼이었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던 예니는 마르크스의 뛰어난 지성과 불같은 성격에 홀딱 반해 버렸고, 1863년에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약혼을 해 버렸다.


에드가와 예니의 집안과 카를의 집안은 어렸을 적부터 친했기에, 어릴적부터 조숙하고 영민했던 마르크스를 예니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셰익스피어의 많은 부분을 외우고 있었고 예니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나서는 함께 산책을 하며 셰익스피어와 단테 그리고 괴테의 작품들을 낭독하곤 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30년간 망명생활을 하며 마르크스 가족이 유일하게 영국 문화계와 접촉했던 때는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날이었다. 마르크스는 언론이나 책을 통해 자신의 정적을 신랄하게 비판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 셰익스피어 구절의 인용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학 텍스트를 조금 더 활기있기 만들기 위해서, 가족 간의 농담에서, 부인에게 보내는 연정의 편지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곤 했다고 한다.


당신은 내 앞에 있습니다. 실제 크기 그대로. 나는 그대를 내 품에 안아 올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키스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외칩니다.

"마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진정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베네치아의 무어인 (오셀로에 등장하는 인물. 무어는 마르크스의 별명이기도 함)이 느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 독을 품은 혀로 나를 중상하는 수많은 적들 가운데 내가 이류 극장의 로맨틱한 배우의 연기를 한다고 비난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 악당들이 재치가 있었다면, 그들은 한쪽에 '생산관계와 사회관계'를 묘사하고 또 한쪽에는 당신 발 아래 무릎 꿇은 내 모습을 묘사해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써놓았겠지요. "이 그림과 저 그림을 비교해보라." (헴릿의 한 구절) - 카를이 결혼 13년차에 예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 아저씨는 상당히 로맨티스트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론에 빗대어 '당신 발 아래 무릎 꿇은 내 모습'을 묘사하다니, 게다가 거기에 헴릿 구절의 인용을 덧붙이다니, 완전 나르시시스트 오타쿠다. 예니에게는 이런 마르크스의 모습마저도 지적이고 섹시해 보였을까. 하긴, 읽었던 책의 구절을 암송하고 인물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적당한 맥락에 사용하는 것은 사실 영민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어떤 개념을 이해했느냐의 지표로 적당한 예시를 들 수 있는지의 여부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적확한 예시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는 경제학 뿐만 아니라 문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자신이 흡수한 지식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재능이 있었다. 베를린대학교에서 법 철학과 관련된 300 페이지 가량의 원고를 쓰면서, 그는 언뜻 주제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예술사』를 꼼꼼히 공부하고,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를 읽으며 동물의 예술적 본능에 매혹되기도 했다. 또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오비디우스의 『트리스티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번역했으며, 독학으로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 그 시기를 거치며 자신이 읽는 모든 책에서 발췌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 오타쿠 로맨티스트이긴 하지만, 나도 그 시대에 태어나 마르크스를 만났더라면 그에게 반했을 것 같다.



# 헤겔과의 만남


헤겔은 젊은 시절 마르크스가 가장 정열을 바쳤던 인물 중 하나였다. 마르크스 사상이 꽃 피는데에 가장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헤겔 철학을 공부했던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 대학에서의 첫 1년동안 그는 전공인 법학에 집중하기 위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접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에 그는 문학에 관심을 돌리며 서정시를 쓰기도 하고, 위에서 언급한 300 페이지 가량의 법 철학에 대한 원고를 쓰기도 하지만, 그가 일찍부터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던 문제 의식에 다시금 봉착하게 된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법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 즉 기본적 원칙들, 사유들, 개념 정의들은 모든 실제적인 법률, 모든 실제적인 법 형식과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 카를이 하인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 법률의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그는 아마도 이러한 부조리함을 꽤 어린 시절부터 느껴오지 않았을까 싶다. 유대교의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개종한 아버지 (종교와 정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직업인 변호사 (법이란 무엇인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 (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트리어의 프랑스식 계몽주의적 분위기 등으로 인해 (자유란 무엇인가), 그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무언가 중대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 같다. 그는 법 철학 원고를 쓰며 그는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지만, 결국 그 간극을 좁힐 수 없음을 깨닫고 저술을 포기하면서 문학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이 때 그가 써낸 유일한 단편 소설 「전갈과 펠릭스」를 집필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프랜시스 윈은 이 구절에서 마르크스가 15년 뒤에 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도입부와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프랜시스 윈의 책에 인용된 「전갈과 펠릭스」 구절에서는 변증법이 연상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윈이 말했던 것처럼 "마르크스가 헤겔과 맞붙은 것 자체도 어찌보면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거인은..... 난쟁이를 전제로 하고, 모든 천재는 완고한 속물을 전제로 하고, 모든 바다 폭풍은 흙탕물을 전제로 한다. 앞엣것이 사라지면 뒤엣것이 시작되어, 식탁에 앉아 긴 다리를 오만하게 뻗는다.

앞엣것은 이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뒤엣것은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남는다. 샴페인이 역겨운 뒷맛을 남긴다는 사실, 영웅 카이사르가 어릿광대 옥타비아누스를 뒤에 남겼다는 사실, 나폴레옹 황제가 부르주아 왕 루이 필립을 남겼다는 사실 등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전갈과 펠릭스」


헤겔은 어디에선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모든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되풀이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헤겔은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즉 첫 번째는 위대한 비극이 되지만, 두 번째는 볼품 없는 소극이 된다는 사실이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카를 마르크스


헤겔은 1818년부터 1831년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를 했다. 5년 뒤 마르크스가 입학했을 때에는 헤겔 철학을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에는 급진적이었던 청년 시기의 헤겔을 계승하던 청년 헤겔주의자들이, 반대편에는 중년 이후 프로이센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세계의 객관적 필연성과 합리성' 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후기 헤겔을 계승하던 자들이 있었다. 헤겔의 『법철학강요』에 등장하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라는 구절에 대해 급진적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이 구절의 앞부분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의 입장이었고 보수적 지지자들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의 입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 「전갈과 펠릭스」와 운문극 「울라넴」 창작 이후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문학 분야에는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는 좌절한다. 법 철학 원고를 쓰며 해결되지 않았던 간극을 예술적 창조로 해결하려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슬프게도... 이 대목에서 그의 고뇌와 좌절이 이해가 갔다). 결국 잠 못 이루는 많은 밤을 보내며 고민을 하느라 몸이 쇠약해진 그는 시골에 가서 요양을 하며 종교, 자연, 역사에 관한 24 페이지짜리 대화록을 쓰며 고민했지만, 결국 '마지막 명제가 결국 헤겔주의 체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헤겔 철학을 받아들이고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는 헤겔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 것에 자존심 상해하고 분해 했는데 ("며칠 동안 분해서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슈프레강의 더러운 물 옆에 있는 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이 '영혼을 씻어주고 차를 희석시켜주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엥겔스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떻게 천재를 질투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천재란 아주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재주가 없는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이 얻을 수 없는 권리임을 알 수 있지. 그런 것을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이 엄청나게 속 좁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꼴밖에 안 되네" 라고 말했던 것처럼, 마르크스 역시 당시 자신보다 앞서 나갔던 헤겔의 철학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흥미롭게도 헤겔 역시 이상을 버리고 '성숙'을 끌어안던 시기에 비슷한 파탄을 겪었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둘 다 소외-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속한 사회와 버성기게 되는 것- 문제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세기에 '소외(alienation)'에는 발광이나 광기라는 뜻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alienist'는 정신 병리학자나 정신병 전문의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어떤 면에서, 천재들은 유사한 지점을 포착하게 되나보다. 헤겔은 관념적인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부분에서 '소외'에 집중했으니 결국 마주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마르크스는 요양 시기동안 헤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이후 대학 친구를 통해 한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헤겔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하는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 '박사 클럽'을 소개받고 그곳에서 활동을 하곤 했다.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안 그래도 그가 당시 유행하는 헤겔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결국 마르크스가 편지로 자신의 지적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때 자식의 앞날에 대해 걱정 때문에 결핵 증세가 더 깊어지고 만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부모가 보낸 편지를 거의 무시하고, 건강에 대해 묻지도 않고, 부모 돈을 마구 가져다 쓰고, 방학 때 집에 들르지도 않는 등, 집안에서 골칫거리 탕자가 된다.


"본에서 너의 거친 소행이 끝나자마자, 네 옛 죄들 - 아닌게 아니라 아주 많았다 - 이 씻겨나가자마자, 사랑의 번민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놀랐다. ...... 너는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가족에게서 소원해졌구나......" - 하인리히가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럼에도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그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는 편지에서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함을 인정한다.


"나는 오직 제안만 하고 조언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너는 나보다 더 커버렸다. 이런 문제에서는 네가 일반적으로 나보다 나으니, 네 생각대로 결정을 내리라고 맡겨둘 수밖에 없구나." - 하인리히가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인리히는 1838년 5월 10일 5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카를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유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 진짜 이유기는 했지만, 베를린에서 트리어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핑계를 댔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가 가족에게 너무 매몰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헤겔주의자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변화에 대한 긴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도 아버지에게 이해받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가 그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 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의 '착한 척'의 역사


카를 마르크스의 생애에 대해 읽으며 나의 삶을 비추어보게 됐다. 나는 성격이 직설적이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다. 좋고 싫음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해왔다. 하지만 사실 나는 자의식이 무척 강해서 호불호가 뚜렷한 편이다. 우습게도 과거에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참으며 좋은 사람인 척 하다보니 내가 나 스스로를 속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억압된 감정들이 내 안에서 뒤틀어져서 더 어둡고 음흉한 욕망으로 자라나곤 했다.


마르크스 평전을 읽으며 나의 오래된 고민이자 화두를 다시금 고민하고 있다. 선과 악. 위선과 '진짜'선에 대해서. 카르 마르크스라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모순적인 모습들에 관심이 갔다. 그는 "사회 개혁은 절대 강한 자들이 약해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약한 자들이 강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라고 이야기 했다. 동시에 딸들과 했던 '고백' 게임에서 여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마음이 '약함' 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어머니의 과도한 걱정을, 병들고 늙은 어머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랄만큼 혐오했다. 가정에 대한 관심과 신경쇠약은 그 시대 여성들의 '약함'의 특성 같은 것이었다. 그의 아내인 예니 역시 약했고 자주 아팠다. 하지만 그와 가정에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함과 동시에 지겨워했던 것 같다. 가정부와 바람을 펴서 혼외자를 낳기도 했는데, 예니는 그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며 카를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그 가정부와 예니는 평생을 동지처럼 의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능동적 실천으로서의 사랑을 실현하는 조시마 장로와 신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하는 부인이 하는 대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간호사의 꿈을 가지고 있는 부인이 조시마 장로에게 묻는다.


"바로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답니다! 이것이 저에게 여러 질문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하고요. 눈을 감고서 자문해 본답니다. 이 길 (간호사)로 들어서서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 하고요. 만약 네가 어떤 환자의 상처를 씻겨 주는데 그 환자가 너에게 당장 고마움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변덕을 부려 너를 괴롭힌다면, 너의 박애적인 봉사를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아예 그것을 알아주지도 않고 너에게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 요구를 하고 심지어 어디 상부에다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 땐 어떻게 될까? 너의 사랑은 지속될 것인가, 아닌가? 자, 그래서 말입니다. 저는 전율하면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만약 인류에 대해 나의 '실천적인' 사랑을 곧바로 식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배은망덕뿐이라고 결로 내렸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보답의 노예인 겁니다. 저는 당장 보답을, 즉 칭찬을 요구하는 거예요,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보답해 주길 말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라면 저는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요!"


이에 조시마 장로는 그녀의 고민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던 다른 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어느 의사)는 이미 나이가 꽤 지긋이 든, 이론의 여지가 없이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도 부인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했는데, 비록 농담이긴 했지만 서글픈 농담이었지요. 인류를 사랑하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놀라곤 한다고 말하더군요.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몽상 속에서는 인류에 대한 열정적인 봉사를 생각하기에 이르고 갑자기 어떤 식으로든 요구가 있을 시엔 어쩌면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가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고 말하더군요. 상대방이 자기 곁에 있을라치면 곧 그라는 사람 자체가 자기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자유를 밀어낸답니다. 꼬박 이십 사 시간 동안이면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증오하게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는 너무 오랫동안 식사를 하니까, 다른 누구는 콧물 감기에 걸려 끊임없이 코를 푸니까 말이죠.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곧 그들의 적이 된답니다. 대신, 개별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게 될수록 언제나 인류 전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더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절망에 빠져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조시마 장로가 답한다.


"부인이 지금 저와 이토록 진실되게 이야기를 나누셨지만, 만약 그것이 지금처럼 저에게서 그저 부인의 의로움에 대한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실천적인 사랑이라는 위업에 있어선 물론,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그저 부인의 몽상 속에 머물게 될 것이고 삶 자체는 환영처럼 명멸해 버리겠지요. 그때는 응당, 내세에 대해서도 잊으실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자연스럽게 어떻게든 마음은 편해질 테지요"


"설령 행복에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인이 좋은 길로 들어섰음을 늘 기억하시고 거기서 일탈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거짓을, 어떤 것이든 거짓을 피하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 시간, 매 순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이건 자기 자신이건 누군가를 거리껴 하지도 마십시오. 부인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부인께 추잡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인께서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인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정화되는 겁니다. 공포도 역시 피하십시오. 공포란 그저 온갖 거짓의 결과일 따름이지만, 사랑을 성취함에 있어 자신의 옹졸함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부인의 어떤 고약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큰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부인께 이보다 더 즐거운 얘기를 더 이상 들려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니, 몽상적인 사랑과 비교할 때 실천적인 사랑이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몽상적인 사랑은 어서 빨리 만족할 만한 위업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처럼 어서 빨리 성사된다는 조건으로만 말이죠.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자면 완전히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리 말해 두건대 부인께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목도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될 바로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부인께 미리 말씀드리지만, 부인은 갑자기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부인 앞에서 언제나 부인을 사랑했고 언제나 부인을 인도했던 주님의 기적적인 힘을 보게 될 겁니다."


조시마 장로가 하는 말이 어디서 많이 들어온 말들이라 혼자 큭큭대며 읽었던 구절들이다. 간호사의 길을 고민하는 부인처럼, 나도 어줍잖게 인류애를 운운하곤 했다. 하지만 조시마 장로가 만났던 의사처럼, 개별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면 사사건건 불편하고 마음에 걸렸다. 또 나의 의로움에 대해 칭찬받고 싶어 정직함을 교묘하게 포장했다. 나의 착한 척의 역사는 굉장히 길고 추잡하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해 온 나날들. 그로 인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불행이 찾아왔던가. 나는 조시마 장로가 말했던 것처럼, 나 자신마저 속였던 거짓들로 인해 찾아온 공포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사랑을 성취함에 있어 나의 옹졸함을 두려워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뒤에서 은근히 계산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두려워서 사랑하는 척 했다. 사랑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고약한 행동들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 모든 것이 "몽상적인 사랑과 비교할 때 실천적인 사랑이란 잔혹하고 무서운 것" 이라는 진실을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가 맺어왔던 관계들이 기쁨의 연대가 아니라 슬픔의 연대였던 이유였다.


나는 더 이상 착한 척 하며 살고 싶지 않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 하며 살고 싶지 않다. 나를 너무나도 불행하게 했던 위선과 기만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했던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타인에게 칭찬받기 위해 인간을 애정했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타인의 칭찬을 갈구하고 명예를 쫓았더라면, 그 오랜 세월동안 가난하고 인정받지도 못한 채 병마와 싸워가며, 싸구려 술과 담배에 간신히 의존해 글을 써 나갈 수 있었을리가 없다. 헤겔이 몽상적 사랑을 대변하는 학자라면 마르크스는 실천적인 사랑의 투사였다. 자신의 삶을 바쳐 인류에 위대한 유산을 남겨준 그에게 떳떳할만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자신도 면목도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만의 싸움을 해 나가고 싶다. 수많은 유혹과 고독이 찾아올 때 카를 마르크스라는 사람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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