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마르크스 읽기
# 기쁨의 혁명가
1843년 가을, 『독일-프랑스 연보』의 출간을 담당하기로 한 3인방 (아르놀트 루게, 카를 마르크스, 게오르크 헤르베그)과 그 부인들이 파리에 도착했다. 당시 파리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1830년 7월 혁명을 거치며, 한마디로 유럽 대륙의 자유주의 시민 혁명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하여 당대의 가장 유명한 정치 사상가들이 거의 대부분 프랑스인이었을 정도였다. 마르크스 부부가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는 1830년 7월 혁명 이후 국민 의회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루이 필리프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그는 집권 초기 '시민왕'이라고 불리우며 자유주의적이고 국민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보수적이고 부르주아지 계층 위주의 정책을 펴며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발생할 정도로 파리 시내는 불안정과 흥분 그리고 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아르놀트 루게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팔랑스테르' (프랑스어로는 '팔랑쥬 phalange')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지내자고 제안한다. '팔랑스테르'는 샤를 푸리에가 창안한 공동체 개념이다. 이 공동체는 즐거운 노동과 자유로운 사랑을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서 2시간마다 노동의 종류를 바꿀 수 있다거나,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가 가능한 식이다. 물론 푸리에는 공동체가 방종하고 저열한 단체로 전락하는 것을 가장 경계했고, 사랑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소유욕과 질투의 고통을 정화시킬 때 순수한 행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성의 성적 해방에 관해 지금봐도 놀라울만큼 진보적이었다. 흥미롭게도 '페미니즘'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샤를 푸리에였다.
루게의 제안에 게오르크 부부는 거절을 했지만 마르크스 부부는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방노 거리 23번지에 있는 루게의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이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푸리에의 기획과는 달리 그 형태는 가부장적인 형태를 답습했고, 무엇보다 꼼꼼하고 청교도적이며 가정적이었던 루게는 마르크스의 무질서하고 충동적인 습관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실험은 2주 정도 후에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루게는 마르크스의 생활 습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아무것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모든 일을 중간에 그만두고 나서는 다시 끝없는 책의 바다에 뛰어든다. .... 병이 날 정도로 일을 하여, 사흘, 심지어 나흘 밤을 연속으로 새기도 한다..."
그리고 루게는 마르크스가 여가를 즐기는 방식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부인이 마르크스의 생일 선물로 1백 프랑이나 나가는 승마용 회초리를 사주었다. 그러나 이 가엾은 녀석은 말을 탈 줄 모르고, 말도 없다. 그래도 이 녀석은 보는 것마다 '갖고' 싶어한다. 마차, 멋진 옷, 꽃밭, 박람회에서 본 새 가구, 심지어 하늘의 달까지."
프랜시스 윈은 그가 원래 이렇게 사치품(?)이라 불리울법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음에도 갖고 싶어했던 이유가 예니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르크스 부부는 돈이 없었는데, 마침 『라이니셰 차이퉁 (라인신문)』의 전 주주들이 1천 탈러를 기부하여 모처럼 큰돈이 생긴 참이었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예니가 그 당시 임신을 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앞으로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을거라는 걸 마르크스는 잘 알고 있었나보다. 그 시대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부인을 그 정도로까지 생각해 주었다니, 다시 한 번 놀랐다.
평전을 읽으며 마르크스가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독립적인 존재로 대하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자신은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평생을 투신하며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살더라도, 귀족 출신이었던 아내의 생활 수준을 맞춰 주려고 노력한다던지, 딸들에게 중상류층 계층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개인 교습을 시키기도 했다. 자신의 신념보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마르크스 그 자신도 가끔은 화려하고 즐거운 쾌락을 즐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그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누리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바에 거스름이 없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테니 말이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됐다. 만약 내가 마르크스였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족들에게 강요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내가 경직되고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최근에 들어서야 깨닫게 됐다. 유연하지 못하고 고지식하며, 사람보다 자신의 신념이 먼저 앞서는 건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보수적인 태도다.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로부터 시작해서 금욕과 복종을 강요하는 인간적 신을 부정하고 샤를 푸리에가 말하는 쾌락 (물론 결국은 푸리에를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기는 했지만)을 긍정했다. 마르크스는 기쁨을 따르는 혁명가였다. 그는 기쁨과 즐거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844년 노동절에 예니는 첫째 딸 예니를 낳는다. 그녀는 ‘예니헨' 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았다. 그녀의 검은 눈과 말갈기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마르크스를 똑 빼다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마르크스 부부는 완전 초보 부모여서 육아에서는 완전히 무능력했던 것이었다. 결국 6월 경, 예니는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몇달을 지내며 어머니 교육(?)을 받기로 한다.
"가엾은 꼬마 인형이 애처롭게도 여행 뒤에 병이 들었어요. 변비 때문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여서 그렇대요. 우리는 뚱뚱한 돼지(가족의 주치의인 로베르트 슐라이허)를 찾아갔는데, 그는 우리 아기가 인공식으로는 쉽게 회복하지 못할 테니 반드시 유모를 두라고 했어요. ....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기는 이제 위험에서 거의 벗어났어요." - 예니가 마르크스에 보낸 편지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아기가 죽기도 하나?' 라는 의문이 들지만 꿀꺽 삼켜본다. 초보 엄마 예니의 상황은 무척 심각했던 것 같으니.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예니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잘하지 못할 것 같다. 다행히도 유모가 예니가 파리로 돌아올 때 함께 오게 되었다. 예니는 마르크스에게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것을 불안해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윈이 말한 것처럼, "늘 카를 마르크스를 피해간 삶의 필수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안정된 수입이었다.".
# 브로맨스
마르크스를 포함한 세 사람이 파리에서 함께 꾸려 나가려 했던 『독일-프랑스 연보』는 첫 호를 발행한 뒤 폐간되고 말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잡지에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을 싣는 데 성공한다. 마르크스는 어렸을 때부터 하이네를 존경했으며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와 사귀기 시작했다. 하이네는 니체가 "19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독일어를 사용하는 가장 탁월한 작가 중 한 사람" 이라고 극찬했고 그의 시가 슈만과 슈베르트의 가곡의 소재가 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시인이었다.
하이네와의 우정은 엥겔스와의 우정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견고하게 마르크스를 지지해 주었던 것 같다. 엥겔스와의 우정이 남성적인 느낌이라면, 하이네와의 우정은 조금 더 여성적이라고 해야할까. 두 사람의 일화가 조금 웃기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하이네는 엄청난 유리멘탈이었는데, 어떻게보면 나약하고 노예근성에 우유부단하다고 보일수도 있는 그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매우 너그럽게 감싸 주었다. 프랜시스 윈이 말하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우상 파괴적인 경향"을 자주 보이곤 했으니, 하이네에 대한 이런 대우는 대단히 예외적인 것이었다. 막내딸 엘레아노어는 하이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하이네가 매일같이 찾아와 마르크스 부부에게 자신의 시를 낭독해 의견을 듣던 때가 있었다. 마르크스 부부는 하이네의 8행시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어느 한 행에 대해 장시간 검토하는 경우가 있었다. 모든 퇴고가 끝나고 어색한 부분이 고쳐질 때까지 그들은 시를 갈고 닦았다. 이것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네는 여러 가지 비평에 대해 병적일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문인 중의 그 누구라도 지상에서 하이네의 감정을 자극하면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마르크스에게 달려왔다. 마르크스는 그때마다 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인이 하이네를 만나 기지를 발휘하고 친절을 베풀면 시인의 상한 기분이 어느새 풀어졌다"
이건 거의 어린아이 응석을 받아주는 수준이 아닐까. 충격적(?)인 건 하이네가 마르크스보다 21살이나 연상이었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아끼는 친구들에게는 정말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다. 물론 고생은 예니가 더 많이 한 것 같지만. 하이네는 예니의 날카롭고 세련된 비평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예니가 상처받은 자신을 달래 주었던 것이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알면 알수록 예니가 참 많이 고생한 것 같다.
한 번은 하이네가 마르크스 집에 가보니, 카를과 예니가 어린 예니헨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예니헨은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 적어도 마르크스 부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이네는 즉시 "아이를 목욕시켜야 한다"고 충고했다. 마르크스 가문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하이네의 이 조언 덕분에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항상 강인해 보이던 그 마르크스조차도 사랑하는 자식 문제에는 쩔쩔 매곤 했다. 하이네가 목욕을 시키라고 조언한 것이 비과학적이고 의학적 근거가 없어 보이는데도 (심지어 하이네는 아이를 키워보지도 않았다), 시키는대로 따랐다는걸 보면 하이네를 그만큼 믿었나보다. 시인들이 연약한 존재나 감성적인 부분들에 대해 신비스럽게 보이는 직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진심으로 느꼈던 것 같다. '마르크스 가문의 전설'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 일화는 예니헨이 자란 뒤 가족들끼리 담소를 나눌 때 오랫동안 반복되어 회자되던 우스운 옛날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광경을 상상해보니 참 정겹고 따뜻하다.
하이네의 시는 현실 비판과 정치 풍자적인 면에 있어서는 날카롭고 진보적인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방식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이네는 마르크스 식의 공산주의 운동이 너무 오만하고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두렵게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는, 하이네는 공산주의의 미래를 예견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하에서는 개인의 개성이나 예술 등이 존속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이네는 1856년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만일 자신이 평생 '부도덕한' 글을 쓴 적이 있다면 신에게 용서를 간청한다는 내용의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하이네가 이런 식으로 신에 대한 신앙으로 타락한 것을 눈감아주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주 잔인하게 경멸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엘레아노르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하이네의 작품만큼이나 그 시인을 사랑했으며, 그의 정치적 약점들은 가능한 한 관대하게 봐주었다. 아버지는 시인들이란 기묘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제멋대로 가도록 놔두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잣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특별한 사람의 잣대로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는 후에 파리를 떠날 때 하이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트렁크에 넣어 같이 데려가고 싶다" 고 말했을 정도로 하이네를 아꼈다고 한다. 트렁크 속에 넣어가고 싶다는 표현을 마르크스가 썼다니... 둘 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거 아닌가... 두 사람의 브로맨스가 오래 이어졌으면 좋았겠지만, 카를이 프랑스에서 추방되고 나서 두 사람 사이의 교류는 끊기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몇몇 학자들이 하이네의 시「독일, 어느 겨울 동화」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종교를 아편으로 비유한 것은 마르크스보다 하이네가 먼저였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의식하지 않고 그런 표현들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네와 마르크스의 우정은 비록 시절인연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부터 잘 살아야 할 것이다.
# 아르놀트 루게와의 손절
루게와 함께 창간했던 『독일-프랑스 연보』가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루게와의 갈등이 가장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잡지는 이름처럼 프랑스와 독일의 교류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프랑스에는 글을 쓸만한 사람이 아주 많았지만 아무도 기고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고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일인이었다. 그 유일한 한 명은 몇 년 뒤 마르크스와 원수 사이가 되는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이었다. 마르크스는 지면을 메우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글과 헤겔에 대한 에세이를 수록하고 루게와 교환했던 서신을 싣기도 했다.
어쨌든 마르크스를 포함한 발행자들은 『독일-프랑스 연보』 수백 부를 독일로 보는데, 프로이센 정부가 경찰에게 그 잡지가 반역을 선동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미리 경고를 주어 압수당하고 말았다. 이에 마르크스, 루게, 하이네가 프로이센으로 돌아오려 할 경우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아르놀트 루게는 겁에 질려서 출간을 중단하고 마르크스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 계기는 개인적인 이유였다. 바로 그들의 동료 헤르베그의 성생활을 둘러싼 말다툼이었다.
헤르베그는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함께하던 새 신부를 배신하고 백작 부인 마리 다구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루게는 헤르베그의 이러한 비도덕적인 태도를 비판했으나 마르크스는 헤르베그를 이해하는 듯이 보였다. 이 점이 루게를 분노하게 했다.
마르크스는 사보나롤라처럼 청교도적인 태도로 난잡하고 방탕한 남녀관계를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 공산주의가 공동 섹스와 동의어라는 혐의를 반박하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 친구들의 사랑의 탈선은 재미있게 생각했다. 어쩌면 약간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그렇지 않아도 예니는 출산휴가(?) 겸 어머니 수업을 받으러 마르크스를 떠나 있는 동안 행여 그가 바람을 피우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윈은 마르크스가 부르주아적인 도덕과 관습을 조롱하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부르주아적인 가부장의 면모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루게 부부와 공동생활이 2주만에 실패했던 이유는, 어쩌면 카를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반감이나 자기 부정의 감정이 루게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마르크스가 무척 인간적이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남자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편지를 할 때, 그는 더러운 농담이나 감질나는 성적 추문을 가장 즐겼다. 그러나 남녀가 함께 있을 때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어떤 가장이 보아도 감탄할 만큼, 여성을 보호하는 기사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카를과 종종 술을 마시던 독일 사회주의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그의 이런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토론에서 그는 말조심을 하지 않았으며, 아주 상스러운 표현도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아이와 여자가 있을 때는 그런 언어가 아주 점잖고 세련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영국의 여자 가정교사가 보았다 해도 아무런 흠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가 약간 민감한 문제로 접어들면, 마르크스는 안절부절 못하여 열여섯 살짜리 처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1844년 여름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신문 『포어베르츠! (전진!)』 의 원고 청탁을 수락하고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이 신문은 유럽에서 독일어로 된 신문 가운데 유일하게 검열을 받지 않는 급진적인 신문이었다. 루게 역시 이 신문에 글을 싣고 있었다. 두 사람은 프로이센 슐레지엔 지역 직조공들의 봉기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영국 등에서 기계로 생산된 값싼 직물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수작업을 하던 직조공들의 경쟁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그들의 임금이 터무니없이 깎이게 되었다. 일자리 경쟁은 심해지고 흉작으로 인한 고물가 때문에 고통받고 있던 노동자들이 결국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공장주의 집으로 몰려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공장 내의 기계를 부수고 직조공들의 채무를 기록한 장부를 불태운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직조공 11명이 죽고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독일 최초의 노동자 봉기로 평가받고 있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허사가 되었다.
신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커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 「슐레지엔의 직조공」, 하인리히 하이네 (이 시는『포어베르츠!』 에 실려 주목을 받았다)
루게는 『포어베르츠!』 에 직조공들의 폭동이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썼다. 그는 독일에는 단지 슐레지엔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를 혁명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필요한 '정치적 의식'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열흘 뒤에 혁명의 비료는 '정치적 의식'이 아니라 계급 의식이며 이 사건이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썼다. 그는 한 공장 구역에서 일어난 혁명도 전국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조공들의 봉기가 실제로 전국적인 혁명으로 번지지는 않았으니 루게의 진단이 더 현실적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많은 혁명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마르크스는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 프롤레타리아가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경제학자이고, 프랑스 프롤레타리아가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가이듯이,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이론가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주의가 이 세 가지 혈통 (경제, 정치, 철학)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마르크스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나보다. 이 무렵 카를은 독일 철학 (이론)과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조예가 깊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음울한 과학', 즉 경제라고 느꼈다. 1844년 여름 동안 그는 영국 정치경제학의 주요 저작 (오늘날 고전 경제학이라 불리우는) -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제임스 밀 - 을 체계적으로 독학하며 논평을 써 나갔다. 이 논평은 당시 출간되지 않았다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이자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최초 설립자인 다비드 랴자노프에 의해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
* 케테 콜비츠 (1867~1945) 는 독일의 여성 화가로 주로 노동자들의 역사와 삶 그리고 반전 평화주의 메시지가 담긴 판화와 조각을 작업했다. 1893년, 그녀는 슐레지엔 봉기를 모티프로 한 연극 <직조공들> 을 관람하고 <직조공 봉기> 판화 연작을 완성한다. 구성 작품은 <궁핍, Poverty>, <죽음, Death>, <모의, Conspiracy>, <직조공의 행진, March of the weavers>, <돌진, Storming the Gate>, <결말 , End>의 여섯 개의 판화로 구성되어 6막의 연극과 같은 시퀀스로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