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거리에서 만난 사랑
# 길 위의 진심
1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뒤인 1842년 가을,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는 엥겔스를 에르맨 앤드 엥겔스사 맨체스터 지부로 파견을 보낸다. 아버지의 의도는 여러가지였다. 먼저 영국, 그 중에서도 특히 맨체스터라는 도시는 면직물 제조업의 중심지라는 점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통제와 감시 하에서 아들에게 사업 감각을 익히게 할 생각이었다. 둘째로는 그가 독일에서 공산주의자 및 청년헤겔학파 친구들과 맺어왔던 교류를 단절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걱정했던대로 엥겔스는 마침 새로 사귄 친구들의 영향으로 인해 독일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랬으니 맨체스터행은 가업을 잇고 싶지 않았던 그로서는 암담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래왔듯이,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맨체스터에서 쌓았던 경험이 엥겔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돌이켜 본다면, 오히려 아버지의 결정적인 실수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근대의 제조 기술은 맨체스터에서 완성되었다. 자연력의 이용, 기계(특히 역직기와 자동방적기)에 의한 육체노동의 대체, 노동의 분업은 랭커셔 남부의 면공업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근대 제조업이 노동계급에 미치는 영향은 필연적으로 여기서 가장 자유롭고 완전하게 나타나며, 제조업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트도 바로 여기에서 가장 완전하고 고전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증기력과 기계, 분업의 적용으로 인한 노동계급의 위치 하락과, 그렇게 추락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력 또한 여기에서 최고조에 도달하고 가장 자각적으로 이루어진다. -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침 청년 헤겔학파는 사변적인 헤겔 철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며, 최초로 헤겔 철학을 뒤집어 유물론적 관점을 확립한 포이어바흐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맨체스터는 가장 도드라진 물질의 세계 그 자체였다. 영민했던 엥겔스는 그 점을 예리하게 포착했고, 맨체스터는 엥겔스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낮에는 공장과 면직물 거래소에서 조용하고 근면한 젊은 간부로 일했으나, 저녁이면 프롤레타리아트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사는 랭커셔 주의 도시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자본주의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엥겔스의 맨체스터 시절 이야기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곳에서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정신적 지지자인 메리 번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그녀를 어디서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추측만 있을 뿐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거의 문맹이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그녀 자신이 남긴 기록도 사진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엥겔스는 메리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5년간 함께 살았다. 엥겔스는 그녀와 함께하는 기간에도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마르크스 가족을 포함한 그의 지인들 역시 엥겔스와 메리가 사실혼 관계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엥겔스 자신도 메리를 '나의 아내' 라고 지칭하곤 했다.
"그 아줌마는 대단히 예쁘고 위트가 넘치고 진짜 매력적이었다. ... 물론 맨체스터 공장 아가씨 (아일랜드계)였다. 배운 것은 없지만 조금 읽고 쓸 줄은 알았다.“ - 『엘레아노어 회고록』, 엘레아노어 마르크스
메리가 죽은 뒤, 엥겔스는 여동생 리지 번스와 연인 관계가 된다. 메리가 살아있을 때에도 리지는 두 사람과 함께 살며 가정부로서 그들을 보필했다. 엥겔스에게는 두 개의 사랑이 전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리지가 죽기 전 날 그녀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었다. 바로 정식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엥겔스가 메리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부르주아지 관습에 동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리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두 사람은 법적으로 결혼 서약을 하고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식을 올렸다. 엥겔스는 그녀의 묘비명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아내, 리디아 (LYDIA, Wife of Frederick Engels)" 라는 문구를 새겼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웠다.
많은 학자들은 아일랜드인 노동자 출신이었던 메리가 엥겔스를 맨체스터 노동자 구역과 빈민굴들로 안내해 주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당시 아일랜드인은 영국 노동자 사회에서도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던 민족이었다. 특히나 그들이 모여 살던 '리틀 아일랜드' 지역은 엥겔스가 언급했듯이 "이런 환경에서 사는 부류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인간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말할만큼 열악했다. 그는 20개월동안 맨체스터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노동자 구역 골목골목을 샅샅이 드나들었다. 그는 이 때 관찰한 노동자들의 삶을 바탕으로 그의 첫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을 집필하게 된다.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에게 바치는 이 저작에서 나는 여러분의 상황, 여러분의 고통과 투쟁, 여러분의 희망과 전망을 충실하게 묘사한 상을 독일 동포들에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여러분의 환경을 제법 알 만큼 여러분 가운데서 살았다. 나는 그 환경을 알기 위해 진지하게 몰두했고, 입수 가능한 여러 공식 문서들과 비공식 문서들을 연구했다.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주제에 관해 추상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분을 여러분의 집에서 보고 싶었고,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싶었고, 여러분의 상황과 비애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었고, 여러분을 억압하는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에 대항하는 여러분의 투쟁을 목격하고 싶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프리드리히 엥겔스
나는 그가 정말로 사력을 다해 이 책을 썼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그의 생생한 경험을 통한 도시 풍경 묘사로 이루어진 일종의 르포타주였다. 자신의 온몸으로 써낸 글이었다. 온갖 쓰레기와 생활 폐수로 뒤덮인 거리, 허물어지고 더러운 집, 악취와 오물이 모여 환기가 되지 않는 안마당, 집에서 키우는 돼지, 공장 노동자들의 도덕적 타락 (각종 범죄와 알코올 중독과 매춘), 가혹한 아동 노동 착취의 실태, 산업재해들 (만연한 질병과 육체적 상해들)을 읽으면서 숨이 막혔다. 아무 희망이 없는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인 상황. 그 자체로 빽빽한 단신의 문장들이 쉴틈없이 조밀하게 나열되어서 마치 지옥의 늪에 빠진 듯 했다. 그가 이 많은 사실적인 풍경들을 써내기 위해 얼마나 자주 그 수많은 골목과 안마당과 집의 내부를 방문하고 그 곳 사람들을 만났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림과 삽화를 그리는 재주가 있었던 그는 책 중간중간에 가옥과 거리 구조에 대한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다. 내가 감탄했던 부분은 단순히 사실 적시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각종 보고서, 통계, 신문과 잡지 등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가 가장 선명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국 사회를 낱낱히 고발했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때의 엥겔스였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영국에 오기 이전까지의 급진적인 자유주의자적 면모는, 억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부잣집 자제들의 젊은날의 치기나 일탈의 성격에 더 치우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여자친구 메리로 인해 그의 삶은 바뀌었다. 스물 네 살의 젊은 엥겔스는 메리와 열정적으로 연애를 하면서 빈민가의 노동자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가난했던 남자친구를 사귀었던 적이 있다. 그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매기곤 했다. 심지어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취미나 공부까지도. 나는 그가 돈돈거리는 것이 은근히 거슬리고 짜증이 났다. 경비 때문에 여행 일정을 줄이자는 남자친구의 말에 "그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지만, 이 여행은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건데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해!" 라며 화를 냈다. 속으로 생각했다. 너도 아주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맞았다는 걸 알게 될거라고. 그 때 그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나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라고. 종종 그 친구가 부끄러울때도 있었고 더 솔직하게는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이질적인 집안과 가족의 분위기가 불편했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비만이 되기 더 쉽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남았을 때’가장 괴롭다는 나의 말에,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을 때’ 가장 괴롭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의 세계까지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었던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내가 바뀌었던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는 오로지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세계였다. 그리고 그건 나를 지키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놓지 못하는 나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집착 때문에, 경험했던 세계조차도 너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열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동질의 경험을 벽돌삼아 벽을 더 높이 쌓았다.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있었다. 아니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지독한 집착에 있었다.
엥겔스는 나와 달랐다. 메리에 대한 사랑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고통스러운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랑과 투쟁은 동의어였다. 그는 삶으로 그 진리를 증명해 낸 사람이었다.
젊은 엥겔스의 진심이 담긴 첫 저작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후에 마르크스가『자본론』을 집필하게 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마르크스는 20년이 지난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자네가 쓴 책을 다시 읽어봤어. 나도 이젠 늙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더군. 정말 대단한 힘이야.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면서도 열정적일 수 있나. 그때 자네 글은 그랬지. 정말이지 학자적 조심스러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때였어! 그 시절에 자넨 독자들에게 자네 이론이 당장 내일은 아니더라도 그 다음날이면 확실한 사실이 될 거라는 확신을 심어줬어. 하지만 바로 그런 환상이 작품 전체에 인간적인 따스함과 유머를 불어넣어준 것이지. 그에 비하면 그 이후 우리가 쓴 글들은 정말이지 혐오스러워.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 인데 점점 “회색에 회색이” 되어 간단 말이야..." -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이 책에서 영국 부르주아지들이 "도덕적으로 깊이 타락하고, 이기심에 눈이 멀어 구제불능 상태로 전락하고, 내면에 좀이 쓸고, 도무지 진보하지 못하는 계급"에 머무를 것이며, 이로 인해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예언했다. 하지만 그의 예언과 다르게 자본주의는 훨씬 더 유연하고 은밀하게 그 형태를 변형시켜갔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고 타협했다. 노동조합과 파업 그리고 선거권 확대와 노동법 개혁은 은밀하고 교묘하게 계급 분화를 공고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들이 굶어죽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고 생활수준은 느리지만 천천히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 책을 출판한 1845년 3월 이래로 약 180여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는 이제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돈에 대한 숭배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워 할 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뼛속까지 베어버린 노예 근성을 깨닫고 싶지 않다. 그 노예 근성은 너무나도 깊숙히 침투해 있어서 긁어내기 쉽지 않다. 나는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부지런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지만 내 눈 앞의 고통받는 친구에게는 잠시의 눈길만 머무를 뿐이다. 나의 모든 위선과 기만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이다. 그러므로 나의 글 역시 자본주의적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무력한 글. 언젠가 마르크스의 글을 읽다가 다음 문구를 발견하고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고, 하나의 불행이다. -『경제학-철학 수고』, 카를 마르크스
엥겔스의 글은 무력한 글이 아니었다. 온 몸으로 살아내며 써낸 생생한 글은 그 자체로 사랑의 글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뛰었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 달리고 있는 기차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파리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엥겔스는 고향인 바르멘으로 돌아갔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남아 두 사람 계획한 첫 프로젝트로 인해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팸플릿 집필 작업이었다. 목적은 브루노 바우어를 비롯한 청년 헤겔학파 일당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이 팸플릿의 페이지 수를 40 페이지로 한정하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써야 할 20페이지 분량을 금방 써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조금 더 진지했다. 몇달 뒤 다시 돌아온 엥겔스는 그 팸플릿이 『신성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페이지 수도 300 페이지 넘게 불어난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보완해주는 존재였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갈고 닦은 박학다식함이 있었고, 엥겔스에게는 현장에서 습득한 실무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글씨는 뒤죽박죽에 알아보기 힘들만큼 악필이었지만, 엥겔스의 필체는 단정하고 사무적이며 우아했다. 마르크스는 땅딸막하고 가무잡잡했으며 때로 자기 혐오에 시달리고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유대인이었지만, 엥겔스는 키가 크고 세련됐으며 각종 대외활동을 즐기는 아리아인 멋쟁이었다. 마르크스는 궁핍과 질병 속에서 살았지만, 엥겔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상근직을 유지하며 부르주아지의 생활 수준을 유지했다. 마르크스는 여러 명의 자식들과 아내와 함께 가족을 꾸렸지만, 엥겔스는 애인과 함께 살며 여러명의 여자와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굉장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죽마고우 관계였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자신의 성기에 커다란 종기가 생기자 엥겔스에게 스스럼없이 자세히 묘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은 평생 엄청난 양의 서신을 교환했다. 중요한 의견부터 정적들에 대한 난잡하고 저급한 조롱 그리고 자신의 배우자나 애인 혹은 가족에 대한 불평불만까지도 말이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여러가지 언어를 섞어서 문장을 구성하곤 했는데, 아무리 암호같이 난잡해도 이해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아래 문장은 독일어, 영어, 라틴어가 섞여있다. 정치적인 문제를 다룰 때면 프랑스어까지 섞어 쓸 때가 많았다고 한다.
"Diese excessive technicality of ancient law zeigt Jurisprudenz as feather of the same bird, als d. religiösen Formalitäten z.B. Aigiros etc. od. d.. Hokus Pokus des medicine man der savages."
마르크스와 엥겔스 모두 언어 능력이 뛰어났다. 마르크스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 약 4~5개 언어를 사용했고, 엥겔스는 최소 20개 국어 능통자였다. 엥겔스는 특히 실전 비즈니스 상황에서 언어를 익혔고 스펀지처럼 쑥쑥 흡수했다. 안 그래도 악필인 마르크스의 필체인데 외국어까지 섞여 있으니 그의 글은 더더욱 읽기 어려웠다. 마르크스의 글씨체를 온전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내 예니와 엥겔스 뿐이었기에, 엥겔스는 마르크스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문체를 해독하는 임무를 도맡아야만 했다.
엥겔스는 마치 어머니처럼 마르크스에게 헌신했다. 생활비를 보내고, 건강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고, 공부를 태만히 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그는 마르크스를 자극하고 독촉하곤 했다.
"정치 경제학 책을 마무리짓도록 하게. 자네한테는 불만인 부분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 상관없네. 정신들이 성숙했네. 쇠는 달구어졌을 때 쳐야 하네 ... 그러니 4월 전에 끝내도록 하게. 나처럼 해. 분명히 일을 끝낼 날짜를 정해놓으란 말일세. 그리고 얼른 인쇄가 되도록 하게." -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스스로 마감 날짜를 정해놓고 그 안에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지만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다. 중요한 글일수록 더 질질 끄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산만하게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졌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곤 했다. 이를테면, 그들의 첫 공동저작에서처럼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조롱과 비판에 필요 이상으로 지면을 할애하는 식이었다. 그의 마음에 정말 공감이 됐다. 나는 그들만큼 훌륭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닌데도 좀처럼 쉽게 마무리짓지 못하고 썼던 글들을 다 지워버리고 싶을때가 대부분이었다. 하나를 공부하다보면 관심사가 점점 넓어져 도무지 갈무리가 되지 않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엥겔스의 보챔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었을까 싶다.
하지만 엥겔스의 잔소리가 좋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사실 마르크스에게는 엥겔스같은 사람이 꼭 필요했다. 엥겔스는 일찌감치 마르크스의 잠재성을 알아보았고 그것을 끌어올려 주는 역할을 자처했던 셈이었다. 양이 질을 결정한다는 진리를 엥겔스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혁명가이기 이전에 작가였다. 작가에게 일의 결과물은 세상에 내놓는 책이므로, 최대한 많은 책을 펴내는 것이 그의 소명인 것이다.
엥겔스의 의도가 어쨌든,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잔소리와 불평을 하는 바람에 더 갈피를 못잡고 흔들렸다.
"나는 날이 갈수록 이 이론적인 객담이 지루해지네. 한 단어 한 단어가 반드시 '인간' 이라는 주제에 소비되어야 하고, 한 줄 한 줄이 반드시 신학과 추상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도 짜증이 나네..."-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마 마르크스는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엥겔스보다는 더 학구적인 스타일이었기에 엥겔스가 말하는 저 '지루한 이론적인 객담'에 대해서까지 꼼꼼히 다뤄야 한다고만 생각했을 것 같다. 엥겔스가 며칠만에 써내려간 탓에 마르크스가 상대적으로 게을러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마르크스도 3개월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다. 다만 그 3개월동안 쉬지 않고 분량을 부풀렸을 뿐이었다. 엥겔스는 이 팸플릿을 가벼운 첫 시작 정도로 생각했던 반면 마르크스는 지나치게 비장하고 심각했다. 이런 태도에서부터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두드러졌다. 나는 이 책이 두 사람의 설레는 첫 데이트처럼 느껴졌다. 엥겔스는 밥만 먹으려고 나갔는데 마르크스는 커플링을 줘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 선물(?)에 대해 엥겔스는 마르크스에 다음과 같이 귀여운 투정을 부린다.
"『비판적 비판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네! 새로운 제목이 『신성가족』으로 정해지면,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는 내 경건한 부모와 한바탕 시끄러워질 걸세. 물론 자네야 모르고 한 일이겠지만. 이제 우리 집 노인네가 할 일은 『비판적 비판론』이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일세. 그러면 노인네는 나를 집에서 내던져버릴 것이 틀림없네." - 엥겔스가 마르크스에 보낸 편지에서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엥겔스의 아버지는 머리가 커진 아들이 점점 탈선을 해 간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기독교적 영혼에 대해 걱정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팸플릿 저자 이름에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당혹스러워 했다. 자신이 쓴 분량이 마르크스에 비해 턱없이 적어서 민망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신성가족』이라고 바뀐 제목 때문에 가족들이 알게 되면 귀찮은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엥겔스가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지었던 이유는,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하는 청년 헤겔학파 일당들과 바우어 형제와 같은, 속된 말로 '모두 까기 인형'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각자 독일에 있을 당시 청년 헤겔학파에 속했을 정도로 바우어 형제와 뜻을 함께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헤겔 철학의 관념적인 측면을 비판하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서로가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우어 형제는 관념적인 철학을 '비판' 하며 그 비판의 행위 자체가 '실천'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는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비판'을 또 하나의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힘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책의 주 제목을 『신성가족』으로 바꿨던 이유는 속세를 초월한 신들처럼 굴면서 온갖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글들을 써내는 바우어 일당들을 풍자하며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들은 구름 위 상아탑에서 경멸과 멸시의 시선으로 대중을 내려다 보며 비웃고 있는 비겁자들이나 다름 없었다.
마르크스는 '사랑' 챕터에서 에드가 바우어가 사랑에 대해 정의한 부분을 꼬집는다.
대상, 대상이란 올바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단지 그의 열정적인 감정의 외적 대상으로, 그 속에서 자신의 이기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서만 중요하다. - 『종합문예신문』, 에드가 바우어
이에 마르크스는 "사랑"을 그 주체인 인간과 별개인 것처럼 분리, 독립 시킴으로써 사랑을 "잔인한 여신"으로 둔갑시켰다고 분노한다.
'대상!' 끔찍하다! 대상보다 비난받아 마땅하고 불미스러우며 대중과 닮은 것도 없다니. 대상을 '타도하라'! 절대적 주관성, '순수 활동', "순수" 비판주의가, 무엇보다 인간에게 그의 외부적 대상적 세계를 믿도록 가르치고 인간을 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대상을 인간으로 만드는 사랑 속에서, 어떻게 '가장 혐오스러운 대상과 악마의 화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논박한다』,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비판하려고 한 '비판적 비판주의자들'은 나의 모습이었다. 부끄럽고 괴로웠다. 나는 타자를 제거한 진공의 세계에 오랫동안 살았다. 타자와의 마찰과 갈등이 괴로워 모든 것에 초연한 것처럼 굴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온갖 사사롭고 지저분한 것들로 법석을 떨 때면 나는 속으로 그들을 경멸했다. 나부터가 가장 저열하고 추악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욕망과 욕구에 시름하는 타인들을 혐오하고 멸시했다.
(바우어 일당 등 비판주의자들에 따르면) 사랑의 열정은 '내적' 발전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정은 선험적으로 구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발전은 감성의 세계에서 현실의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발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변적 구성의 주된 관심은 "어디에서"와 "어디로"이다. "어디에서"는 "한 개념의 필연성이자 그 증명과 연역이다" (헤겔). "어디로"는 "변증법적 순환운동을 이루는 각개의 고리가 방법의 활력으로서, 동시에 새로운 고리로 출발한다" (헤겔)고 규정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어디에서"와 "어디로"가 선험적으로 구성 가능한 것일 경우에만 사랑은 사변적 비판주의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논박한다』,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머리로는 인간을 대상 (도구)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도 나는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곤 했다. 나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던 마음은 손해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나는 몇 년 전의 나로부터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이었어도 내가 더 상처받을 것 같으면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 자신을 얼마나 많이 속여왔을까?
마르크스는 인간에게서 숙명과도 같은 절망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목적론' 그 자체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와 "어디로" 를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도구'로 바라보게 만든다. 몸을 움직이기 전에 가성비와 효율을 따지게 만든다. 모든 행동을 거래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는 자본주의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거래와 계산적인 마음의 근본을 파헤치면, 그곳에는 소유욕,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유재산을 반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철학은 "달리고 있는 기차를 타며," ... 자신에 앞서 영원한 옛날부터 흘러가는 "열차를 잡아탄다." 따라서 세계의 목적도 없고, 역사, 철학, 도덕, 예술 또는 정치 따위의 목적도 없다. - 『철학과 맑스주의』 「마주침이라는 유물론」, 루이 알튀세르
이 책은 독자들에게 별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당시 이미 비판주의자들 ("신성가족"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비판의 대상이었던 몇몇 인물들에게는 그들이 했던 활동이나 중요도에 비해 과도한 비판이 쏟아졌다고 평가 받았기 때문이었다. 엥겔스조차도 친구의 작업물 내용에 대해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추상적인 내용들은 대중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관심을 끌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이 잘 드러난 책이라고 생각했다. 첫 공동저작 작업이라는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했고 이는 그들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글의 스타일도 작업 방식도 생활 환경도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 책은 엥겔스가 가명을 벗어던지고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상징적인 책이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어떤 내용을 쓰게 될지, 분량이 300 페이지까지 늘어날 것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영감을 받았던 포이어바흐에 대한 애정까지도 담담하게 소중히 여겼다. 묵묵히 쓸림을 견뎌내는 것. 그렇게 사랑은 느리게 열리고 소리없이 펼쳐진다. 시작도 끝도 정해지지 않은 사랑이 좋은 글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따로, 또 같이, "달리고 있는 기차"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