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마르크스 읽기
# 첫사랑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의 가장 헌신적이고 절친한 동지로 알려진 사람. 그는 마르크스에게 지적 협력자이자 정신적 버팀목이자 없어서는 안 될 경제적 조력자이기도 했다. 엥겔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마르크스는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라는 사람 만큼이나 엥겔스는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글을 쓰며 엥겔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면서 마르크스보다 엥겔스에게 더 마음이 가기까지 했다. 왠지 마르크스에게 미안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긋났었다. 1842년 11월 16일, 엥겔스는 당시 독일 쾰른에서 『라이니셰 차이퉁』 편집장을 맡고 있었던 마르크스를 방문한다. 하지만 그 때엔 서로에게 냉담했고 두 사람 사이에 딱히 의미있는 교류는 없었다. 그런데 상황을 따져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스물 세 살의 마르크스는 당시 편집장이라는, 아마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책임감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중책을 맡게 되었고, 그러면서 젊은 날 자신과 함께 (마르크스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야비하고 불량한 태도"를 보이던 청년 헤겔학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엥겔스는 청년 헤겔학파들의 본거지인 브레멘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의 모임에서 참여하고 있던 중었다. 게다가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비난했던 브루노 바우어의 동생 에드가 바우어의 충고 ("만 마리의 악마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며 충동적인 젊은 편집장을 조심하라는 조언)를 듣고 온 차였다. 설상가상으로, 라인 신문이 바로 다음 달에 폐간 되었을 정도로 위기를 겪고 있었던 시기였으니, 마르크스의 눈에는 뭐든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1844년 8월, 파리의 방노 거리에서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를 집필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 예니는 트리어로 출산 휴가를 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스물 세 살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찾아온다. 물론 2년간 아예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브레멘에서 영국의 맨체스터로 이사감으로써 마르크스에게 일종의 신뢰(?)를 얻어 『라이니셰 차이퉁』에 몇 편의 글을 기고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엥겔스는 처음부터 마르크스를 직접 찾아갈 정도로, 그리고 냉담했던 태도에도 상처받지 않고 꾸준히 글을 써서 보낼 정도로 (아마 그는 나처럼 소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연결을 놓지 않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정말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가 파리로 이주하고 나서였다. 엥겔스가 『독일-프랑스 연보』에 보냈던 두 편의 글 중, 「정치경제학 비판」 이라는 긴 글이 마르크스를 완전히 매료시켰던 것이었다. 그는 그 글을 천재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 시기는 때마침 마르크스가 독일의 관념적인 철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관심이 옮겨갈 때였는데, 엥겔스가 썼던 글이 바로 그가 원하던 분야의 현실적인 시각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1844년 4월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마르크스의 태도는 불신에서 존경심을 바탕에 깐 호기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라 레장스 카페 - 과거에 볼테르와 디드로가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 에서 몇 번 아페리티프를 마신 뒤, 마르크스는 방노 거리에 있는 아파트로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엥겔스를 초대했다. 그들의 대화는 엄청난 양의 등잔 기름과 붉은 보도주를 소비하며 열흘 동안 빡빡하게 이어졌고, 대화가 끝났을 때 둘은 변치 않는 우정을 맹세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윈은 두 사람이 열흘간의 이 기나긴 대화에 대해서는 기록을 아예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기해했다. 이 열흘의 시간 동안 유일하게 밝혀진 이야기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엥겔스가 밝힌 단 한 문장이었다.
"내가 1844년 여름 파리로 마르크스를 찾아갔을 때, 우리가 모든 이론적 분야에서 의견이 같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우리의 공동 작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마 두 사람 모두 평소에 일기나 편지로 자신의 사소한 생각들이나 일상 이야기 혹은 잡담들을 끄적이는 기록가 스타일이여서 그 점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떠올려보면, 진짜 좋아했던 일 혹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던 순간들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때가 많았다. 아마 열성적인 두 사람의 성격을 미루어보아, 1844년 파리의 여름에서의 만남은 서로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무섭게 빠져드는 시간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많은 대화들과 만발하는 느낌들을 도저히 글로 기록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만약 엥겔스가 꾸준히 공부하고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두 번이나 먼저 찾아가서 마르크스에게 치대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가 (편견에도 불구하고) 엥겔스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오해를 시인하고 부족한 점 (정치경제학적 지식과 실무 경험)을 겸허히 인정하며 엥겔스에게 존경과 신뢰를 품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함과 편견 그리고 오해를 딛고 일어선 사랑.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첫 눈에 반한 사랑이 아니라서 좋았다. 어긋남 뒤에 피어난 첫사랑이라서 좋았다.
# 자유로운 상남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조상은 부퍼탈에서 200년 이상 살아오면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직물 사업을 시작하면서 부자가 되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1세는 에르멘 형제와 동업을 하여 영국 (맨체스터)과 독일 (바르멘, 엥겔스키르헨)에 방적공장을 세워 사업 영역을 넓혔다.
엥겔스는 1820년 11월 28일에 태어났다. 집안 분위기는 종교적이고 근면을 중시했다. 특히 아버지는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는데, 8 남매 중 장남이자 첫째였던 엥겔스는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압박에 평생을 시달렸다. 답답한 집안에서 자란 것 치곤 엥겔스가 꽤나 유쾌하고 재치있는 인물이라고 느껴졌는데, 아마 그의 어머니 엘리제의 명랑한 기질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말하기를, 어머니의 유머감각은 "워낙 특별해서, 노년이 되었을 때도 뺨에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뭐랄까, 엥겔스는 좀 심술궃고 오만하고 독단적인,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이기도 한 마르크스와 완전히 다른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엥겔스는 어릴적부터 반골기질이 있던 친구였다. 엥겔스가 14살 때 그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리드리히가 지난주에 성적표를 가져왔는데, 중간쯤 했더군. 당신도 알다시피, 그애 태도는 나아졌고. 그러나 과거에 심하게 벌을 주었는데도, 절대적인 복종을 배운 것 같지는 않구려. 보통 아이라면 매질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할 텐데. 오늘 나는 또 그애 책상에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불온한(dirty) 책을 한 권 발견하고 몹시 화가 났소. 13세기의 로맨스요. 그 아이의 마음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런 것만 아니면 참 장래가 밝은 아이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나는 자주 속을 썩고 있다오." - 프리드리히 1세가 엘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지만 어린 엥겔스는 '불온한' 책들의 매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그를 고등학교 졸업을 9개월 앞두고 강제로 자퇴를 시킨다. 대학에 가게 되면 사업을 물려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엥겔스는 부모님의 뜻대로 전형적인 사업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처럼 가족들과 단절한 채 독단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엥겔스는 이때부터 꽤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족과 돈 문제를 모두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 사업을 역이용하기로 결심한다. 프리드리히 1세는 아들을 브레멘에 위치한 지인 하인리히 로이폴트의 공장으로 보내 도제식으로 사무원 근무를 시킨다. 실무를 통한 일종의 경영권 승계 교육이었던 셈이었다.
이 곳에서 그는 근무시간에 일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무실에서 자신의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시를 쓰거나, 합창곡을 작곡하거나, 낮술(!) 을 마시기도 했다. 그는 유능한 정신만큼이나 유능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브레멘은 항구도시로 그가 살던 부퍼탈의 산골 동네보다 훨씬 활발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그는 곧 바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다에 나가서 수영을 하고 출근을 할 정도였다. 곧 그는 수준급의 수영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 펜싱이나 승마 같은 스포츠에도 평균 이상의 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쁨을 모두 누리며 살았던 자유인이었다. 그래서일지 그의 글은 마르크스의 글과 다른 느낌의 역동성, 살아서 꿈틀거리는 육체의 생생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1839년 9월, 문학 청년이었던 그는 지역 잡지에 실은 자신의 첫 자작시 「베두인족」 으로 정식으로 입봉을 한다. 이 시는 베두인이라는 야생적이고 이국적인 민족이 유럽의 문명 도시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비극을 풍자한 시였다. 아마 그는 베두인족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 같다. 사막을 누비던 자유인의 민족이 부르주아지 문명인들의 자본 아래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고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이 꺾이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완전히 분노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그의 시의 마지막 연이 아무런 사전통보도 없이 바뀌어 실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원래 엥겔스가 썼던 연은 베두인들에게 긍지를 되찾을 것을 촉구하며, 동시에 그들을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킨 자본가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국의 길손들이여!
너희가 사막에서 입는 가운은
우리의 파리식 외투와 조끼에 어울리지 않으며,
너희 노래는
우리의 문학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교체된 연은 허무주의적인 자조와 체념으로 끝을 맺는다.
그들은 돈이 부르면 펄쩍 뛰어오지만
자연이 중요한 요구를 할 때는 뛰어오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공허하며,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단 한 사람이 만가를 부르고 있을 뿐.
무례해도 너무 무례했다. 단 하나의 연으로 인해 시의 내용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엥겔스가 회복하고자 했던 베두인족의 존엄을 완전히 무너뜨린, 작가로서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첫 데뷔부터 이런 일을 겪은 엥겔스는 분노하고 좌절한다 ("내 시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어!").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엥겔스는 시인 혹은 문학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첫 시도에서 쓴 고배를 마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했기에 그의 평생의 우정인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기에 그는 순전히 독학으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 못지 않게 똑똑했던 그는 시사 팸플릿, 신문과 잡지, 책들을 섭렵하며 동시에 당시 가장 진보적이었던 문인 단체에도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엥겔스의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 없어. 이 세기의 사상가들 때문이야. 우체국에 갔다가 문장을 보게 되면 자유의 정신에 사로잡혀. 신문을 볼 때마다 자유의 전진을 찾아. 자유의 전진은 내 시 속으로 들어와서, 수도사의 가운과 귀족의 외투에 담긴 반계몽주의를 조롱해." - 엥겔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지만 영리했던 그는 부모에게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철저히 숨겼다. 청소년기부터 간직해 온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자신의 모습을 중년, 아니 거의 정식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숨기고 부모 앞에서는 의무감에 충실한 상속자처럼 행동했다. 부모님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사교계 인사들과 적당히 어울리고 아버지 회사에서 근무하며 반듯한 지역 사업가의 모습을 유지했던 것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데뷔하기 몇 달 전, 그러니까 그가 경영 승계인 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텔레크라프 퓌어 도이칠란드』 라는 신문에 '프리드리히 오스발트' 라는 가명을 써서 그의 아버지의 공장이 위치한 바르멘과 자신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엘버펠트 일대의 부르주아지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부퍼탈에서 온 편지」 시리즈를 정기적으로 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내부 고발자처럼, 자신이 속한 자본가 공장주 계급들의 위선적이며 노동자를 비인간적으로 착취하는 모습을 낱낱이 까발렸던 것이었다. 특정 가문과 인물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의 부패를 폭로했는데, 비록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까지 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도 역시 그가 비판하던 전형적인 자본가였으므로, 그 글들은 사실상 아버지를 공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익명이었음에도 저자가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과 지적 해박함, 그리고 문체 때문에 아버지는 오스발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의심하고 추궁했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었기에 엥겔스는 계속 시치미를 떼며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친구인 프리드리히 그라에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글을 자신이 썼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허세 부리는 모습이 밉지 않고 귀여워 보였다.
"하, 하, 하! 『텔레그라프』의 그 글을 누가 썼는지 알아? 바로 이 편지를 쓰는 사람이 그 글도 썼지.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말했다가는 나는 엄청난 곤경에 빠지고 말 거야." - 엥겔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드나들던 술집 카페에서 점점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의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편지에서 "우리 아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라고 한탄했다. 가문의 수치이자 배신자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중간에서 어머니 엘리제가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하며 고생을 했다. 엘리제는 엥겔스를 이해해주는 쪽에 가까웠고, 엥겔스가 은퇴 후에 혁명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엥겔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결국 여러가지 사정이 겹치면서 (특히 아버지는 그가 군대를 통해 정신 개조(?)가 되기를 바랐다), 약 3년간의 도제식 교육을 마친 그는 1841 년에 의무 병역을 치루기 위해 베를린에서 근위 포병대에 입대했다. 사실 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골랐던 데에는 은밀한 목적이 있었다. 바로 청년 헤겔학파의 본거지가 베를린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도 그는 어떻게든 부모의 눈을 피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냈던 셈이다. 그는 병역의 의무를 따르는 척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 하기도 하고, 청년 헤겔학파들의 모임인 '프라이엔' 에 가입하여 브루노 바우어나 막스 슈타르너 등의 인물들과 활발히 교류한다. 이 시기에도 그는 끊임없이 글을 썼고 몇 권의 소책자와 풍자시를 써냈다.
엥겔스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는 부르주아의 삶.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타도를 외치는 혁명가의 삶. 부르주아의 삶에서의 그는 가업을 잇고 부모님의 말에 순종하며 풍족한 삶을 누렸다. 혁명가의 삶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고 부르주아지를 맹렬하게 비난하며 계급 구도의 완전한 전복을 꿈꿨다. 그라고 그런 이중 생활을 하고 싶었을까?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삶을 매일 끊임없이 오가며, 그 분열되는 마음을 견뎠어야 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삶을 살 때엔 바로 어젯밤 그 자신이 비난해 마지않았던 부르부아지의 모습으로 안온하게 살아가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겠지. 혁명가의 삶을 살 때엔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노동자들을 착취했던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주아지들의 '살해' 행위를 낱낱히 고발하고 분해했고, 그것은 사실상 매일같이 자기 자신을 찢어발기는 자해와 다름 없었다.
결코 목격자가 명명백백하게 증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부르주아지는 빈자가 굶어죽었다는 몹시 불쾌한 평결을 모면할 뒷문을 언제나 마련해둔다. 이런 사건에서 부르주아지는 감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적절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치명적인 질병이 발병한 곳에서는, 굶주림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사람보다 간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런 죽음을 '사회적 살인'이라 부르며, 이런 범죄를 쉴 새 없이 저지르는 우리 사회를 고발한다. 그들이 틀렸는가? -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매일매일, 죽는 날까지, 그 자신에게 비겁한 집단 살인에 대한 '유죄 선고'를 내렸던 셈이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위선적인 삶을 쉽게 합리화 해버리는 대다수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기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공장 사업가로 살아가는 삶의 고통과 고충을 자주 털어놓곤 했다. 만약 그것이 합리화에 불과했다면 평생 죽을때까지 자본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마르크스가 남긴 『자본론』의 방대한 유고를 홀로 정리하는 데에 남은 생애를 바쳤다. 그가 분열의 고통을 견뎠던 이유는 가난한 친구들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여자친구들)을 돕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와의 마찰로 인해 사랑하는 어머니를 더 이상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이중 생활 첩자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짜 '싸움'이 무엇인지, 진짜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진짜 '정직함' 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매 순간 그 어떤 조건에서도 할 수 없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엥겔스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았던 상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