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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Jun 30. 2024

30대가 되어 배운 삶의 방식

인기를 좇지 말아야 하는 이유

친한 회사 동기 두 명과 오래간만에 술자리가 있었다. 친구들은 술기운을 빌려 평소 나에 대한 인간적인 감상과 평가를 들려주었다. 나보고 "조직 내에 가장 적(敵)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모두에게 호불호가 없고, 왠지 모르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고도. 나로서는 이러한 평가가 생경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살면서 누구보다 적이 많았던 사람 바로 나였으므로... 집단에 꼭 1명씩 있는 'XIANG년' 그 바로 나야 나...


일명 '썅년' 논란을 뜨겁게 불러일으켰던 <건축학개론> 수지. 참고로 사진은 필자의 외모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 출처: 씨네21)


나는 경험주의자이, 경험을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배우는 편이다. 신에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이다. 10대 때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서기까지 오래 걸렸다. 계급 상승(당시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자원으로 할 수 있는 건 공부 밖에 없다는 게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학생은 놀아야 되는 때였다. 인생에는 '때'라는 게 있는데 때를 놓치면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명 '노는 것'이 그러했다.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중2 때 엄마가 선호하지 않 (현명한 엄마는 결코 대놓고 놀지 말라는 얘는 하지 않았다)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인기 많은 오빠들과 어울렸으며... 그리하여 나는 '조금 놀았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평범한 학생과 노는 친구들 사이에 애매하게 낀 캐릭터로 살다 보니 나는 의도치 않게 양쪽에서 다 욕을 먹는 천덕꾸러기였다. (실제 나는 평소엔 뒷산에서 술을 마시고 교복을 줄이고 선도부 선생님에게 머리카락을 잘리고 종종 수업 땡땡이를 치곤 했지만 시험기간만큼은 밤새워 공부해서 성적은 잘 나왔고 간혹 전교 5등을 하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쁘지만 싹수없기로도 유명하던 소위 '일진' 친구가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내 욕으로 도배하는 사건도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요점은 "루이제 미친 존나 싫어 시발!!#$%$#!@#@!@"다.


하지만 나는 일진까지는 아니었고 반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다. 어디까지나 그냥 살짝 잘 나가고 싶어 하는 학생 정도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무리 기센 친구들과 놀아도 본질적으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소심한 성격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단 하나의 레드라인, 담배만큼은 이 시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진정 '놀았다'라고 말하려면 자고로 학생 때 담배를 제대로 배웠어야 하고 삥을 뜯어봤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하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삥 뜯는 친구들 옆에 있긴 했다) 어쨌든 살짝이라도 놀아봐야 늦바람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놀 수 있을 때 적당히 놀아야 한다는 게 여전히 나의 지론이다.


고등학교 때는 내려간 성적을 따라잡느라 딴짓 안 하고 공부만 했다. 고등학생은 '공부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또 재수 없다고 욕을 먹었다. 1년 만에 성적이 5등급에서 1등급으로 오르고 마침내 전교 1등이 되자 주변의 질시가 끊이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학교에서 전교 20등 이상 우등생에게 의무적으로 시키는 심화반을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 번은 학교의 정책에 반대하는 서명을 주도했었는데,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선전선동을 한다고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미워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학생이 된 나는 또 시기질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약간의 시술과 다이어트로 나름의 준비를 마친(?) 20대의 나는 학과, 동아리, 대외활동을 막론하고 내가 속한 모든 조직에서 온갖 추문의 중심에 서게 된다... 종종 언니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외모를 평가하듯 훑었고,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오빠들에게(군대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신랄하게 내 욕을 퍼부었다. 물론 20대답게 연애도 쉬지 않고 해야 했는데... 개중에는 실수와 잘못된 선택도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는 학과 수석이었고 그렇게 운명처럼 썅년의 계보를 이어가게 된다. 말했듯이 부모세대보다 잘 살기 위해 나는 계급상승을 해야 했으므로 한 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했다.




내 삶의 족적을 돌아보게 된 데에는 첫 문단에서 언급한, 현재 내 모습에 대한 주변의 피드백이 있다. 30대가 된 나는 더 이상 썅년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는 절대 튀지 않으려고 한다. 위압감을 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다. 인정욕구도, 남들보다 잘하려고 하는 욕심도 다 버린다. 정당하게 받는 만큼만 일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하지 않는다. 잘난 척도, 잘 나가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인기라든지 주목이라든지 이런 단어는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조직 내 정치에 말려들지 않는다. 화제의 중심에서 멀어지려 하고, 어떠한 편에도 서지 않으며, 배타적인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정보는 듣지도 퍼뜨리지도 않는다. 회사 사람들과는 인스타 같은 개인 SNS를 공유하지 않고,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운더리를 지킨다. 회사는 생계수단이고, 평생 다녀야 하는 곳이지 않는가(필자는 공무원이다).


특히 제일 중요한 부분은 여기다. 남자들은 최대한 털털하게 대하고 대신 여자들만 살뜰하게 챙긴다. 남자들 사이에 껴서 여왕벌 대접받는 건 익숙하고도 편한 일이다. 남녀 관계에는 많은 셈법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는 '명예남성' 또는 '남미새'가 되어 이미지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20대 그 난리통을 거치며 뼈아프게 깨달은 , 결국 남는 건 여자들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성애적 긴장에 의존한 남사친-여사친 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불타 없어지거나 녹아 사라진다. 이제는 기혼자라는 장점도 있지만, 결혼을 하기 전에도 나는 조직 내 온갖 치정관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100%의 청정함과 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분명한 선을 긋지 않아 피를 본 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적잖이 피곤하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기도 하고.


아무튼 이게 요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30대가 되면서 내가 세운 원칙들을 꽤나 잘 지키고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겐 '놀아야 할 때 놀아본 적'이 있고, '경험을 통해 배운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체스를 두며 생각하는 건 두 수 앞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조만간 체스와 관련된 글도 모아서 한 편 써야겠다.) 상대방의 수까지 읽고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회사 내 업무분장에서 나만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 한다거나, 단물만 빼먹으려 한다거나, 일명 '꿀 빠는' 포지션만 찾아다닌다든가, 상사가 지시한 일을 회피하려고 요리조리 머리 굴리는 건 다 '한 수 앞만 보는 일'에 해당한다. 두 수 앞을 보는 사람은 절대 눈앞의 이득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5년 후, 10년 후까지 생각한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단독자이고 싶다. 동시에 유연하고 싶다. 나무는 바람이 불어오면 방향에 맞게 들려가면서 대처한다. 나치게 고하지 않으면서 중심이 바로 서 있고 심지가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서 자유를 찾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 꾸준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나만의 서재와 영사실, 그리고 작업공간을 갖고 싶다. 든든한 사유의 집을 짓고 거기에는 문을 열어두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좋아하는 이들이 언제든 통찰력과 영감, 그리고 따뜻함을 얻어갈 수 있도록 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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