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우정이란 무엇인가
중드 <겨우, 서른>과 우정에 대한 고찰
넷플릭스 중드 <겨우, 서른>을 두 번째로 정주행 하면서 30대 여성의 삶,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드라마에서는 만 서른 살을 상정하고 주인공을 설정했지만 한국 사회로 따진다면 대충 딱 내 나이대 정도로 환원해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얼추 삼십 대 중반 정도. 사회생활한 지는 조금 됐고, 갓 가정을 꾸렸거나 곧 그럴(혹은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러지 않을)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렐 나이는 지났다. 삼십 중반엔 체력과 에너지도 옛날 같지 않다.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만니는 부푼 꿈을 안고 온 도시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한 번 귀향을 했다가, 결국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내는 캐릭터다. 극초반에 가장 미성숙해 보였던 샤오친은 남편과의 불화, 연하남과의 연애 등 여러 사건사고를 겪으며 주관을 확립해내가고,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내는 성취를 맛본다. 화려한 집, 다정한 남편, 화목한 가정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구자는 극 후반에 가장 큰 배신과 상실의 아픔을 겪지만 결국 또 구자답게 이겨낸다. 43화라는 긴 호흡에 맞게 세 주인공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빈틈없이 풍부하게 전개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건 주인공 셋의 우정이다. 한 명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두 명이 두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다. 밤이고 낮이고 찾아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위로해준다. 서로에게 무엇이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들이 친구와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면서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꽤나 부러웠다. 물론 이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우정이다. 현실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삼십 대가 넘으면 친구들 모임도 예전처럼 마냥 편하거나 즐겁지가 않다. 서로 처한 조건과 상황이 다르면 대화의 주제나 결도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원래도 언행에 신중한 편이었지만 요샌 친구들과 얘기할 때 예전보다 더 언어를 신중하게 고르게 된다. 어느 정도 주관이 확립된 나이의 인간과 인간이 만나 교류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요즘 이렇듯 우정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여둘톡 예전 에피소드 <Ep. 26 친구 사귀는 법>을 다시 듣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배운 건 친구라는 존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꼭 오랜 시간을 공유한 사람만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김하나 작가는 다른 방송에서 자신이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람만 족히 100명은 넘을 거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동갑이거나 또래인 사람만을 친구로 정의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란다. 자신에게 친구의 범주는 매우 넓다고 했다. 황선우 작가도 살다 보면 친구는 생겼다가 멀어졌다가 반복하는 것이고, 빈자리를 누군가 새롭게 채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ENTP인 황선우 작가는 자기 주변에는 다른 친구들에겐 '(연락이 뜸해) 서운하다'는 말을 듣는 친구들이 유독 많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비록 나는 INFJ지만 나에게 자주 서운해하다고 하는 친구들의 존재가 조금 버거운 편이다. 나는 이 정도면 관계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인데 자꾸 서운하다는 말을 들으면 내 바운더리 설정에도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요새는 구속력 없고 느슨하지만, 그래도 종종 서로를 떠올리면서 안부를 묻고 미지근하게 계속되는 친구관계가 좋다. 김하나 황선우 두 작가 모두 공통적으로 '절친'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절친'과 '그렇지 않은 친구'의 경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어쩐지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나 그렇듯이 친구관계에 순위를 매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30대가 넘어가면서 점점 우정에 중요도를 매기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든 각자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다양한 일이 생겨난다. 취업을 하거나 퇴사나 실직을 할 수도, 유학을 갈 수도 있고, 실연을 당할 수도, 결혼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아이가 생겨 가정을 확장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변수가 생기는 와중에 친구라는 존재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리라는 법은 없다. 친구도 공사다망할 것이다. 타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이제 임신 10주 차인 나는 입덧이 한창이라 회사에서 점심약속도 거의 잡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니까 일과시간에 업무만 하기에도 시간이 한정적이다. 가끔씩 갖던 동기나 친구들 모임도 최대한 삼가고 있다. 내 상태를 잘 모르는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나를 배려해 달라고 하기엔 나도 앓는 소리, 아쉬운 소리를 잘 못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때는 부담스럽지 않고 섬세하게 거리를 잘 지켜주는 친구들이 도움이 된다. 내가 평소처럼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데도, 행여 내 마음이 무겁지 않게 말 한마디라도 예쁘게 해주는 친구들에게 눈물 나게 고맙다.
그러고 보면 우정이란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완벽한 우정, 완벽한 관계란 것도 없다. 그저 기준을 살짝 낮추면 된다. 좋아하는 유튜버 미셸 최가 얘기한 것처럼, 내가 타인에게 하는 만큼 타인이 나에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친구에게 마음을 쏟은 만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보답 받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
이 순간도 특별한 때가 아니라, 그저 불완전하지만 어여쁘고 애틋한 사람들이 복작거리고 살아가는 이 우주의 작은 한 때라는 것을 기억하기. 차분하고 초연해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