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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Jun 28. 2020

치열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나는 항상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사는 것은 계급성의 발현이다. 엄마는 언제나 이걸 "치열하게 산다"라고 표현했다. 수험생활 도중, 학부 때, 취업준비 기간, 대학원 시절, 첫 직장생활 중에도 종종 "우리 딸은 노력파니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았고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난 노력파가 아니라 실력파야."라고 쏘아붙인다든지, 아니면 "난 모범생이 아니고 우등생에 가깝지."라고 말한다든지, "난 사실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 그냥 재능이 뛰어나고 요령이 좋은 거야."라고 한 마디씩 날리곤 했다. 사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면서, 누군가 내게 열심히 산다고 대상화할 때면 이토록 알레르기적으로 반응했던 이유를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계급 상승을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노력'이라는 말은 마치 무릎반사처럼 내 태생적 계급을 상기시켰다.


치열한 삶의 태도는 일명 '악바리'가 되지 않으면, 집단에서 특출 나지 못하면, 튀지 못하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서 탄생한다. 태생적인 기회의 결핍. 적당히 숨 쉬며 살아도 기회가 저절로 주어지거나 어디선가 행운이 굴러오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다. 대학에 다니는 내내 항상 정보수집에 능한 나를 사람들은 동경과 부러움의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너는 어디서 그렇게 항상 좋은 정보를 알아와?" "그런 건 어디서 보고 지원한 거야?" "넌 정말 도전적이고 모험적이야!" 등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다지 해줄 말이 없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을 도무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정보통이 되지 않으면 살 길이 요원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내게 '셀프 정보수집'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대표적인 계기는 대학 입시였다. 부모님은 입시에 무관심했고, 나는 우리 학교 문과 전교 1등이었지만 입시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었지만 대개의 일반고 선생님들이 그렇듯 학생 맞춤형 뾰족한 입시 전략을 세워주시지는 않았다. 인강 외에는 사교육의 도움을 크게 받지도 않았으니 내게 맞는 입시 대비책을 조언해 줄 사람은 전무했던 셈이다.


평소 나는 모의고사보다는 내신에 월등히 강한 스타일이었고 논술 실력, 리더십, 어학 능력 등 다양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나는 나와 가장 맞지 않는 전형인 정시만을 바라보면서 '무식하게' 수능을 준비했고 결과는 참패였다. 수능성적은 역시나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학생부 100% 전형으로 서울의 한 사립대학에 지원해 합격했다. 심지어 학교나 학과에 대한 정보조차 눈곱만큼도 갖고 있지 않아서 그냥 대충 배치표 보고 '눈에 띄는 곳'에 지원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내가 특이한 학과를 전공하게 된 건 이런 필연과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 낸 우스꽝스러운 결과였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꽤 좋은 선택이었다고 판명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삶의 방식을 완벽히 재건했다. 입학하기도 전에 학과 교수님들이 과거에 출판한 책들을 한 번씩 훑어보고 갈 만큼 욕심이 대단했다. 대학 첫 OT 후 뒤풀이 자리에서 기어코 "저 교수님 책 읽었어요."라고 다소 저단수의 수법으로라도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성에 찼다. 스무 살의 나를 본 사람들은 내 눈빛에서 매 순간 야망이 뚝뚝 흘러넘쳤다는 것부터 기억할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미움도 엄청 많이 받았다. 모든 선생님에게, 모든 친구들에게, 아니 만인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났던 내 모습이 곱게 보이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거기다가 예쁘기까지 한 '사기 캐릭터'로 등극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가끔 누군가가 내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식으로 내 행동의 계급적 기반을 눈치채고 그 사실을 들출 때면 창피했다. 모든 것에 능하고 싶은 욕심은 때로는 성급했고 경솔했다. 천천히 놀라지 않을 속도로 다가가고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나를 어필하는 것이 고학력 공동체의, 일명 '우아한 사람들'의 규범을 알지 못했다. 자세히 보면 항상 조급한 나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시선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궁극적으로 기회를 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같은 공동체 내에 있어도 다음부터는 가능한 한 엮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날 꿰뚫어보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나는 극도로 두려워했고 정체를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숨었다. 나는 과거를 잊고 한시바삐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내게 그런 것들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성공에 집착하는 건 개천에서 나와 용이 되길 꿈꾸는 애들의 공통점이었다.


인생 계획을 장기, 중기, 단기 단위로 치밀하게 짜고, 플랜에 딱딱 맞춰 살아가는 내 삶이 약간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쯤 교양수업 강사의 추천으로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하여>를 읽고 근면성실이라는 개념의 근대적 기획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학 공동체 바깥으로 한발 나아가기 직전 단계에서 이 사회에서의 내 위치성에 대해 지각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 것이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러셀의 책을 덮고난 후 결심이라도 한 듯이 내 삶의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는 일과 그날 하루의 할 일(to do list)을 메모하는 일을 모두 그만두었다. 그 뒤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 성질이 지독하게도 급했던 내가 모든 걸 천천히 하기 시작했고, 계획을 느슨하게 짜거나 무계획적인 삶의 방식을 '연습'했다. 책을 많이 읽고 영화를 무지막지하게 봤다. 그전까지는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해서 기능적으로만 행했던 일이었다. 내 진로와 성취에 필요한 책(자기계발서나 전공서적)만 읽었고 봐야 하는 영화만 봤던 나였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소설책과 예술영화만 붙잡고 있는 날도 많았다. 많은 생각을 했고 무수한 글을 썼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삶이 시작됐다. 그야말로 인생 제2막이 열린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서 나는 몰라보게 성숙해졌다. 우선 나라는 자아의 줄기가 굵어졌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않아도 나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니, 타인에게 나를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나로서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게 됐다. 눈빛은 깊어졌고 입술은 무거워졌다. 23~24살을 기점으로 나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 시절엔 승자남성을 사귀면서 계급적 열등감을 적당히(?) 극복하기도 했다. 돈과 시간과 집과 자신만의 서재가 있는 남자 곁에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게 편안했다. 그의 책은 내 책이었고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으며 그의 지식은 곧 나의 지식으로 탈바꿈했으니까. 그의 취미와 취향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내가 다 가져와버렸다. 연애를 하면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도 애인의 문화자본을 내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여유와 자원이 흘러넘치는 애인의 비호를 받으면서 과거에 치열하게 살았던 모든 세월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인의 티셔츠를 빌려입듯 너무나 즐겁고 발랄하게 그의 계급적 상징들을 내 것으로 둔갑했다. 마이너 한 듯 하지만 고급스러운 것, 비주류를 표방하지만 고품격인 것, 약자를 비호하면서 동시에 인텔리함을 놓치지 않는 것, 정의를 외치면서 실은 뼛속까지 엘리트적인 방식들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내 계급적 콤플렉스를 본질적으로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는 건 당시의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내 인생을 연도와 월과 일과 시간 단위로 쪼개어 치밀하게 설계하는 일을 포기했을 뿐,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다. 나를 오래 지켜본 주변인들이라면 모두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간의 학습을 통한 전략이 나름 잘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때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것 같다", 혹은 "조용조용하면서도 똑부러지게 일을 잘 처리한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날 때다. 특히 직장에서 나를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분명 내 타고난 계급성을 짐작하지 못하도록 모호하게 할 만큼, 한껏 여유 있는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보다 잘 '연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예민하고 섬세한 내가 여전히 타인의 배경과 나를 견주면서 입을 닫는다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은 언제든 또 찾아올 것이다. 최근에는 이직 문제를 둘러싸고도, 어쩌면 내 계급적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를 선택지를 두고 아주 오래도록 고민하고 있다. 콤플렉스는 주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좋은 선생님의 조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처한 상황과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해 더욱 가볍고 유쾌하게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자신의 약점과 그를 둘러싼 생각이 이미 차곡차곡 정돈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 갑자기 옆에서 찔러와도 그 의제에 대해 막힘 없이 이야기하는 귀하디 귀한 사람들을 목격할 때마다 아, 정말 저런 사람들을 닮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이슬아 인터뷰집에서 유진목 시인의 문장을 볼 때 이런 느낌을 받았고, 또 올해 내 삶에 새롭게 들어온 한 사람에게서 그러한 태도를 배우고 있다. 나 자신부터 잘 안아줄 수 있는, 그래서 세상을 더 잘 품을 수 있는 경쾌한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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