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가 지나서 아들은 걸어서 병원을 나왔다. 처음엔 빠르게 걷는 것을 힘들어했고 계단을 잘 내려오지 못했지만 3개월 후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ROTC는 지원 안 했고 군대는 공익근무로 대치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건강하게 평상시와 다름없이 잘 지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와 내 남편, 아들의 마음상태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이 무심코 던진 말
"엄마, 저 자꾸 악몽을 꿔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이제부터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살려고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 그래. 아들......"
이제 21살 밖에 안된 자식이 부모 앞에서 담담하게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데 해 줄 말이 없었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맺힌 게 많았는지 마치 부모와 세상에게 선전포고 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한동안 술을 떡실신할 정도로 먹고 다녔고 그야말로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다.
남편과 나는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고 그냥 지켜보았다.
예전 같으면 우리는 벌써 아들을 몇 번 죽였다 살렸다 했을 것인데......
그러면서 아들은 졸업했고 취업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통의 직장인 생활을 했다. 가끔은 술 즐겨 먹는 엄마와 아빠랑 밤새도록 함께 해주며 친구랑 자주 가는 이자카야 술집에도 데려다주었다.
평소엔 말이 없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어찌나 귀여운 효자가 되는지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하고 이뻤다.
그러다가 가끔 출근할 땐 볼멘소리로 툭 던진다.
"엄마, 왜 우리 집은 서울에 터를 못 잡았어요?"
"........"
출퇴근 시간만 왕복 4시간이 넘었기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날 내 속은 종일 시끄러웠다.
2020년 8월 18일 퇴근시간을 앞두고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폰에 비친 이름을 보니 남편이다.
"지금 바로 나올 수 있어?"
"아직 퇴근시간 아닌데. 왜요?"
"OO이가 쓰러졌어. 지금 OO병원 응급실이래. 어서 나와."
한창 코로나로 병원에 진료받기도 힘든 상황에 아들이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이 다급하게 전화한 것이다.
9년 만에 찾아온 두 번째 뇌출혈이다.
아들은 퇴근하고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을 보는데 갑자기 핑 돌았다고 한다.
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느낌을 알았는지 바로 차에서 내려 아빠에게 직장 동료에게 119에 전화를 걸었다고.
몸은 점점 감각을 잃어가던 중 구급대원이 왔고 남편은 그 고마운 사람과 통화를 했다.
"아들이 두 번째 뇌출혈인 것 같아요. 그 근처 제일 큰 병원에 데려다주세요."
코로나로 대한민국 병원 전체가 비상사태였던 때였다. 보호자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라 남편이 아들 옆에 있고 난 지하주차장 차 안에서 하염없이 묵주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나서 들은 말이다.
응급실에 급하게 들어간 아빠에게 돌아가지 않는 입술로 어눌하게 아들이 한 말.
"아빠,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잘 살았어야 했는데......"
"........"
"아빠, 저 결혼할 수는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아들은 그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마스크 속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했다.
마치 첫 번째 뇌출혈 당시 내가 울었던 것처럼.
난 차 안에서 밤새 콧물 눈물범벅이 가 된 채로 묵주를 돌렸다.
"하느님. 전 당신께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요. 돈도 없고 진짜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요. 아시잖아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맹세할게요. OO 살려주세요. 아무 일 없게 살게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평생 술 한 모금도 안 마실게요. 그리고 더 열심히 살게요. 네?"
생뚱맞게 뭔 소리냐고 할 것이다. 난 10년 전 학원사업에 크게 실패한 후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나마 조금 즐기고 있었던 것이 술이었다.
마지막 남은 나의 위로처방이라고 할까? 그때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마음처럼. 그 당시 술이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들은 며칠 후 머리에 구멍을 뚫어 선천성 뇌동정맥 기형혈관을 제거하는 '감마나이프'라는 치료를 받았다.
첨단 치료법이라고 하는데 환자는 양쪽 머리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무거운 쇠를 왕관처럼 쓰고 몇 시간을 버텨야 한다.
일주일 후 아들은 걸어서 퇴원했다.
그리고 2년 후 남아있던 기형혈관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꿈같은 얘기를 듣는다.
뇌졸중에는 크게 뇌경색과 뇌출혈이 있다. 뇌경색은 흔히 나이가 들어 뇌혈관이 좁아져서 막히는, 대부분이 알고 있는 중풍이다. 뇌출혈은 고혈압, 모야모야병, 선천적 기형혈관 등으로 발병하는데 아들은 선천적 기형혈관이 2개가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기형혈관이 존재하는데 100명 중에 3명 꼴로 출혈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들은 모두 2개가 터진 것이다.
아들에게 얘기한다.
"아들, 넌 로또 복권 사지 마라. 벌써 두 번이나 당첨이 됐어."
하지만 아들은 로또 복권을 산다. 그리고 난 술을 지금까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