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모두 나의 환경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근데 이건 뇌의 질환일 뿐이다. 부자라고 해도 다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같다. 환경이 달라서 덜 다치거나 더 다칠 수는 있지만 그 환경이라는 것이 부의 가치로 나뉘지는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잘 관리해도 몸은 어딘가 아프기 마련이다. 차라리 몸이 아픈 거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유라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유가 없는 희귀병도 있다. 이렇게 몸의 질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정신 질환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의지 타령을 하고 자신과 환경을 비교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이야. 걸려도 내가 걸려야지.”
그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내가 부족해서 걸린 게 아니라 그냥 아픈 거다. 원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환경의 부족이 탓은 아니다. 나와 비교해서 잘 사는 사람이 한없이 많은 것처럼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다. 그럼 나는 아프면 안 되는 것인가? 돌부리에 걸려 다리가 부러져도 아플 수 있고 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져 아플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고의 크기가 다를 수는 있어도 다리가 부러진 것을 사건으로 나누어 비교하지는 않으면서 뇌질환자에게 잣대가 너무 엄격하다. 나는 그래서 아픔이 비교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아픔이라도 나에게는 크게 작용할 수도 있고 같은 상황에서도 나의 삶의 로그에 따라 더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얘기한다.
“네가 나약해서 그래.”
아, 물론 우울의 분야에서 호르몬 구성이 취약할 수는 있습니다만 인간의 정신력과 자연치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분명 있다. 물론 그 마저도 극복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이다. 아프면 약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나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강한 것이다. 오히려 아픈데 병원에 가지 않고 낫겠다고 버티는 것이 미련하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뇌질환에 대한 것은 쉽게 인정하고 열어두지 않는다. 내가 듣는 말 중에 가장 화가 나는 말이 ‘약해서 그런다’는 말이다. ‘너만큼 살기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건 내 삶에서 나와 동일하게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게다가 나는 내가 약했으면 벌써 무슨 사단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픔의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병원에 힘겹게 가는 것은 강한 것이다. 나는 나와 같은 병을 가지고도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약했으면 지금 그렇게 살아있기 힘들 테니까.
감기에 걸려도 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딘가 더 취약하거나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감기에 걸리는 것은 순전히 복불복이다. 어디서 어떻게 내가 어떤 상황에 노출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감기는 누구나 걸린다는 점에서 우울증과 비슷하지만 강도가 다르다. 어떤 책에서는 우울증을 암과 비교하기도 한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누구나 걸릴 수 있지만 생사가 오가는 것이 우울증이고 정도는 다 다르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 그리고 초기 발견 시 조금 더 빠른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모든 병이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나 그 병과 비교하는 것이 오히려 가깝게 느껴진다.
암에 걸렸다고 자력으로 이겨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예외도 있다. 자력으로도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고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줄여서 낫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 스트레스라는 것도 다양하다. 우울증도 이러한 원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스트레스란 정말 만병의 근원이다. 이것을 줄이기 위해 힘써야 함은 물론이다. 우울증도 스트레스의 일환이라면 신체화 역시 스트레스의 일환이다. 위가 아프거나 하는 것도 스트레스의 경우가 많은데 정도에 따라 약을 먹고 병원에 가지 위염에 걸린 사람을 의지가 약하다고 탓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독 정신질환으로 오면 의지 타령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다. 전 세계 곳곳에 알릴 만큼 대단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주변의 한 명, 내 가족이라도 나의 병에 대한 이해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쓰는 중이다. 친하다고 믿었던 바로 옆의 사람도 병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쉽게 의지를 이야기하면 아픈 당사자로서는 황당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몸이 아프다면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나는 우울증에도 그런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몸이 아플 때 오지랖을 바라는 것은 아니어도 토닥이는 온기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발 나한테 의지가 약하다고 네가 뭐가 아쉽고 부족하냐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을 하느니 그냥 침묵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아프다고 할 때 그냥 경청해주기를 원한다. 그뿐이다. 그 이야기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남편도 엄마도 친구들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지, 어째서 나이도 어린데 기력이 없는지. 물론,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그런데 내가 병에 걸리니 병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하고 알게 된 사실, 그리고 정립된 생각들이다. 이 생각들을 주변에 말하기 시작했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받아들이는 척하는 사람도 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은 다양하기 때문이 이런 다양성에 대해서 나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다만 너무 편견을 가지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대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정신질환자가 병원에 잘 다니면 오히려 관리하면서 사는데 어려움이 덜하다.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티는 쪽이 위험하다. 그 위험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증가한다.
혹시 주변에 조금 이상해 보이거나 진료가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권할 수 있어야 하며 아픈 사람도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병원에 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히 필요하다.
코로나 19로 인해 집 안에만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울증 환자도 늘어난다고 한다. 경증 우울증이면 또 극복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중증으로 넘어가는 수도 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왜 아직도 인식이 바뀌지 않는지는, 내가 아픈데 쉬쉬하고 다니는지는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프다고 밝힌 후에 나에게 자신도 그래서 병원에 다닌다고 한 사람들이 꽤나 많다. 그리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그 말을 딱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아픈 게 티가 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렇게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 환자들을 안고 살면서도 적극적인 의식 개선에 나서지 않고 오랫동안 그래 왔듯이 미쳤다며 피하기 바쁠까. 병에 대한 인식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말이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나 좀 이해해 달라고 하는 말의 하나이다.
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이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자라서 결혼을 했다. 그 안에 수많은 일들과 사연은 누구에게도 꺼내 말하기 힘들 만큼 긴 삶을 살았다. 이야기를 다 하려면 내 삶을 통째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건 다 불가능하다. 그리고 뇌질환은 삶의 이야기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여전히 내 주위에서 왜 아픈지 물어보는 사람이 앞으로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뇌의 신호체계가 고장 나서, 혹은 호르몬 체계가 이상을 일으켜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내 우울증이 누구의 우울증보다 심하거나 약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픔은 비교급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