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골목에서 양아치 코끼리를 마주쳤다

상상초월 현지 환경과 인프라

by K 장남

공장 철문 게이트를 열면 큰 도로와 연결된 좁은 골목이 있다. 공장 직원들은 이 골목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하거나 주전부리를 취식한다. 파견 한 달쯤 되었을 때 퇴근을 하다가 이 골목길에서 코끼리를 마주쳤다. 맞다, 바로 그 코끼리다. 무려, 코끼리!


좁은 골목에서 통행 차량을 막고 선 코끼리와 조련사


조련사의 목적은 분명하다. 코끼리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특수 수단이다. 길을 막고 차량에게서 복시시를 뜯어내는 것. 통행료를 내라는 뜻이다.

현지어인 복시시(Bakshishi)는 우리말로 '뇌물'을 뜻하는 말인데 공무원들이 갈취해 가는 뇌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골프 라운딩이 끝나고 캐디들에게 주는 '캐디피'도 복시시라고 하고, 코끼리 조련사에게 뜯기는 '삥'도 복시시라고 한다. 적어도 현지 한인들 사이에서는 돈이 나가면 으레 '복시시' 줬다고 통상적으로 사용된다.

아기 코끼리는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다. 조련사가 회초리로 코끼리를 툭툭 치면 코끼리가 운전석 창문 안으로 코를 들이민다. 드라이버는 급히 준비한 통행료를 코끼리의 코에 건넨다. 코끼리는 그것을 낚아채 조련사에게 전달하고 주머니에 돈을 챙긴다. 보통 200 다카(원화로 약 2,500원) 면 지나가게 해 주는데, 운전수가 100 다카로 퉁치려고 하면 조련사가 코끼리를 다시 툭툭 친다. 그러면 다시 창문 안으로 코를 들이밀어 넣어 추가 통행료를 뜯어낸다. 이 과정이 얼마나 빠르게 전개되고 능수능란한 지 코끼리가 화폐 색깔을 구별하고 알아서 행동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코끼리가 앞 차의 삥을 듣고 성큼성큼 우리 차를 향해 다가올 때 느낀 중압감이란.. 우리 드라이버가 현금이 없었더라면? 나도 현금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코끼리가 차를 뒤집어엎어버릴까? 쿵쿵대던 코끼리의 발걸음 소리만큼 내 심장도 쿵쾅쿵쾅 요동쳤다. 다행히 준비된 현금이 있어서 '양아치 코끼리'에게서 무사히 벗어났다.




퇴근길 코끼리만큼이나 방글라데시 현지 환경과 인프라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기, 물, 공기, 의료 인프라 등등. 무엇 하나 살기 좋은 환경과 잘 갖춰진 시스템이 없다. 최초 도시 설계라는 과정을 잊은 듯하다.

먼저 전기 얘기를 해보자. 국전은 수시로 끊겨서 관공서, 기업, 식당, 기숙사 등등 장소를 가릴 것 없이 발전기 운영은 필수다. 40도가 넘는 여름에는 발전기가 과부하 돼서 폭발 사고가 일어날까 봐 전기 사용량을 낮추려 갖은 애를 쓴다. 관공서에서는 최고 직급자를 제외한 일반 직급자들은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를 이용한다. 우리 회사에서는 발전실에 쿨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의를 한 적도 있다. 발전실기가 고온 때문에 폭발하거나 가동이 중단된다면 손실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은 산업용수, 생활용수 가릴 것 없이 세균이 득실거려 마실 수 없다. 한국의 깨끗한 정화 시스템, 마음만 먹으면 바로 마실 수 있는 수돗물과는 천차만별이다. 이를 닦을 때는 페트병에 담긴 생수로 입을 헹궈야 하고, 샤워를 할 때는 샤워기에 필터기 설치는 필수다. 방금 갈아 끼운 새하얀 필터기도 물을 틀면 즉시 황토색으로 변한다. 그만큼 유해 물질이 많다. 이런 물로 이를 헹궈낸다면 주재원 생활 5년이 된 지금, 이가 다 썩어서 한국 휴가를 갈 때마다 치과를 가지 않았을까?


설치한 지 이틀 된 기숙사 샤워 필터기. 일주일마다 교체를 하는 것이 좋지만 그마저도 적응해서 한 달 마다 교체했었다.


그렇다고 동남아 하면 떠오르는 '맑은 공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방글라데시는 인도 옆에 위치한 서남아시아 국가로 분류되는데, 위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방글라가 동남아 휴양 국가 중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오해한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UN의 지속가능 2030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를 공표했지만 크게 염두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빈곤종식, 좋은 일자리와 경제 성장과 같은 17가지의 목표가 있는데 기후변화 대응, 지속가능한 청정에너지와 같은 친환경 관련 목표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국민 연평균 급여가 3천 불일 정도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개도국이라 친환경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벽돌 공장에서 뿜어내는 석탄재, 차량이 뿜어내는 CNG 매연, 겨울철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까지.. 이곳 공기가 나쁠 수밖에 없다. 연평균 미세먼지 지수 AQI는 100 이상이고 겨울철 특정 기간 동안에는 지수가 항상 200을 상회해 인도와 함께 세계 1,2위를 다툰다. 사람이 살면 안 되는 저세상 환경이다.




우연이겠지만 코끼리를 마주치고 며칠 후부터 물갈이를 시작했다. 결국 열악한 방글라 환경에 몸이 잡아 먹혔다. 코끼리한테 잡아 먹힌 건가?

위생 관리를 위해 항상 페트병 생수를 마셨지만 현지 물이 내 몸으로 아예 안 들어올 수는 없었다. 일주일 동안 배가 너무 아팠고 30분에 한 번은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공장 전체 회의가 있으면 초주검이었다. 신입사원이다 보니 아프다고 말은 못 하고 1시간여의 회의 시간 동안 아픈걸 꾸역꾸역 참아야 했다. 회의 내용에 집중도 못 하고 혈색이 안 좋은 게 보였나 보다. 공장장님께서 반차를 쓰고 바로 퇴근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나다 보니 면역력이 많이 떨어졌다. 숙면도 취할 수 없는 상황. 기숙사 내 방 위치가 1층으로 발전실 바로 앞이었는데, 국전이 시도 때도 없이 나가는 바람에 에어컨 가동을 하려면 새벽에도 1,500 KV 발전기가 돌아가야 했다. '우르릉 쾅쾅' 하며 발전기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천둥 같은 발전기 소리에 새벽마다 잠에서 깨니 약을 먹어도 몸이 회복될 수 없었다.

결국엔 몸에 다른 이상 증상이 발현됐다. 볼거리가 걸린 것처럼 오른쪽 뺨이 크게 부었다. 이제는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지 의료 인프라도 열악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지라 덜컥 겁부터 났다.

'갑자기 수술해야 한다고 하면 어쩌지? 볼 하나는 떼어줘야 여기서 살아남는 건가? 수술실 칼은 소독이나 제대로 되어 있을까? 의사가 라이선스나 있는 사람일까?' 오만가지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 때는 방글라의 비위생적 상태 때문에 현지 미용실도 가지 않고 휴가 갈 때까지 머리를 기르던 시절이라 병원을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했다. 방글라 주재원직 면접 때 체질적으로 우수해서 해외에서 크게 아파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 온 지 한 달 만에 물갈이에 볼거리까지 걸리다니. 거짓말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연차를 쓰고 다카 수도에 위치한 아폴로(Apollo) 병원에 갔다. 아폴로 병원이 규모도 크고 시설도 잘 되어 있는 병원이라고 선배들이 추천해 줬지만 이 말도 반신반의했다.

실제로 아폴로 병원에 가보니 여기가 개도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병원이 크고 깔끔했다. 노년의 담당 의사도 성실하게 진찰해 주셨고 파견 온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적응 단계인 내 개인 상황도 잘 이해해 주셨다. 침대에서 진드기나 벌레, 도마뱀한테 물린 것 같다는 소견과 함께 약을 처방해 주셨다. 병원 1층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자는 동안 지난 일주일 간의 병이 싹 씻겨나가길 바랐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현지 병원 인프라가 좋지 않다는 것은 부분적인 오해였다. 물론, 수도인 다카를 제외하고 국가 전체적으로 의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큰 수술을 해야 하면 먼 시골에서 다카까지 이동을 해서 병원에 입원을 한다. 부산 같은 항구 도시 치타공에서 거주하는 한인들도 의료 진찰을 위해서는 다카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다.

어느 날 밤에는 드라이버가 시골 고향에 급히 가야 한다고 전화가 왔다. 임신한 부인이 사산아를 낳을 위기여서 시골에 가서 부인을 다카 병원으로 데려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음날 전화를 걸어 자세히 얘기를 들어봤다. 부인이 다카에서 수술을 하기는 했는데 낙태 수술을 했다고 한다. 왜 출산 수술이 아니라 낙태 수술을 했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의사 소견으로는 아기가 이미 뱃속에서 사산한 상황이라 부인이라도 살리려면 낙태 수술을 해야 했단다. '시골에 충분한 의료 인프라가 있었더라면 아이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전화를 끊은 후 개도국의 비참한 현실에 한참을 분노하고 개탄스러워했다. 한편으로는, 수도에라도 의료 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해외에 있다 보면 아플 때가 가장 서럽다. 살이 빠졌다, 혈색이 안 좋아 보인다고 안부를 물어봐주고 건강을 챙겨주는 회사 사람들은 있지만 가족들과 친구들만큼 진심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도 아프다고 쉽게 말하지 못할 수 없다. 엄마가 많이 걱정할 테니까, 아프면 일부러 전화도 안 받는다. 결국 아플 때 부담 없이 연락할 수 있는 건 친한 친구들 뿐이다.

"야, 방글라 어떻냐? 이미 죽은 건 아니지?" 죽으러 파견 간다고 한참을 걱정하고 놀려먹던 친구 놈의 연락이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물갈이랑 볼거리 때문에 현지 병원도 다녀왔어. 나 근데 며칠 전에 퇴근하다가 골목길에서 코끼리도 마주쳤다? 삥도 뜯어 가던데."
"몸 하나는 멀쩡 하던 놈이 거기서는 왜 아프데? 그런데 뭘 봤다고?"
"코끼리. 코끼리 마주쳤다고."

헛소리하지 말라는 친구에게 코끼리 사진과 영상을 보내줬더니 그제야 믿는 눈치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당장 돌아와, 미친놈아!"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돈 벌어서 아파트 장만하려면 3년은 있어야지. 어떻게 지금 돌아가."

이후에도 양아치 코끼리와 몇 번 더 마주쳤다. 그때마다 오랜 친구를 보는 것 같이 반가웠다. 내가 직접 코끼리에게 돈도 건네주고 소심하게 코를 만져보기도 했다. 동물원에 온 것 같았고 조련사랑은 친구가 되었다. 전기가 나가서 에어컨을 못 틀게 되어도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한번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공기가 유독 안 좋은 날에는 외부 활동은 자제하고 공기 청정기를 틀고 마스크를 썼다. 물갈이를 심하게 했던 게 전화위복이 되어 그 이후에는 복통도 거의 없게 되었다. 몸도 마음도 단련되고 발전해서 현지 적응 초기 단계를 점차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