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를 튼다는 것

by 루카

덤불숲에는 비어있는 둥지들이 있었다. 나뭇가지와 풀뿌리 그리고 거미줄을 엮어 공 모양으로 만든 뱁새 둥지였다. 하지만 그 주변에 뱁새는 털끝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둥지들은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는지 다 해져있었고 비어있었다. 남아있는 둥지들마저 비바람에 무너져 땅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한때는 덤불숲에 뱁새들이 튼 둥지로 가득했다. 뱁새들은 서로 모여 둥지를 틀었고, 서로가 서로의 이웃이 되었다. 아침이 되면 각자의 둥지에서 나와서 뛰놀고, 배가 고파지면 작은 곤충들을 잡아먹었다. 누가 곤충을 못 잡은 날에는 모두가 각자 잡은 곤충을 조금씩 떼어 나눠주었다.

해 질 녘이 되면 마른풀을 주워 둥지를 고쳤다. 둥지를 만드는데 서툰 친구가 있으면 가서 둥지를 잘 짓는 방법을 알려주고 도와주었다. 둥지란 매일 내가 둥지를 쓰는 만큼 헝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다시 다듬어서 모양을 유지하는 관리가 매일매일 필요했다. 그래도 뱁새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나를 도와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뱁새들이 하나둘씩 둥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음식물을 주워 먹기 시작하고, 버리고 간 플라스틱 그릇을 둥지 대신 쓰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그릇은 편했다. 아무리 사용해도 헝클어지지 않으니 함부로 사용해도 그만이었다. 함부로 사용하다가 그릇이 더러워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저 그 그릇을 떠나 다른 플라스틱 그릇을 찾으면 됐으니까. 점점 뱁새들은 며칠 동안 한 플라스틱 그릇에 머무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그 그릇은 버리고 다른 플라스틱 그릇으로 옮겨가는 생활을 했다.

뱁새들에게 달라진 건 둥지의 재료만이 아니었다. 뱁새들은 더 이상 자기 옆에 이웃한 다른 뱁새들과 어울리지 않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기는 얼마 후에 떠날 거고, 자기가 떠나기 전에 다른 뱁새가 먼저 떠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같은 날에 떠나는 뱁새는 경쟁자이자 적이었다. 뱁새들은 더 이상 옆 둥지에 누가 사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뱁새들은 서로에게 둘러싸여 있었어도 외로웠다.

플라스틱 그릇이 부족한 날이면 서로가 한 플라스틱 그릇을 차지하겠다고 서로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어떤 한 덩치 큰 뱁새는 다섯 개의 그릇을 동시에 차지하고 다른 뱁새들이 못 들어오게 했다. 둥지가 없어 밤중에 추위에 덜덜 떠는 다른 뱁새들을 봐도 그는 자기의 빈 둥지들을 내어주지 않았다. 날개가 꽁꽁 얼어버린 뱁새들에게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와서 자기에게 바치면 이번 밤만은 둥지를 내어줄 수도 있다고 으름장 놓을 뿐이었다.


뱁새 빈이는 플라스틱 그릇에서 태어났다. 빈이는 말로만 들었을 뿐 한 번도 진짜 둥지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빈이에게는 플라스틱 그릇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다른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오늘 하루 머물 수 있는 플라스틱 그릇을 찾기에 바빴다.

빈이는 오늘 운 좋게 빈 플라스틱 그릇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겨우겨우 몸을 뉘었는데 다른 뱁새가 빈이가 누워있던 플라스틱 그릇을 걷어차서 빈이를 끌어냈다. 그 뱁새는 빈이를 플라스틱 그릇에서 내쫓은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빈이를 발로 힘껏 찼다.

쫓겨 나온 빈이는 서둘러 다른 플라스틱 그릇을 찾으러 날아다녔다.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도 추운 날이라 해가 지기 전에 그릇을 찾지 못하면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다른 뱁새들에게 오늘 밤만이라도 그릇을 같이 써도 되겠냐고 부탁을 해봤지만 단 한 뱁새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비어있는 그릇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뱁새에게 간청을 해봤지만, 그 뱁새는 자기가 그릇을 내어주는 대신 자기에게 바칠 것이 없으면 그릇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했다.

점점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빈이는 몸을 떨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날갯짓을 할 힘도 없었다. 두 다리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차디찬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뱁새 한 마리의 그림자만 길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빈이가 정신을 차려보니 푹신푹신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지막 기억으로는 덜덜 떨고 있던 것만 생각이 나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빈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둥그란 구조물이 온 방향에서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등을 보이고 무언가를 골몰히 하고 있는 뱁새가 한 마리 보였다.

"여긴 어디죠?"

빈이가 겨우 목소리를 내자 그 뱁새가 뒤돌아봤다.

"둥지 안이야."

그리고 그 뱁새는 잘 쪼개진 음식을 가져와 빈이 앞에 내려놓았다.

"정신이 돌아왔구나. 다행이야. 배고플 텐데 우선 먹어."

빈이는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우선 그것보다, 그 뱁새가 말한 단어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다.

"둥지라고요?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응. 둥지. 난 찬이야."


다음 아침, 눈을 뜬 빈이는 어제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햇빛이 비쳐 밝은 둥지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는 찬이를 찾아 나섰다. 찬이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풀을 다듬고 있었다.

"하룻밤동안 신세 져서 죄송합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걸 어떻게 하면 되갚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찬이는 당황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되갚는다고? 전혀 그럴 필요 없는데. 난 너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고. 그리고 왜 미안해?"

찬이의 그 말을 듣고 반대로 빈이가 고개가 갸우뚱했다.

"더 이상 폐 끼치기 전에 빨리 가보겠습니다."

"어디 급하게 가야 할 곳이라도 있나?"

"아뇨, 그건 아닌데 제가 여기서 계속 신세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여기서 지내도 괜찮은데. 아직 몸이 다 회복 못 한 것 같은데 회복될 때까지만 있어줄래? 내가 오히려 걱정돼서 그래. 내가 부탁할게."

빈이는 그날 이후로 찬이와 같이 생활하며 둥지를 트는 방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찬이는 그 과정을 재밌게 해 주려고 배려해 주었다.

"나뭇가지를 먼저 대고, 그 사이를 풀로 채우고, 거미줄로 고정시키면 되는군요."

빈이는 신나서 얘기했다. 찬이는 그런 빈이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게 둥지의 본질은 아니지만, 맞는 방법이긴 해."

빈이는 찬이에게 궁금한 게 한 움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이는 조심스럽게 찬이에게 물어보았다.

"다들 둥지를 버렸는데, 왜 선생님은 아직도 둥지를 짓고 계세요?"

찬이는 꾸미거나 숨기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 마지못해 꾸역꾸역 하는 일 말고, 내가 밤을 새 가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 결국 보면 내가 그런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하고 값진 것 같아. 나에겐 둥지를 짓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야."

빈이는 눈이 반짝이며 말하는 찬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어요. 둥지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둥지의 본질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둥지를 튼다는 건 비바람을 피하는 구조물 자체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야. 그저 비바람만을 피하고 싶으면 남들처럼 편하게 플라스틱 그릇을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둥지의 본질은, 둥지를 만들며 나 자신을 단련하고, 누군가가 안전하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야. 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항상 받은 게 많았고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어. 나에겐 둥지가 그런 의미야."

'멋있네요...'

빈이는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 했지만 속으로 여러 번 외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빈이는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부리들이 둥지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둥지를 지탱하고 있는 나뭇가지를 꺾고, 풀에 구멍을 뚫고, 거미줄을 당겨 찢어버렸다. 빈이는 서둘러 일어나 그 부리들을 하나둘씩 쫓아냈다. 부리들은 빈이의 반격에 놀라 후다닥 도망갔다.

찬이는 둥지 중앙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부리들이 둥지를 망가뜨렸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빈이는 찬이에게 그 부리들에 대해 물었다. 찬이는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끔 둥지를 헝클어뜨리려 오는 뱁새들이 있어."

"우리와 같은 뱁새라고요? 왜죠? 이 둥지가 누구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나도 궁금해서 그들을 쫓아가서 그걸 한번 물어본 적이 있어. 내가 둥지를 만든다고 해서 플라스틱 그릇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내 둥지를 헝클어뜨려도 새로운 플라스틱 그릇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 멀리서 내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걸 못 참겠더래."

빈이의 머릿속에 플라스틱 그릇에 살면서 마주쳤던 뱁새들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명감을 가지고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이를 남들은 못 견디는 것 같더라고. 그에 비해 본인들이 무의미하게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걸까? 그러니까 꼭 둥지를 헝클어뜨려야 마음이 편해지나 봐."

찬이는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헝클어뜨리게 놔둬. 괜찮아. 다시 또 고치면 되는 걸. 그것도 둥지를 트는 과정 중에 하나야."

다음 날, 빈이는 찬이를 도와 헝클어뜨려진 둥지의 구멍을 메꿨다. 다 고친 둥지를 한번 시험 삼아 흔들어보았을 때, 빈이는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둥지는 헝클어뜨려지기 전보다 더 튼튼해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빈이는 몸이 건강하게 회복했다. 찬이는 빈이가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시켜 주었다. 빈이는 자기를 붙잡지 않는 찬이에게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찬이는 이 헤어짐 또한 둥지를 트는 과정의 일부라고 했다.

"그냥 나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항상 받기만 하고 되돌려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서."

빈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마음에 말했다.

"나에게 되돌려줄 필요는 없어. 너는 늘 나에게 받기만 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너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틀어놓은 둥지에 잠시나마 누군가를 보호해 줄 수 있었어서 난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뱁새인걸. 언젠가 누군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때가 꼭 올 거야. 그때 그 누군가에게 똑같이 베풀어 주면 돼."

빈이는 찬이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덕분에 여기 있었던 때가 삶에서 제일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찬이도 날개로 빈이를 안아주었다.

"우리 작별 인사는 하지 말아요. 대신 약속해요. 그냥 서로 응원한다고, 다음에 못 보더라도 항상 어딘가에서 응원하겠다고!"

찬이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항상 가슴속에 지니고 다닐 그 마음, 그게 바로 너의 둥지야."


매거진의 이전글날카로운 매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