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을 지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프로필 사진이 200백 장이 넘었다. ‘프로필 사진’이라는 용어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혹은 사진 수 제한이 없는 시스템인 걸 보면 제작자의 의도에 맞게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어느 노랫말처럼 보여주고 싶은 내가 너무도 많은 듯하다. 지루할 때면 나의 과거 프로필 사진을 보며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 의도치 않게 나의 흔적들이 사진 속에 남아있다. 의도한 포즈와 함께 의도하지 않은 그때의 ‘나’. 후회가 아닌 아쉬움이 종종 느껴진다. 지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 내 연락처를 등록한 타인은 내 여러 사진들을 보면서 나에 대한 이미지를 새로이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나의 최근 모든 SNS의 사진들은 아이와 관련된 사진들이다. SNS에 올렸던 나의 여러 사진들에 여러 의미들을 품고서 올렸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역시 ‘나’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또는 ‘너’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우리 아이가 대단한 점은 ‘내 아이’라는 점이다. 그저 그것만으로 상당히 귀엽다. 그 이유만으로도 상당히 대견하다. 그런 까닭에 수시로 남기려 애쓰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애쓰는 것을 누군가 공감해 주길 바란다. 아니 그냥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우리 아이 너무 이쁘죠.
SNS의 여러 사진들은 다 저마다 이야기를 쥐고 있다.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담은 여러 사진이 수도 없이 많고, 많이 지나간다. 그중 나의 사진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온라인에 게시한다는 것은 사진에 조미료를 치는 것.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악마의 MSG라고 가히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조미료가 적절히 잘 들어간 사진들은 결국 내가 다시 먹는다. 아직까진 너무나도 과한 MSG가 첨가된 적은 없었다. 솔직히 가끔 그런 게시물들이 눈에 띌 때 조금 부럽긴 하다. 행복했던 순간들이라 올린 적도 다수지만, 게시함으로써 더 행복해진 사진들도 다수기 때문에.
현재까지 게시하고 있는 아이사진은 수십 장이 거뜬히 넘는다. 내가 아이사진을 올리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탐구해 본 적은 없다. 누군가는 ‘AI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무책임하게 아이사진을 인터넷에 공유하다니, 정말 생각 없는 부모며 무식하다.’라고 비난할 수 있다. 깊지 않게 생각하자면 ‘단순히 그저 올리고 싶어’서 올렸다. 왜 그런 걸까? 하나로 귀결된 이유는 아마 단순하고 명료한 듯하다. '우리 아이 너무 이쁘죠?'. 이 한 가지. 너무 귀엽고 이쁘고 잘생긴 우리 아이를 어디 자랑할 곳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가족만으로 채워지지 않고, 내 SNS에 올리게 된다.
때때로 타인의 시선도 신경 쓰게 된다. 아니 매번 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자주 프로필사진을 바꿔서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혹은 SNS를 내 아이 사진으로만 도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보자면 그럴 것 같다. 그렇게 횟수를 조절함에도 이제 내 SNS는 아이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그렇게 이제는 꽤나 넘겨야 내 ‘아들 시절’이 나온다. 물론 이 모습 또한 영원히 ‘아들’ 시절일 테지만 말이다.
수없이 많은 순간들 중 선발되어 게시된 사진과 영상들을 종종 본다. 아이가 세상에 막 나온 순간, 첫 뒤집기를 하려고 애쓸 때 같이 응원하는 순간, 커튼 뒤에서 까꿍 하면서 꺄르르 웃는 순간 등. 외부를 향하여 게시했던 것들의 마지막에는 내가 서 있게 된다. 우리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나의 고향 집은 2층 집이다. 2층 거실의 선반에는 우리 가족들의 사진 앨범이 빼곡하다. 어릴 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이 사진들을 이제는 명절마다 아니 방문 때마다 펼쳐보게 된다. 신기하다. 사진들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억나면 나는 대로 신기하다. 당시에는 사진이 귀했을 시절도 있을 것이다(장롱 한편에는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 오신 수십 년 된 고장 난 카메라가 아직 있다). 한번 찍으면 필름을 인화해야지만 볼 수 있던 사진들. 우리 부모님은 우리 형제와 가족사진을 조용히 모으셨다.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그 마음을 추측하기 쉽지 않다. 그분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집도, 너희 집도, 옆집도, 앞집도 있는 앨범. 그럼 그분들 모두가 대단한 것은 아닐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은 사진이다. 소중한 순간을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나 손쉽다. 손에서 핸드폰을 떼고 있는 시간이 별로 길지 않은 시대다. 수시로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남길 수 있다. 웃기거나 화나거나 황당한 순간들 등이 수시로 기록된다. 아마 우리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에 나름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남기고 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인화된 사진이 몇 없다. 누가 해주지 않으면 도통하질 않는다. 값도 저렴한데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흔하지 않은 카메라. 일회용 카메라가 ‘카메라’이기도 했던 시절. 필름을 맡겨서 사진을 찾아올 때면 봉투가 사진으로 두둑했다. 언제 또 쓸지 모르는 필름은 항상 같이 챙겨졌다. 보정이라곤 없는 그 ‘순간’. 입가엔 짜장면을 묻히고 있거나, 부모님과 나란히 서서 무표정하게 찍혔던 사진들. 하나, 둘, 셋을 외치지 않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김치고 치즈고, 와이키키 등 온갖 용어들이 난무했었다. 지나기에 더 소중해져 버린 걸까? 나열만 해도 그 시절이 애틋하다.
아내가 출산 직전 산모 침대에서 진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잊길 바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밤새 주고받았다. 그러다 아내에게 영상 편지를 찍자고 했다. 예능프로그램에서나 하는 영상 편지. 그렇게 아내는 '안녕 꼬비야?'로 영상편지를 찍었다. 아내는 조금 황당했을 테고, 나는 행복했을 테고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는 어떨까? 아빠가 왜 찍었는지 그 의미를 추리해 주면 좋겠다. 적어도 본인 태명이 두꺼비에서 따온 ‘꼬비’임은 알고 살면 좋지 않을까.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영상의 대화를 알아들 수 있게 됐을 때, 영상의 의미를 알게 됐을 때, 영상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 아이에게 부모님의 이러한 영상 편지는 어떤 의미로 전달될까 궁금하다. 개인적으론 눈물을 꺼이꺼이 흘리는 장면이 연출되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는 가정을 이루시고 곧 중동으로, 싱가포르로 건설 노동자로서 일하러 가셨었다.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부모님은 두 분을 세상으로 내던지셨다. 그곳은 더 이상 어느 총각이 살던, 어느 아가씨가 살던 세상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당시의 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던 아버지는 그렇게도 고단한 삶을 노력으로 이겨내고 계셨다. ‘노력’이라고 명명하기에도 조심스럽다. 혹여나 폄하되는 건 아닐지. 고향 집에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고국의 20대 초반의 아내와 갓난아이에게 보낸 편지가 꽤 남겨져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을 잘 이겨내고서. 여러 해 전이었다. 누나와 명절에 안방에 누워서 그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너도나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직도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낸 편지. '지금 얼굴에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겠오'.
우리 부부가 남기는 여러 기록이 우리 아이에게 의미 있었으면 한다. 인생의 전환점, 회고의 순간, 감정의 폭풍 등 같은 엄청난 기록물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우리 어버이가 남겨주신 여러 기록을 읽고 기억한 것처럼, 나의 아이도 읽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잠깐은 인생을 멈춰봤으면 좋겠다. 읽는 순간만이라도.
이렇게 적다 보니 그냥 예뻐서 올려놓고 상당히 많은 변명을 주저리 늘어놓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