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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30. 2019

남의 집 자식들은 명문대를 잘도 가던데. 부모 탓인가?

수재라 불린 아빠가 평범한 아들을 보며 후회하는 것들

엄마만 가 봐. 난 차에 있을래



지금은 스무 살이나 먹은 아들이 열여섯 중학교 3학년이던 여름이었다. 모교에게 재학생들을 위한 강연을 부탁받고 내려간 날이기도 했다. 마침 매일 만나는 술친구가 근처 지역에 놀러 가고 싶었다면서 의기투합해, 승합차를 타고 두 가족이 함께 내려왔다.


술친구는 늘 볼 꼴 안 볼 꼴 다 보던 내가, 후배 고등학생들 앞에서 강연하는 걸 상상만 해도 재밌다고 신나 했고, 가족들 모두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일에 내가 하는 강연을 언제 듣겠냐며 참관하겠다고 우겼다. 그래서 모교 교장선생님의 양해를 얻어 모두 대강당으로 입장 했다.


하지만 아들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 있을 테니 키를 달라고 아내와 술친구에게 말했다. 그리고 강연 내내 모두가 희희낙락 거릴 때 아들은 끝끝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과학고등학교 출신이다. 게다가 당시 아이큐가 145가 넘었다. 그때 145 이상은 그냥 '145 이상'으로 머릿수가 세어져 학교 홍보 팸플릿에 실렸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 아닌 수료를 했고 2학년 때 월반했다.


난 평생에 진학으로 인해 스트레스나 강박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 인생에 그나마 제일 어려운 입시를 꼽으라면 과학고 입학이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도 내가 원한다면 항상 톱 클래스에 들었다. 공부, 성적, 입시는 내게 있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의 몇 달 후, 아들이 민사고를 포기하고 용인외대부고와 하나고 입시를 선택했다. 아빠에 대한 경쟁심, 혹은 자격지심으로 평소 준비하던 민사고보다 더 어렵다는 입시를 치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빠가 나온 영재고, 옛날 과학고, 는 아빠와 평생 비교되는 표본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라면서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이 연이어 입시에 실패했다.




왜 난 아빠 아들인데 이렇게 안되는 거야?



작년, 아니 올해 2월 초. 수시와 정시 모두를 떨어진 뒤 술 한잔 거하게 취해 들어온 아들이 부모 앞에 눈물을 보였다. 위스키 한병 꺼내 들고 아들과 아내와 계속해 술잔을 들이켰다. 아들의 북받친 설움이 서럽게 나와 아내를 울렸다. 아빠 보기 창피하다, 아빠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엄마가 더 힘들 텐데 미안하다, 라고 서러워했다.


참 아들은 입시운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에는 국제고 입시에 떨어지더니, 중학교 3학년 땐 두 번의 특목고 입시에 떨어졌다. 그리고 대학 입시는 아들보다 월등히 높은 성적이 요구되는 대학과 학과를 지원했다. 그래서 모조리 결과에 좌절해야 했다.

 

아빠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아빠를 의식할 필요 없어.
성적에 맞게 가도 돼.



수학능력시험을 20여 일 앞두고 아들의 복통이 시작됐다. 변을 보지 못하고 두통에 시달리고 복통에 구토를 자주 하고 있다. 아들은 시험에 정말 예민하다. 중요한 시험 때마다 아들의 복통이 도졌다. 지금 증세는 아들 인생에서  제일 심하다. 그만큼 아들의 부담이 아들의 육체를 괴롭히고 있다.


아들, 제발 성적에 맞춰서 그냥 들어가.



네가 원하는 학교나 학과에 못 가도 절대 아빠ㆍ엄마는 후회 안 해.



아무리 달래고 체념시켜도 아들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다시 눈물과 짜증을 보였다.


왜, 아빠ㆍ엄마는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 그게 정말 기분 나빠.


아빠만큼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나도 좋은 학교 가고 싶다고!



난 아들의 이십 평생에, 아들의 공부방법이나 성적에 대해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려니, 라기보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하겠지, 라고 여겼다. 특목고 입시에 떨어졌을 때까지도 운이 없었나 보다, 라고 안타깝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또다시 실패하지 않을까 공포에 휩싸인 아들에게서, 아빠의 존재가 트라우마가 된 모습을 보았다.


아들에겐 나 자체가 트라우마다. 내가 만나는 절친한 술친구조차 서울대 법대를 나왔고, 밤늦게 우리 집에 찾아와 '형수님, 형님이랑 술 한잔 하러 왔습니다.'라고 으스레떠는 후배도 과학고 출신 박사다.


어느 날 술에 꼬꾸라져 내 등에 실려온 지방 사는 친구를 보고 아들이 물었다. "저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인데, 저러고 다녀?", 그의 허름한 남방셔츠와 면바지가 낯설었나 보다. "저 아저씨? 대학병원 의사야. 학과장일걸?", 아들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내의 친구들 가운데, 내가 워낙 결혼을 일찍 해서 내 친구의 자녀들 중에 아들보다 나이 든 애가 없다, 아들이 혹은 딸이 서울대 어디를 갔다, 어디 의대를 갔다, 브라운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라는 말에 조금의 미동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나마 나에 대해 다행이라 여기는 점은, 아들에게 이렇게 되어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문대 입학과 입신양명의 출세 가도를 아들이 잘해 낼 거라고 당연시 여기는 나의 오만함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당연시 여겼으니 굳이 다그치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은 실상에 놀라 움찔할 뿐,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매우 후회한다.


아들에게 나의 인생 업적인 학벌과 긴 가방끈을 끊임없이 자랑한 것에 후회한다. 굳이 아들에게 보이고 자극하려 한 게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자랑스럽게 살아온 내가 문제였다. 학벌에 자부심 강했던 아빠가, 아들에게는 끔찍했을 것이다.


아들의 성적과 입시에 무관심했던 나의 오만함에 분노한다. 내 아들인데 잘 되겠지, 나와 내 친구들이 이런 학벌로 살아봐도 별거 없었어, 라는 오만이 아들의 자격지심을 키웠다. 좀 더 아들과 대화하고 좀 더 아들에게 인생의 박차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줬어야 했다. 난 방임했고 아빠의 책임을 등한시했다.


마지막으로, 차라리 아들 공부와 학업에 신경 쓰며 아들의 입시를 함께 준비할 걸 잘못했다, 싶다. 아들의 어려움을 직접 파악하고 함께 해결책을 논의하고, 함께 학원이나 컨설팅을 받았으면 아들의 부담이 오히려 줄지 않았을까, 후회 든다. 아내가 가끔 물어보는 강사들을 보면, 한치 건너 아는 후배들이다. 차라리 집중해서 불공평한 '아빠 찬스'라도 아들에게 제공해 줄 걸 삐뚤어진 후회가 든다.


도대체 이 망할 입시는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가슴 아파해봐도 모든 구석구석이 불공평과 부조리의 소굴 만이 유혹할 뿐이다. 아비는 자식에게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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