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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은 생명이 숨 쉬는 흔적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전초이기도 하다

by 아메바 라이팅

상대를 설득하려고 강조할 때마다, 나는 미간을 심하게 모으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 보면 눈 위로 힘이 모이고 상대를 바라보는 두 눈의 흰자위는 더욱 커진다. 그렇게 드러난 흰자위가 안광을 발산하고 상대는 그 눈부심을 피하려 시선을 회피한다. 그렇게 갑을의 대화가 이어지면 상대는 나의 주장에 설득되거나 꼭 수긍해야 할 것처럼 위축된다.


몇 주전 광대뼈 아래 검버섯처럼 보이는 두 개의 흑점이 크게 보였다. 어릴 적 할머니 얼굴과 손등에 수없이 퍼져있던 검버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늙어감에 대한 애잔함이 슬퍼진다. 그리고 미간을 가로지르며 깊이 파인 골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내가 뭘로 내 인생의 굴곡을 이제야 또 책임져야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깊이 팬 이 골이 책임을 떠안은 게 아닐까, 싶다. 내 인생 사십 년 이상의 일상이 골에서 데자뷔를 그린다.


어느 인류문화학자이자 패션큐레이터인 분의 강연을 지난 달 들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의상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 떠올랐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생관이 패션에 투영되었다고 말했는데, 듣고 나니 정말 그럴듯했다.


주름은 생명이 존재해서 숨 쉬는 흔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어요.



그렇다. 세탁기에서 갓 나온 옷에는 수많은 주름이 찌그러져 있다. 빨랫대에 걸어두면 주름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플랫 한 면으로 살아난다. 거기다 따뜻한 다리미로 곱게 다림질이라도 하면 플랫 하다 못해 빳빳한 종잇장처럼 납작해진다.


결국 이 옷에 주름을 입히고 구겨넣은 것은 우리의 생명이다. 마네킹은 주름과 구김을 만들지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우리는 구김과 주름을 찰나마다 만들기 바쁘다. 그래서 주름과 구김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표이고 우리 삶의 흔적이다.


신이 날 낳을 땐 다림질된 새 옷처럼 구김 없이 고왔지만, 사십이 넘어 살면서 내 생명의 에너지가 내 얼굴의 깊은 골을 만들었다. 살아있어 좋다고 봐야 할지, 구겨진 주름이 애잔하다 슬퍼해야 할지, 아직 판단의 적확함을 깨닫지 못했다.


수십만 번 구기고 구기다 결국 주름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구김 없이 주름이 단번에 생길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름이 있어서 구김을 가려주는 게 아닐까?



옷이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살아있는 우리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구김을 주름의 결 안으로 포용한다. 그리고 어렵게 이상한 길로 구겨지지 않도록 주름이 우리 생명의 에너지가 지나갈 길을 안내해 준다. 그래서 주름 깊은 옷에는 주름을 벗어난 비정형적 구김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주름이 구김을 막아주는 꼴이다.



내 인생 사십을 넘어 오십에 이르자, 온몸에 확고한 주름이 내 몸의 장기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주름을 벗어난 별다른 구김이 모습을 드러낼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구김이 새로운 주름을 만들지 못하면, 결국 주름이 더 이상 생명의 흔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원래의 조각이었던 것처럼 주름이라는 이름 잃은 몸의 윤곽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잃은 생명이 실종되어, 궁극에 나는 흔적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구김 없는 주름이 곧 죽음의 전초가 된다는 반증이다.


세면대 거울을 십여 초간 멍하니 바라보다, 삶과 죽음의 인프라를 깨닫게 되다니. 참 너무 오래 살아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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