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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Dec 25. 2019

오또맘, 오또맘 하길래 그녀의 인스타를 찾아보았다

사람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데 공감

사람의 몸이 저렇게나 예쁠 수 있나?


끝없이 쏟아지는 큰 하수구의 오폐물이 강하구로 거세게 퍼져 나가듯이, 인스타그램의 사진을 점점 빠른 속도로 수없이 뒤져보았다.


거의 유사하고 비슷한 동작과 포즈가 대부분이지만, 어느 하나 비슷하다는 이유로 쉽게 다음 사진으로 옮겨갈 수 없었다. 한 장 한 장이 경이로운 탄성을 불러일으켰다.


오또맘의 네이버 이미지 캡쳐

희대의 명의가 인생 필작으로 만든 걸작이라고 해도, 그 창조물에 대해 성괴라는 말 대신 짧고 굵게 "아~~"라고 뱉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해 주기 때문이다.


장 레옹 제롬, 배심원들 앞에 선 프리네, 1861년
여성의 몸을 두고 예술과 포르노의 음란함 사이에서 모호한 경계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진보와 보수, 예술과 외설, 존엄과 성상품화라는 양자 구도에서 갈피를 잃기 십상이다.


고대 그리스의 창녀 프리네를 재판하는 배심원들 앞에 발가벗은 그녀가 자신의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명장면을 장 레옹 제롬이 반어적으로 그렸다.


그녀의 누드는 신이 만든 아름다움이다. 인간이 어떻게 유무죄를 따진다는 말이냐?



그리스 사회를 혼탁히 한다던 창녀 프리네의 나체가, 이렇게 신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경계를 넘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테레사의 황홀경, 1645년~1652년


프리네의 경우와 반대로, 하느님께 귀의한 수녀님의 에로틱하다 못해 오르가슴을 연상시키는 표정이 유명한 로렌초 베르니니의 이 조각 작품은 성녀를 열락으로 포르노화 시켰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의 에로틱 대신 입바르지 못한 종교적 열락으로 숭흠하는 양면성을 보이는 경계의 아이러니다.


얼마 전 장성규라는 프리 활동 중인 전 아나운서가 오또맘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눌렀다고 해서 난리였다.


내 남편이 장성규처럼 오또맘 인스타를 팔로우했다면,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관련 기사에서 다수로 보이는 댓글의 반응이다. 세상에는 별천지의 포르노그래피가 차고 넘친다.


기부를 독려하는 파버티 포르노, 소매 지식상들이 TV 예능과 저질스런 출판도서로 양산하는 지식 프로노, 진보와 보수의 극악에서 정치적 맹신을 국민의 뜻이라고 윽박 하는 진영 포르노.


세상은 관음과 소비라는 양대 축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그래서 각종 포르노가 차고 넘친다. 그 속에서 인간이 가진 재질 중 하나인 몸매와 매력을 경쟁력으로 하는 그녀의 인스타그램이 금남의 방일 필요가 없다. 그리고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충분히 눈요기로든, 음탕한 관음으로든, 새로운 인생의 자극으로든 소비되어야 한다.


오또맘은 양날의 경계에 선 프리네일 뿐이지, 황홀경을 부르는 성녀 테레사가 아니라는데 고개를 끄덕여 주면 된다. 음란하고 망측한 성적 상상력이 프로이트의 리비도에서 태어나, 칼 구스타프 융의 리비도로 확대되었듯이, 우리의 음란함도 왜곡의 시선에서 드넓은 아량으로 퍼져나가 희석될 필요가 있다. 21세기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신흥 코르티잔으로 받아들이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오또맘을 팔로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쓴 후 조용히 최근 검색에서도 삭제할 것이다.

아내의 조롱은 나만이 맞아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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