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난스럽다 내팽개치고 싶을 때가 잦아졌다. 어쩌다 응석부리고 싶은 마음에 한 두번 생각해 보다가, 언제부턴가 하루에 몇번씩이나 입에 달린 불경 주문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전혀 배가 고프지 않다.
마음이 몸의 생체리듬까지 조절하는지, 삶이 지겨워지자배가 고파본 기억이 사라졌다. 배가 고프다는 허기가 내게서 갑자기 없어졌다. 항상 배고프지 않아 항상 몸이 권태롭다. 넉넉함을 가져 좋아졌다 생각했는데 갖고 싶고 먹고 싶은 열망과 애달음이 사라졌다. 그러자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흐려지더니 급기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살아야 하나?
욕망이란 놈이 이렇게나 큰 생명의 에너지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욕심을 버려라, 라고 말하던 전철의 무지함을 떠올리니 비웃음이 크게 그려진다.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면, 그게 신이지 사람이겠니? 라는 적당한 포기를 성서화하던 어르신의 말씀에서 나약한 인간의 굴복적 종용이 야속하다.
배고픔, 물욕, 성욕, 살욕, 복수욕, 그리고 온갖 잡다한 질투심에 이르기까지. 삶의 원동력이자 생체의 활력에 대해 간과하고 자제했던 교육과 질서가 얄밉다. 왜 진즉 크게 탈선하지 못했나, 얄밉고 어리숙해 싫어진다.
프로이트는 이런 욕망을 리비도라 창시했고 칼 구스타브 융은 리비도가 모든 형태의 시너지적 생명 에너지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와 칼 융처럼 죽어라 정신분석학과 철학을 연구하지 않아도, 삶이 지겨워지니 나도 현학적 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