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안방극장을 웃음과 애절함으로 수놓았던 최고의 히트 드라마를 꼽으라면 '미스터 션사인'을 놓칠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상상과 역사를 한데 모아 사실보다 더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작가의 천재성에 크게 감탄했던 드라마다.
복면 쓴 서로를 의심하며 상대의 입을 가려보는 두 사람의 손동작과 눈 모양의 떨림은 이 드라마 최고의 클리쉐가 되었다. 개그 프로그램이든 트렌디 드라마든, 이 장면을 패러디하려는 시도는 많은 시청자의 추억을 끌어낸다.
어릴 적 내가 아는 가장 예쁜 여자는 캐서린 제타존스였다. 그 이상 더 예쁜 건 죄악이었다. 그래서 느끼해서 실어했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인공으로 출연해도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를 보러갔다. 사라 브라이트만과 'The Phantom of the Opera'를 반데라스가 부르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내 입장에선 괜히 봤다 싶은 후회가 들었다. 느끼한 입술이 툭 튀어나와 더 꼴 보기 싫었다. 캐서린이 왜?
어? 배트맨과 로빈도 눈만 가렸네?
어라? 캣우먼까지?
고금을 배경으로 하는 서양의 히어로는 하나같이 눈을 가렸다. 입과 볼은 훤히 다 비치는데, 눈만 가린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잠깐만 생각해도 반전이 눈에 뜨인다.
미스터 션사인 주인공과 일본 군영을 습격하는 독립군 모두 두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는 복면을 한다. 눈만 빠꼼히 내비친다.
명량대첩을 그린 대작 영화 '명량'에서 보이는 일본 사무라이나 쇼군들이 쓰는 멘포(面甲)도 눈만 빼꼼하다.
로마 시대 이후 기독교의 1천 년 암흑기를 보낸 서양인들에게 눈이란, 평범하게 사제와 하나님을 동경하며 고딕의 첨두 끝을 바라보는 통일된 눈짓만 짓도록 유전으로 각인되었다.
반면 세기 전 5백 년 이전부터 공맹의 사상으로 지배된 아시아는, 특히 한ㆍ중ㆍ일 삼국 지역민들에게 눈은 마음과 인의를 나타내는 렌즈이고 예를 표하는 최고의 표식이다.
그래서 눈을 가리는 동양인은 천하의 역모를 꿈꾸거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명분 없는 하자를 일컫는다. 반면 눈 표정을 억제당했던 서양인에게 입과 볼은 유일한 속세의 통신수단이었다. 그래서 입술, 볼의 근육 움직임으로 그리는 모습에서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30% 이상 더 많은 근육을 쓴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몇 무지한 사대론자들은 웃지 않는 동양인이 웃는 서양인보다 얼굴 근육을 덜 쓴다고 자조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한 분석이다. 서양인들에게 입술과 볼의 표정이 의사소통의 전부라는 문화적 차이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이민 간 친구나 아시안의 졸업사진을 보면, 어색하게 커다란 미소가 헛웃음을 토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전적으로 덜 쓰는 얼굴 근육을 억지의 미러링 효과로 구겨내어야 하니 미소가 곧 고통이고 억지인 것이다.
입을 가리는 마스크를 거부하는 서양인들의 거부감을 문화적 배경으로 이해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입을 가리는 마스크는 죽은 시체나 인간 하자에게 걸어줘야 할 표식이다.
눈을 가린 한국인이 암흑의 사자처럼 여겨지듯이, 입을 가린 그들은 천년의 유전자를 뒤집어 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