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프롤로그 - 라오스 여행

by beingwriter

나는 친구들에게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라 불린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서 손수건을 준비하고 계속 읽어야 한다. 나는 원래 몸에 열이 많아 여름에는 얼음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셨다. 겨울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른에 접어든 어느 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배탈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내 식도는 즐거웠지만 내 마지막 관문이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헤어졌다.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체질이 변해 버린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몸이 고장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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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계절 내내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 다섯 알을 주문하고, 한겨울에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식혀 마시기도 한다. 가게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직원들이 항상 본인의 귀를 의심해서 재차 묻기 일쑤이고 옆에 있던 친구들은 웃었다. 더 슬픈 건, 친구들이 웃는 이유가, 미지근하게 마시는 것보다 나란 사람과 너무 잘 어울려서였다. 내가 심하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람이라 비슷하다는데, 주로 의견을 묻는 말에 “그러던가.” 아니면 “아무거나.” 또는 “다 괜찮아.”라고만 대답하니 그럴 만도 하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겐 무엇을 먹을지 뭐 하고 놀지 중요하지 않아서, 어떤 것을 해도 정말 상관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한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그 자체만 중요하다. 미래의 나와 일과 가족 등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나머지는 신경을 안 써야 살 수가 있다 보니 다른 것에는 선택적 무관심을 보였다. 나름대로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원래 속이 다 보여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천진난만해서 사람을 좋아하던 나는 사회생활을 하고 상처를 받으면서 점점 무덤덤해지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노력하지 않아도 몸에 배어서 익숙하게 나온다. 지금의 나는 부단히 절충한 결과이다.


그래선지 완전히 나를 내려놓지는 못했다. 마치 휴화산처럼 늘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를 분출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함께 놀거나 나를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낯선 곳에서는 내가 딸로서 해야 할, 직장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나이기에 할 수 있는 무한한 것들이 존재할 뿐이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간 라오스에서, 나는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느끼고 여태 몰랐던 나의 마음과 자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아는 친구들과 같이 떠난 여행에서 나는 완전한 자유보단 함께하는 것에 몰입하였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의 맛을 제대로 느꼈다. 그래서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여행은 친구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유럽 여행은 나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처음 가본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막바지에는 낯선 사람들이 조금은 덜 낯선 사람들이 되었고, 패키지여행에서 알게 된 언니와 오빠로 헤어졌다. 군중 속의 행복과 고독을 오가며 삶에 대한 나의 태도,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적인 동물의 역할에 대해서 고찰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여행이 끝나면 낯설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오랜만에 모르는 타인과의 단체생활을 통해 일상의 고민과 생각들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가진 긁지 않은 복권을 가끔씩 긁기 위해, 나는 혼자 오롯이 즐기는 국내 여행을 떠난다. 인어공주도 아닌데, 바다를 참 좋아해서 제주도, 강릉, 속초에 가서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여유를 보낸다. 혼자 가는 여행은 친하지 않고 잘 모르는 나를 알아가며, 집중할 수 있는 낯설면서 편안한 시공간이 된다. 주변에 함께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나만 바라보는 ‘신호등의 초록불’의 시그널과 같다.



미지근한 사람이 여행 속에서 공간의 분리와 사람의 분리 그리고 나와의 분리를 경험하며 들었던 생각이, 느낌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원고지에 글을 쓰다가 생각에 잠기면, 만년필의 잉크가 퍼지면서 만년필은 생명을 잃게 된다. 일상이란 종이에서 조금만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더는 피를 흘리지 않으니, 펜을 내려놓든지 들어 올려 벗어나는 순간이 필요하다. 어제와 오늘의 반복에서 뜨거웠던 피 끓던 몸은 퇴화하고, 찬바람만 불던 마음은 가고 온화하게 성숙해지는 미지근해지는 과정 속에서 낯선 나를 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깨닫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뜨거웠다 차가웠다 하는 일상에서, 또는 미지근한 일상에서 덜 상처 받았으면 좋겠다. 성난 파도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기를 또는 성난 파도를 즐기는 서퍼(surfer)가 되시길...



“활자 파도에서 힘을 빼고 함께 넘실넘실 몸을 맡겨 보세요. 지금 파도 들어옵니다. 준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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