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만든 두 번째 신분증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 첫 번째 라오스 이야기

by beingwriter

고2 때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았고, 난 그때 받은 걸 서른두 살까지 쓰다가 지갑과 함께 잃어버렸다. 매일 만나던 파릇파릇한 10대 소녀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가 떠났을 때 잠시 당황했지만, 다행히 서른 살 즈음에 만든 두 번째 신분증이 있어서 맥주를 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게 바로 여권이다. ‘여행을 가게 될 때 만들어야지’ 했는데, 그게 앞자리가 3일 줄은 몰랐다. 친구들은 수능이 끝난 겨울방학에 운전면허도 따서 신분증이 여러 개인데, 나는 한 개만 주야장천 사용했다. 하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았다. 정말 뭐든 뽕 뽑는 스타일이다.


‘여권 만들러 간다’고 말했더니 친한 친구는 ‘드디어~ 만드느냐’며 축하를 하면서,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바로 대답해 줄 여행지가 없었다. 서른 한 살에는 여행을 가려고 서른 살 끝 무렵에 여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사 사람들은 ‘아직도 여권이 없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가 ‘뭐 바쁘면 여행 갈 시간이 없지’라며 나를 빠르게 배려했다. 해외여행을 서른 살 넘도록 가지 않은 게 문제가 있단 식의 말과 시각 때문에 순간 위축되었다가 ‘이제 여행 갈 거라 필요해서 만드는 거지, 남들이 갖고 있으니까 나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단단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사용하지 않을 것을 소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운전면허를 따거나 여권을 만드는 것은 돈이 들고, 여권은 만료일이 있으므로 필요할 때, 쓸모가 있을 때 만들면 된다. 여권을 빛나는 자격증이나 훈장처럼 생각하며, 여행을 가지 않거나 여행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시선과 생각은 여권이 여행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 이다. 본질적인 의미를 보지 못하고 그저 과시용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권은 모르는 곳으로 여행 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니, 여행을 가고자 하는 마음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래서 여권, 비행기, 일정은 여행하는 데 큰 문제나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여권이 없거나 비자가 없으면 국내 여행을 가면 된다. 아니 여행을 꼭 안 가도 된다. 자신에게 여행이 고생이거나 스트레스라면 여행을 갈 필요가 없다. 여행은 그저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한가로운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라고 했다.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시간은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아가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 대해서는 왜 죄책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면서 쉬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다. 나에게 열심히 노력하는 시간이 있으면 여유롭게 쉬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한가로운 시간을 게임하는 시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러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내가 쓸 수 있는 재산을 나는 묵혀 두기만 했다.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닌데. 써야 재산이지 갖고만 있으면 뜬구름에 불과하다. 어느 날, 같이 어울려 노는 무리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김 언니가 라오스로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아싸라비아 콜롬비아’를 외쳤다.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소리 내지 못한 말을 언니가 먼저 꺼내 줘서 정말 고마웠다. 네 명이 함께 놀러간다는 것도 좋고 혼자일 때의 심심함과 염려(여행에서의 의사소통, 위험 등)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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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언니가 라오스를 옛날에 갔다 왔는데,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우리에게도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서 추천한 거였다. 좋은 걸 나누고자 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했다. 함께 간 백세심과 임순수는 여유롭게 쉼표를 갖고 싶어 해서 관광보다는 휴양을 즐길 수 있는 라오스 여행에 오케이 했다. 라오스는 거리도 멀지 않고 잘 보존된 자연 그리고 다양한 액티비티가 있어서 여럿이, 활동적인 사람들이 여행가기 좋은 것이다.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하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는, 내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즐기는 휴양이 가능하다. 더욱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여름인 곳으로 여행을 가서 심신을 녹이고 청춘들의 천국을 같이 씹어먹고 싶어서 라오스로 떠나기로 했다. 여행을 가다 보니, ‘한가로운 시간 적금’의 만기일이 점점 짧아져서 그게 걱정이다. 갖고만 있다가 똥 되니까. 열심히 만기 해지 해야한다.


“고객님, 돈을 굴리듯 한가로운 시간도 굴려야 가치가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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