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
실천13. 피아노 연습하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하는 하루가 있다. 피아노 대회를 준비하며 같은 곡을 또 치고 또 치던 8살 어느 날, 뭔가가 가슴에서 북받쳐 올라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당황한 선생님이 '왜 그러냐'고 물어오셨고, 나는 '너무 힘들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채 '배가 고프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선생님이라고 내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선생님은 '힘든 거 안다'며 토닥여주는 대신 학원 옆 슈퍼에서 보름달빵과 딸기우유를 사 오셔서 내 손에 쥐어주셨다. 선생님만의 격려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기억은 예쁜 공주옷을 입고 무대에서 연주하는 내 모습을 뒤이어 보여준다. 시골 마을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다니다가 그렇게 곱고 예쁜 옷은 처음 입어보았다. 연주를 마치고 관람석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선생님이 나를 향해 환히 웃어주시던 표정도 생생하다. 대도시 아파트로 이사 온 뒤에도 하농, 반주법, 체르니까지 꾸준히 배웠지만 음악 자체를 즐기지는 못했다. 공부를 핑계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고, 엄마가 통장을 털어 사주신 피아노에는 뿌옇게 먼지가 쌓이다가 내가 타지로 대학을 간 사이 결국 중고로 팔렸다.
지금까지 거쳐온 수많은 선택과 결정 중 가장 후회되는 것 중 하나는 피아노를 꾸준히 배우지 않은 것이다.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기타, 드럼, 피아노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이 있는 곳에 악이 있을 수 없다'는 세르반테스의 문장을 읽으면서, 영화 <원스>를 보면서... 삶의 여러 모퉁이에서 피아노와 관련된 후회와 아쉬움을 마주쳤다.
이런 아쉬움이 투사된 탓인지 아이가 악기 하나는 꼭 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일주일에 두 번 방문수업을 받기로 하고 중고 피아노까지 구입한 것이 어느새 3년이 되었다. "이 모델이 피아노 소리가 좋아요"라며 연주를 권하시던 중고피아노 가게 사장님의 제안에 피아노칠 줄 모른다며 얼굴만 붉혔지만, 예전에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보냈던 피아노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내심 설렜다.
주말이면 아이가 배우고 있는 악보를 펼쳐 더듬더듬 건반을 눌러본다. 강약조절이나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는 전혀 신경 쓰지 못하는 투박한 연주 실력이지만, 언젠가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가족들 앞에서 멋지게 연주하고 싶어 틈틈이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곡을 치면서 익힌 Yellow submarine이나 Moon River의 곡조를 흥얼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참 곱다. 조용했던 집안이 금세 알록달록한 공기로 차오르는 순간을 사랑한다. 어떤 지휘자가 '화가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만, 음악가들은 침묵 위에 그림을 그린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지금은 마지못해 엄마 뜻에 따라주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도 몇 년 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피아노와 멀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집 피아노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킬 것 같다. 내 유년시절의 빈자리, 아이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피아노 소리와 더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