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
실천16.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실패를 마주하기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딱지!), 만일 내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렁이!), 다른 모든 사슴들 놀려대며 웃었네(네 치킨!)~~
한참 말장난이 재미있을 나이인 초등학교 저학년 둘째가 요즘 자꾸만 불러대는 캐럴이다. 두 살 위 형까지 합세해서 지칠 줄 모르고 흥얼거리는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서 가만히 듣다 보니 쿡쿡 웃음이 난다.
"엄마, 내가 이 노래 말고 또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실패는 실 감을 때 쓰는 거고, 포기는 배추 셀 때 쓰는 거래~!!"
정말 재미있는 농담을 알게 되었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하는 아이 얼굴을 마주하니, 평소 같으면 '아재개그'로 가볍게 넘어갔을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게 가슴에 콕 박혔다. 사실 요즘 잦은 패배감에 젖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실패는 실 감을 때 쓰는 것이라며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던진 말 한마디가 물동이에 떨어진 낙엽처럼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얼마 전, 심리상담 대학원에서 공부 중인 지인이 재미삼아 해 보라며 간단한 '성인 애착유형 테스트' 링크를 보내주었다.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내 자세에 대해 묻는 질문들에 '매우 그렇다'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 보니 어느새 '회피형'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도 친구와 마찰이 생기면 화해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그 친구와 다시 맞닥뜨리지 않을까를 궁리하고, 마음이 심란할 때는 해결책을 떠올리기보다 일단 잠을 자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는 식으로 '동굴'에 숨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는 좋은 기회를 얻어 9월부터 잠시 학교를 떠나 연수원 수업을 듣고 있다. 더 나은 교사가 되기 위해 수업을 발전시킬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으로, 새로운 교수법이나 새로운 학습 도구 사용법을 배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강사분들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바로 Reflcetion이다. 어려운 단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사용했는지, PPT를 얼마나 멋지게 꾸몄는지, 최신 학습도구를 얼마나 익숙하게 사용했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오늘 내 발표/수업에서 잘한 점은 무엇인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성찰'하는 시간이 더욱 필수적이다. 내 실수를 마주하는 일이 꽤 괴롭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예외 없이 누구나 자신의 실패와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반성(reflection)은 '시간'을 꼭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줄 내용이 가득하지만 강사분들은 연수생들을 다그치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속에서 3개월째 매일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다 보니 단단함을 자랑하던 내 '회피기술'도 점차 무뎌지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는 위기가 닥치면 모래 속에 머리부터 파묻던 타조처럼 살았는데, 이젠 머리를 아무리 땅에 갖다 대도 내 눈을 가려줄 모래가 사라진 기분이랄까. 한 가지 묘한 점은 발가벗겨지고 숨고 싶은 느낌과 함께 해방감과 성취감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살짝 눈을 뜨고 내 발치에 놓인 수많은 실패들을 들여다본다. 미처 실을 되감지 못한 채 뒹구는 것도 있고, 성급히 되는대로 감아버려서 실이 꼬이고 엉켜있는 것도 있다. 새로운 실패가 늘어날 때마다 스트레스받고 모르는 척했던 순간들을 지나고 보니, 시간을 들여 제대로 다시 감아둔 실패가 많아야 다채로운 색상의 실 꾸러미들을 가질 수 있음이 보인다. 올해는, 자책과 후회대신 '글쓰기'라는 새로운 실 감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일기 수준에 불과한 글이지만 '시간'을 들여 한 글자 한 글자 적다 보면 못 본 척 방치했던 엉킨 실뭉치가 조금은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 참 좋다.
며칠 남지 않은 새해에도 변함없이 내 왼편에는 실패가, 오른편에는 (반성하고 글 쓰는) 시간이 함께 걷고 있을 테니 이 둘을 외면하지 않는 한 나도 아이들과 함께 한 뼘쯤 더 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