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신자의 고백

테드 창 <지옥은 신의 부재>를 읽고

by 빛별

나는 주말 미사만 가는, 다소 얄팍한 천주교 신자이다. 일주일 동안 쌓인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듯 성당에 들렀다가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신실하다기보다는 성실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태도일 것이다. 최근 새로 서품을 받은 젊은 신부님이 우리 본당에 오셨다. 갓 사제 서품을 받은 그분을 정갈한 뒷모습을 보며 종종 생각한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칠 정도의 믿음이란 어떤 무게일까. 미사 시간에 본당 한구석에 앉아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번 주는 무탈하게 해 주세요.'라고 중얼거리는 이 얄팍한 거래와 저분의 신실함 사이에는 대체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 걸까. 이 차이는 단순히 신앙심의 농도 차이일까, 아니면 믿음의 종류 자체가 다른 것일까.


테드 창의 단편 <지옥은 신의 부재>를 읽으며 다시 이 질문을 떠올렸다. 이 소설 속 세계는 신과 천국과 지옥의 존재가 과학적 사실처럼 명백한 곳이다. 천사는 가끔 현실에 '강림'하는데, 그 모습은 자비롭기보다 거대한 자연재해에 가깝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는 기적이 일어나 누군가의 불치병이 낫기도 하지만, 동시에 건물이 무너져 무고한 사람들이 죽기도 한다. 신의 축복과 재앙이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동시에 쏟아지는 것이다.


주인공 닐은 그 무자비한 강림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 그는 아내가 천국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도 순수히 기뻐할 수 없다. 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내를 다시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닐은 '신을 사랑해야만 하는 숙제'를 안게 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를 앗아간 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이 더 어려운 이유는, 소설 속 신은 인간의 도덕이나 상식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적은 '착해서' 받는 보상이 아니라 로또처럼 무작위로 떨어지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보통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인과응보의 세계를 믿고 싶어 하는데, 미사 시간에 듣는 성경 말씀도 가끔은 내 '상식(거래에 바탕을 둔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있다. 아버지 곁에서 평생 성실히 일한 아들보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돌아온 아들이 더 큰 환대를 받고, 누구보다 선했던 욥은 신의 시험이라는 명목 아래 모든 것을 잃는다. 현실도 비슷하다. 뉴스를 보면 천사 같은 아이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독재자들은 부와 천수를 누린다. 이 부조리 앞에서 때때로 신은 마치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인 테드 창이 나를 괴롭힌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신이 당신에게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아도, 오히려 당신의 삶을 파괴하더라도 당신은 그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여전히 거래하고 싶다. 기도한 만큼 평안하고 싶고, 착하게 산 만큼 대접받고 싶다.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한 사람들은 불구덩이에서 고통받으면 좋겠다. 신이 나를 지켜주지 않아도, 세상이 불공평해도, 설명이 없어도 믿는 것이 신앙이라면, 나는 아직 신앙의 입구에도 서지 못한 셈이다. 조건 없는 믿음은 나에게 너무 크고, 너무 막연하고, 조금은 두렵다.


소설의 끝에서 닐은 천국에 가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천사의 강림 현장을 쫓다가 목숨을 잃고 지옥에 떨어진다.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신의 압도적인 빛을 목격한 닐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세계에서 지옥은 끔찍한 형벌의 공간이 아니라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되 '신이 부재한 공간'으로 그려지는데, 닐은 그러한 지옥 속에 살면서도 매 순간 신을 생각한다. 지옥에 있지만 매 순간 신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그는 역설적으로 지옥에 있으면서도 지옥에 있지 않게 되는 게 아닐까.


이번 주말에도 나는 '마음 세탁'을 위해 성당으로 향할 것이다. 여전히 내 믿음은 가볍고 계산적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 질문을 더 품고 자리에 앉을 것이다. '신이 나를 버린 것 같은 순간에도 나는 기꺼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가.' 이 어려운 질문이 내가 신부님의 맑은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이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아직 그 길의 입구에서 계산기를 놓지 못한 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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