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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Dec 03. 2022

살아내야 할 이야기를 사는 용기

 <난주의 바다에서> 리뷰 / 김연수 단편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올해는 유난히 죽음을 많이 접한 해이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3년의 거리두기가 끝나가는 2022년 10월, 설레는 마음으로 핼러윈 파티를 즐기려고 나온 젊은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인파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또래의 딸들을 둔 나는, 사고 뉴스를 듣고 안부를 묻는 지인들과 통화하며 다행히 아이들이 외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이 상황이 왜 이렇게 익숙할까 싶었는데 기시감의 원인은 8년 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와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중고등학생 자식을 둔 부모들은 그저 아이들이 지금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숨죽여 말했었다.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추모공간에는 구조되지 못한 아이들이 쓰던 책과 가방, 일기장과 선물, 편지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들이 살아내고 싶어 한 꿈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며칠 전에 큰딸 S의 동기가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S는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이 길어지다 보니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지 못한 담당 교수님은, 졸업을 앞두고 요즘 왜 이렇게 결석이 잦냐고 한마디 하고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교수님은 그 친구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함께 작업하던 친구의 자리는 비어있는데 세상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그냥 돌아간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별 관심도 없을 것 같다며 왜 열심히 살아야 하냐고 내게 묻는다. 뭐라고 얘기해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하자니 지금은 절망스러운 때라고 못 박는 것 같고, 조금 지나면 슬픔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하자니 슬픔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처럼 들릴까 싶었다.      


이런 어수선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난주의 바다>를 읽었다.

<난주의 바다>에서는 절망에 빠진 인물들이 나온다. 악성종양으로 아이를 잃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손유미는 추자도라는 섬에 정착하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 머물면서 신유박해 때 가족이 몰살당한 후 어린 아들과 이 섬으로 유배 왔던 정난주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어린 아들이 평생 죄인의 낙인을 받고 살아갈 것을 염려한 그녀는 자신이 사라지고 아들이 다른 사람 손에 길러지기를 바라며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달라 다시 살아난 정난주는 제주의 관비가 되어 아들 황경한과 함께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갔다는 이야기다. 손유미는 추자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너무 무서웠다고 정현에게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 그러므로 자연이 무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었다.  (『난주의 바다』 김연수)     


나는 이 대목을 읽고서 잠시 눈을 들고 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안을 둘러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에 내려마신 커피 드리퍼가 놓인 식탁도, 시든 잎사귀가 다 져버린 은행나무도, 사람이 없는 놀이터도 황량하기만 했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더욱 심난해지는 오후였다. 소설의 문장 그대로 이게 바로 나의 마음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위로 ‘난주의 바다’와 ‘은정의 바다’가 겹쳐졌다. 그리고 기우뚱한 채 잠겨가던 세월호와 제사상이 차려져있던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도.

세상을 등지고 혼자 낯선 섬으로 들어왔던 은정은 200년 전,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려 했던 난주의 바닷가에서 손유미로서 두 번째 삶을 가꾸어나갔다. 난주와 은정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곳은 모든 빛이 사라진 깊고 어두운 세계였다.

계속되어야 할 이야기가 사라진 곳이 죽음라면, 삶은 멈춰있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는 모든 곳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쓰기도 힘들고 이야기를 만들기도 어렵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단 말이지요.
물론 귀찮아요. 그냥 살아가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귀찮음을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 그게 꽤 근사해요.”
(김연수 × 문학동네 인터뷰)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은 소설가들만일은 아니다. ‘그냥’ 살고 싶은 귀찮은 마음과 씨름해서 살아내는 좋은 이야기야말로 내가 받고 싶고 건네고 싶은 가장 적절한 위로가 아닐까. 거실 밖의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며 먼저 간 이들과 함께 사라진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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