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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Apr 23. 2022

<아무튼, 비건>

아는 만큼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학창 시절 형제가 많았던 우리 집에서는 졸업식이나 입학식, 혹은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가족 모두 서오릉에 있는 돼지갈빗집에서 외식을 하곤 했다. 등나무 차양 아래 야외 마당에서 구운 고기와 냉면을 실컷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그날 누가 가장 많은 고기를 먹었는지 순위를 정했는데 나는 8명의 가족 중 3위권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을 만큼 고기를 좋아했다. 또 첫 출산을 앞두고 했던 마지막 식사도 서오릉의 돼지갈비였다.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조언에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서오릉으로 향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작은 체격에 비해 고기를 꽤나 즐기는 편이었고 매 끼니 우리 집 식탁에는 고기 요리가 빠지지 않고 올라갔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소화력이 예전 같지 않고 입맛도 변했는지 고기 먹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어쩌면 잊을만하면 나오곤 했던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에 살처분되는 동물들에 관한 뉴스도 한몫했던 건지 모른다. 아무 죄도 없는 돼지와 닭들이 깊은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되는 영상이 화면에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라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살처분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이 그 작업의 트라우마로 오랫동안 고통받는다는 기사도 이어졌다. 모두 다 고기를 즐기는 세치 혀가 짓는 죄였다. 하지만 그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전에 비해 고기를 덜 먹기는 했어도 여전히 집 근처에는 가족들이 즐겨 찾는 단골 갈빗집이 있었고, 내가 할 줄 아는 고기 요리의 가짓수만 해도 너무 많았다. 아는 것과 먹는 것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은 채 세월은 잘만 흘러갔다.


살면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우연한 일들이 불쑥 일상에 끼어들어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내겐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이 그랬다. 글쓰기 모임에서 한 달에 한번 책과 영화 리뷰를 쓰고 있는데, 이번 달에 내가 사다리 타기에서 뽑은 책이 바로 <아무튼, 비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불교 공부를 하면서 '나와 남이 하나'라는 말이 화두처럼 마음속에 머물렀는데, 이 책을 펼치자마자 다음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은 타자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곧,

'사람답게 사는 삶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라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바로 '동물'을 일컫는다. 작가는 동물을 극단적으로 '타자화'한 대표적인 경우로 공장식 축산업을 들었다. 타자화 반대편에 있는 동물이 바로 반려견과 반려묘이다. 주인들은 좋은 사료에 매일 산책을 시키고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듬뿍 쏟아 돌본다. 아무리 고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애완동물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애완동물이란 '남'이 아닌 '나의' 가족이니까. 그건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로 상품화되기 전의  동물들은 우리에게 철저히 '남'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책에는 공장식 축산업을 통해 우리가 타자화된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동물들의 삶은 삶이 아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밀집사육으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관리자들이 동물을 학대하고 구타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개개인의 폭력성보다 이 대량생산 체제 자체가 인간성을 말살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동물들이 병에 걸릴 확률과 치사율은 높아진다.
이들을 살려두는 것은 항생제 과다 투여뿐이다. 병든 동물들은 방치되거나 산 채로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아무튼, 비건⌋ 김한민/ )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진실'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삶과 관련된 진실은 알아야 할 권리도 있지만 한편으로 어떤 진실은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도 있다 말이다.

 작가는 공장식 축산업의 진실을 외면한 대가로 우리가 치루어야 할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물과 토양이 오염되고 동물들의 탄소배출로 지구 온난화가 빨라지며, 사료를 생산하기 위한 대두 재배로 숲의 면적이 줄어든다는 점, 또 가공육의 발암물질을 섭취하면서 건강이 나빠지일상적 동물 학대로 우리의 양심이 마비된다고.


 한 권의 책을 읽고 비건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그 결심이 지속되는 것은 훨씬 어렵다. 안 먹던 음식을 먹는 것보다 즐겨 먹던 음식을 끊는 것이 더 어렵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이젠 정말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먹을 것이 많은 세상에서 꼭 어린 동물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배를 채웠어야 했나 싶고, 무엇보다 앞으로도 이렇게 알고도 모르는 체 똑같이 살 거냐는 물음에 실천으로 답하고 싶어졌다.

한 번에 완벽해지려는 욕심은 내려놓고 아는 것과 먹는 것의 거리를 조금씩 줄 여자고 목표를 세웠다.


<아무튼, 비건>이 제안하는 '비건 입문' 방법으로는, 고기 없는 주말 보내기, 내 돈 주고 고기 사 먹지 말기, 하루 두 끼 채식을 하는 66% 비건, 해산물은 허용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달걀과 유제품은 허용하는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으로 살기 등이 있다.

일단 나는 페스코 비건으로, 가족들과는 고기 없는 주말 보내기를 시작해보겠다.

아무튼, 시작되어야 계속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에 언급되었던 한승태 작가의 체험집 ⌈고기로 태어나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양계장에서 일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사람은 업보를 믿는 사람이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되돌아올 거라고 믿는 사람들 말이다. 업보를 믿는 사람은 양계장에 발도 들이지 말 일이다.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 시대의 창)


http://aladin.kr/p/MLiHC


http://aladin.kr/p/Q1C4O



관련 영

<Cowspiracy>

https://youtu.be/gEdwBpEVb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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