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쯤 잠이 깼다. 지난주초에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안방에서 5일째자가격리 중이다.
스탠드를 켜고 상체만 일으킨 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머리맡 침대 책꽂이에 꽂힌 시집 한 권을 들었다. 최승자 시집과 나란히 꽂혀있던 황인숙 시집. 손 닿는 대로 폈더니 '노인'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올 들어 부쩍 시력이 나빠져 새벽에 작은 글씨를 읽으려면 눈이 시리다. 번져 보이는 글씨를 읽으려고 눈에 힘을 줘도 글씨는 어른거리기만 한다.
혼자 일어난 새벽에는 모든 소리가 또렷하다. 시계 초침 소리 사이로 가끔 강아지 코 고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책을 펴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노인
75세 이후의 삶이란 인간이 절멸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메리 파이퍼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러운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뚜껑 닫는 소리
슬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곤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를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아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노인을 이렇게 묘사할 수도 있다니. 새벽에 읽고 나서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이나 더 읽어보았다. 시인의 말대로 노인은 여러모로 가진 게 적은 '서민'이다. 싸구려 음식을 사 먹듯이 우울과 외로움과 처량함을 옆에 끼고 생기발랄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누가 썩뚝 베어간 듯 잠이 없어져 뜬 눈으로 혼자 누워있다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기도 할 테지. 기억도 사라지고 욕망도 사라져 생의 흔적만 남아 있는 노인의 몸.
나도 이런 시간을 보내는 날이 오겠지.
다행히 아직은 가끔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농담도 하고 험담도 하고 요가도 하는데. 오늘처럼 이른 새벽에 잠이 깬 날은, 서둘러 '서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