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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r 19. 202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랑을 기억하는 힘

친구의 추천으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게 되었다. 1700년 대 프랑스를 배으로 한  이 작품은 젊은 두 여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하는 퀴어로맨스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작년 겨울 혼자 거실에 앉아 보았던 영화 <윤희에게>가 떠올랐다.

같은 퀴어 무비이지만 동양의 남성 감독의  시선과 서양의 여성 감독의 시선은 겹치기도 했고 다시 나뉘기도 했다.


 <윤희에게>에서 윤희와 쥰의 사랑 육체적 교감이 묘사되지 않아서 스토리만 보자면 평균보다 밀도 높은 우정과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보는 듯했다면,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동성 간의 섹스가 전면적으로 다루어 뿐만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파급력을 볼 때 사랑을 동성애와 이성애로 나누는 일의 의미 없음을 돌아보게 했다.


브르타뉴 지역의 바닷가에 있는 고적한 성, 이곳에백작부인과 딸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 살아가고 있다.

백작부인의 큰 딸은 결혼을 강요하는 집안의 결정을 거부하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던 엘로이즈는 세상을 떠난 언니 대신 결혼의 임무를 지게 된다. 백작부인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정혼자에게 보내기 위해 화가 마리안느를 초청했지만 딸에게는 그녀를 산책 친구로 소개한 뒤 며칠 간 집을 비운다.  


백작부인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복잡한 내면에 공감하게 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몰래 초상화를 완성한 후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로 결심하고 그녀에게 그림을 보여주지만 엘로이즈는 초상화가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며 혹평을 한다. 백작부인에게 호기롭게 초상화를 공개하려 했던 마리안느는 그림을 폐기하고 그녀는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이를 지켜보던 엘로이즈는 어머니에게 마리안느와 함께 초상화를 완성하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두 사람은 모델과 화가로 서로를 바라보며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백작부인이 집을 비우는 사이 숨 막힐 듯 적막했던 저택 안에서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하녀 소피아가 부엌에 모여 요리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 영화에서 백작부인은 여성이지만 딸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집행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작부인이 집을 비운 동안 나머지 세 여성 장작불이 타오르는 부엌에서 사회적 신분과 역할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특히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소피아를 돕기 위해 넓은 들판을 헤매면서 함께 약초를 캐고, 낙태술을 받은 그녀를 간호하는 장면은, 신분을 떠나 약자의 위치에 있던 여성끼리의 연대를 보여주는 뭉클한 장면이다.

백작부인이 돌아오기 전날 밤, 마을의 들판에서 여인들만의 축제가 벌어지는데 군중들 가운데서 타오르던 모닥불의 불씨가 엘로이즈의 드레스 자락에 옮겨붙는다. 마리안느는 불길을 끄지 못한 채 걸음을 옮기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듯 뚫어지게 쳐다본다.


영화는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조명한다.

불꽃같은 사랑을 기억하며 화가로 살아온 마리안느는 살롱전에 출품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헤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은 젊은 시절 엘로이즈가 읽어주던 오르페우스 신화에 자신의 사랑을 덧입혀 그린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출품한 마리안느의 그림 옆에는 익숙한 얼굴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있는 그 여인은 바로 엘로이즈. 그녀의 손에는 마리안느가 그림을 그려주었던 책이 쥐어져 있다.

엘로이즈가 사는 밀라노의 극장을 방문한 마리안느는 반대편 객석에서 비발디의 '여름'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엘로이즈를 바라보며 끝을 맺는다.

이날의 재회는 켜켜이 쌓여가는 세월에도 두 사람의 삶 속에는 영혼을 나누었던 사랑이 각인되어 있고 그 기억으로 앞으로의 삶이 이어질 것을 추측하게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난 후, 처음에는 레즈비언 혹은 게이의 사랑이란 이성애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했다가 점차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게 되었다.

 이성애자인 나는 동성 간의 사랑을 머리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정상적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게으르고 이기적인 판단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 내가 아니라 상대방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듯이, 여자끼리의 사랑은 자기 인생의 무게중심을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둘 수 있는 사람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리라.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하는 진심 어린 마음에 반응할 뿐이다.


'윤희'와 '쥰' 그리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지키려는 것은 자신들의 혼을 알아보고 소통했던 '사랑'이라는 관계의 본질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비워낸 채 스스로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살아남았다. 동성애니, 이성애니 하는 관계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기억을 되살려 지금 여기서 간절하게 그리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최근 60을 앞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30년 넘게 살아도 남편과 너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이제는 그와 무언가를 함께하려는 시도는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요즘은 동성애자들이 이해된다. 이렇게 싸우고 불편하게 지내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음 맞는 여자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게 나은 것 같다"라고 했다.


부부가 아닌 일상적 인간관계에서는 30이 아니라 3년 혹은 3개월이라도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관계를 청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부부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이혼이라는 해법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결혼한 여자들은 자식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고, 자식들이 장성한 이후에는 부모의 이혼이 자식에게 짐이 될까 결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22년 지금 우리에게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을 두고 설전을 벌이는 것보다 진실한 사랑의 경험이 있는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인 듯하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모든 순도 높은 경험은 용기와 지구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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