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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r 03. 2023

왜관수도원에 가다

왜관수도원 피정일기

왜관수도원에 가려고 어제 오후에 고속터미널에서 서대구까지 가는 고속버스를 예약했다. 9시에 전화영어를 마치자마자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점심을 해결할 생각으로 터미널에서 라지 사이즈 커피를 한잔 사서 탑승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햇살이 찬란하게 퍼졌다.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두터운 주름커튼을 쳤는데도 앞뒤 좌석 커튼과 벌어진 틈새로 아랑곳하지 않고 햇빛이 내리 꽂혔다. 어쨌든 좋았다. 요즘은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많은데 왜 혼자 떠나는 여행이 이토록 행복할까 생각해 보았다. 집에 있을 때는 그저 혼자 있을 뿐 머릿속은 집안 일과 관련된 일들로 뒤엉켜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려고 앉았다가도 세탁기 종료음을 들으면 짜증이 났다. 당장 세탁물을 꺼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조만간 해야 하는 자잘한 일들이 널려있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면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신경 쓰면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가 훨씬 중요하다.

서대구역에서 다시 250번 버스를 타고 40분쯤 달려 왜관수도원에 도착했다. 포도넝쿨 장식으로 디자인된 낮은 청동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있고 살짝 경사진 길을 올라가니 대성당을 중심으로 붉은 벽돌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안내소에서 수사님이 주시는 방열쇠를 가지고 숙소로 올라왔다. 내 방은 기도실이 있는 2층 첫 번째 방이었다. 방 안에는 작은 책상과 싱글 침대가 놓여있고 벽에는 나무 십자가가 걸려있었다. 요란스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소박한 방이었지만 이불도 청결하고 방바닥도 깨끗했다.

코트를 벗고 침대에 누워있으니까 우습게도 집안이 이렇게 정돈되어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이렇게 적은 물건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 집도 가능할 것 같았다.

5시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코트를 옷을 챙겨 입고 안내소가 있는 건물 2층 성당으로 갔다.

평일 기도 시간은 아침, 낮, 저녁, 취침 전으로 4번인데 5시가 되니 이곳 수도원 소속 수사님들 약 50여 명이 손을 모으고 줄지어 입장했다. 그리고 30분간 계속 그레고리안 챤트를 부르는데 그 성가가 곧 기도인 셈이었다. 중세시대 때 불렀다는 그레고리안 챤트를 요즘  미사에서도 그 악보대로 보고 사용한다는 게 놀라웠다.

미사가 끝나고 7시가 되자 아까 안내소에서 도와주셨던 키 작은 수사님이 이번엔 식사를 담은 밀차를 가지고 식당으로 들어오셨다. 저녁메뉴는 닭개장에 미나리 무침과 매운 북어무침, 곰피줄기와 초장, 시금치나물이었는데 하나하나 간이 딱 맞고 정갈한 솜씨였다. 숙소에서 받은 인상이 음식에도 마찬가지였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상태.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며 가방에서 짐을 정리했다. 짐이래야 칫솔과 가벼운 속옷, 한라봉 2알과 간 원두, 융필터와 플라스틱 드리퍼가 다였다. (수도원 안에 들어가면 혹시나 커피를 마시지 못할까 싶어 드리퍼까지 챙겼는데 와보니 주변에 카페가 있었다) 책상 위에 한라봉과 원두를 올려두고 나머지는 개켜서 바닥에 두었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마음속에 불편한 구석이 있었는데 방 안에 누워 두어 시간 보내고 나니 걱정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머무는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그냥 산책하고 세끼 밥만 착실히 먹다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천천히 수도원 구석구석을 돌아보아야겠다


대성당 입구와 계단 옆 스테인드 글라스 (수도원내 공방에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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