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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r 05. 2023

'기도하며 일하라

나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묻다

둥글고 커다란 종소리가 새벽잠을 깨웠다. 눈을 떠보니 5시다. 수도사들은 매일 이 시간에 독서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난 어제도 평소처럼 1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어서 새벽기도는 하지 못하고 6시 반에 있는 첫 미사를 보았다. 어제저녁 기도에서 뵈었던 50여 명의 수사님들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입장하면서 미사가 시작되었다. 성경 낭독은 아프리카에서 오신 수사님이 하셨는데 한국어 발음이 아주 정확하셨다.

왜관수도원 대성당

지난여름 이탈리아 여행 중 많은 성당을 방문하면서 놀랐던 것은 성당에 신자가 너무 없다는 점과 아프리카계 신부님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신도수가 급감해 가면서 콧대 높았던 가톨릭 국가들이 과거와는 정반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제들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사 후 이어진 아침식사에는 이곳 수도회 수사님들이 직접 만든 '분도 소시지'가 나왔다. '분도'란 '베네딕토'의 한자어 표기인데 베네딕토 수도원이 처음에는 북한의 덕원면과 중국땅 만주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한자표기를 병행한 듯하다. 분도 소시지는 수도원이 왜관으로 옮겨진 이후 독일에서 파견온 수도사들이 고국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직접 만들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기도하며 일하라(Era eto Labora)'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모토에 따라 이곳 수사님들은 매일 미사와 5번의 기도를 드리면서 각자 재능에 맞는 노동을 한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수도원을 둘러보니 작은 비닐하우스가 여러 고랑 이어진 텃밭도 보이고 규모가 꽤 큰 금속공방과 목공실 건물도 보였다. 실제 우리나라 성당에서 쓰이는 성물과 가구들,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절반 이상이 왜관수도원에서 제작된다고 하니 규모가 상당한 편이다.

수도원이 자립경제로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건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식을 키우는 당당한 부모처럼, 자본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종교의 소임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증표처럼 느껴졌다.

 대성당 입구에는 노란색 배경이 눈길을 끄는 대형 유화가 걸려있는데, 수도원이 북한의 덕원에 있던 시절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38분의 수도사들과 수녀님들의 특색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그림 앞에 서서 한 분 한 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톱과 연장을 들고 있는 분, 밀반죽으로 성체를 만들거나 오르간을 연주하는 분도 보였다. 물자가 넉넉하지 않고 박해를 받던 어려운 시기에도 수도자들은 기도와 매일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박형주 <하느님의 종 덕원의 순교자 38위> 2014.

 70년 전의 그들처럼 왜관수도원의 수도자들도 다르지 않다. 나무를 쪼개어 성당 문을 만들고 유리에 색을 입혀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며 새벽 일찍 일어나 나뭇잎을 쓸고 피정 오는 손님들이 머물 숙소를 정리하고 안내한다. 젊은 나이에 입소해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또 이곳에 머무는 내내,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지 묻고 있었다. 이곳의 수도사들처럼 내가 오랫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일을 생각해 보았다.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시간이 나면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글쓰기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좀 더 잘 쓰려면 좀 더 자주 써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 부족한 재능을 확인하는 괴로움이 쓰는 즐거움을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며칠 전 소설을 쓰는 언니 양이 내게 말했다.

"그냥 루틴을 만드는 거야.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거라니까. 써놓은 거 보면 너무 한심하지. 근데 그래도 해야 되는 거야. 안 그러면 더 이상해지니까."

누군가는 소설이라는 제단에, 또 누군가는 신의 제단에 자신의 하루를 바친다.

나는 나의 하루를 어떤 제단에 바쳐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도 확실한 제단들이 있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을 바칠 제단이 하나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혹시 소중한 제물을 바쳤는데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은 아니지, 스스로에게 실망할까 봐 바칠 수 있는 것의 반의 반만 내놓았던 것은 아닌지 묻는다.


캄캄한 수도원 정원에 마지막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어제처럼 일 년 전처럼 오늘 밤의 마지막 종을 울리며 자신의 하루를 무사히 제단에 바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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