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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Dec 14. 2023

최은선 초대전 <딸의 노래>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슨 노래든 부를 수 있는 딸들의 잔치!!!

며칠 전 선배의 추천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다녀왔다.

대나무를 일렬로 세운 한적한 담 뒤로 서있는 삼층 건물. 바로 <갤러리 아트리에>,

최은선 작가의 전시회 <딸의 노래>가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2023.11.30~2023.12.19/갤러리 아트리에)

갤러리 아트리에(경기도 광주시 목동길 143)

전시장의 육중한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갔더니

강렬한 색깔의 인형들이 벽에 촘촘히 걸려있었다. 전시 작품의 제목은 모두 여성들의 이름이다. 태숙, 선아, 은경, 우영, 옥심 씨, 앨리스......

짐작하듯이 이들은 모두 작가가 살아오면서 만나고 정을 나누어온 '들'의 이름.

오랫동안 헤어져 따로 살아온 엄마와 아는 동생과 언니들, 길에서 스치듯 지나간 어린아이.

최은선 작가는 자신이 듣고 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한땀한땀 꿰매어 인형들을 만들고 <딸의 노래>로 살려 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인형들은 모두 터질 듯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던 엄마와 딸,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나면 혼자 남은 딸을 걱정하는 숙모와 그녀를 안심시키는 조카딸. 또 흥이 나면 아무 때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는 할머니, 엄마에게만 자신이 딸임을 커밍아웃하지 못한 채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오사카의 '앨리스'까지.

아마도 이들 옆에 나란히 걸릴 이름들은 계속 이어지리라.

최은선 작가가 만든 인형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뾰족한 발과 거대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런 '거두첨족(巨頭 尖足) ' 형태가 상징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가정폭력 상대적인 저임금, 비혼과 불안한 노후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현실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란 예나 지금이나 숨이 차오르는 일이다.

송곳 끝처럼 뾰족한 발은 이들이 온전히 발을 내딛고 살아가기 만만치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화려한 머리형태는 녹록지 않은 이곳뛰어넘어 그녀들이 꿈꾸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최은선은 각 작품마다 일기 형태의 글을 붙여두었다. 날짜와 날씨까지 적힌 이 글들은 이 '딸'들이 이처럼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고 환한 표정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니 '태숙'과 '옥심 씨'와 '지영', 그리고 오사카의 '앨리스'를 만나기 전에 반드시 이 일기를 읽기를 권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홍진숙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무 살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봐왔던 나는 그녀의 작업들도 계속 봐왔다.(...)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데 터져 나오지도 못해 기괴하고 검게 응축되어 나오던 엄마 인형들.(...)
그 사이의 엄청난 갭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한점 한점 작품 앞을 지나가다 보면, 이렇게 눈부신 옷을 차려입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까지 이 '딸'들이 통과해 온 시간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실눈을 크게 뜨고 성큼 걸어 나갈 앞으로의 시간들도 그려보게 된다. 이들의 머리 위로 이미 와 있는 시간들, 실타래처럼 엉켜있지만 그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이 제각기 아름다울 시간들임에 틀림없다.



 <딸들의 노래> 총 18점

(2023.11.30~2023.12.19/갤러리 아트리에)


-작가의 말 (최은선)


10여 년 전, 나는 엄마의 삶을 인형으로 만들어 첫 전시를 했다. 하나 정작 엄마는 아빠에게 매 맞던 과거를 드러내길 원치 않았고, 내가 바치는 찬가에 감격한 엄마를 바랐던 나는 몹시 화가 나 착한 딸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 후, 자식 두고 이혼한 죄를 지었다며 내 앞에서 쪼그라드는 엄마에게 짜증을 있는 대로 퍼붓고 부러 엄마가 아플 곳을 찔러대며 마음껏 화를 쏟아냈다. 같이 산 시간보다 떨어져 산 시간이 길었던 우리 사이엔 이내 골이 생겼고 엄마는 오사카에서, 나는 서울에서 그냥 각자의 삶을 살았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서로 처음부터 없었던 곡처럼 소식도 끊고 관심도 끊은 채 지냈다..(중략)

맨날 발끝만 쳐다보고 버티듯 걷느라 숙어진 고를 들어보니 그제야 보이고 들렸다. 계속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던, 모두 딸인 엄마들과 언니들.

순천에 와 이른 첫 봄, 내 생일 아침에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에는 내 생일마다 엄마가 전화 하나 안 하나 벼르기만 했는데. 참 바보...

마흔둘 생일 아침, 수화기 너머 오사카에서 엄마가 울다가 웃었다.

 

-2023년 1월 7일 비 온다.

<딸의 노래>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 다음번에 태어나면 내가 엄마 낳아줄게. 그땐 외할머니 대신 내가 엄마 엄청 예뻐해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마흔둘 생일 아침, 수화기 너머 오사카에서 엄마는 웃고 웃었다.


- 2019년 1월 21일 월요일 날씨 맑다.

<앨리스>

"お母さんだけ知らないって, 他の人はみんな知ってるのに."

"일본 말 모른다니까."

짜증 내는 내게 테이블을 치우던 엄마가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자기 엄마만 모른대."

"뭘?"

"뭐긴. 자기가 여자라는 걸 자기 엄마만 모른다고. 술 취하면 꼭 울어."

앨리스는 커디란 어깨를 들썩이며 내게 기대 울었다.

나는 내 딸인 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낮에는 아들 밤에는 딸로 엄마를 위해 애쓰는 앨리스네 엄마가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아주 길 바라며 기도했다.


-2013년 날짜 모른다. 날씨 모른다.

<앨리스의 문>

내 그림만 해봐야지 싶다가도 이대로 아무도 날 찾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에 보드카 회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응모하려 시작한 작업에서 내 그림의 길을 찾았다. 마시면 손보다 작게 줄어들기도 하고 집보다 커지기도 하는 술이, 앨리스가 마시는 물약이자 다른 세계로 가는 문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딸인걸 엄마만 모른다며 울던 오사카의 앨리스가 생각났다. 그녀가 잘 지내길 바란다.

덧붙여 결과는 낙방.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싱관 없었다. 내게 지도가 생겼으니.

- 2021년 8월 2일 월요일 날씨 비 온다.


<영남>

"남들처럼 좋은 신랑 만나 아이 낳고 했어도 잘 살았을 거야. 나 가고 나면 혼자 어째."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숙모는 참. 순천 와서 내 옆집 살면 되지."

"그게 그게 아냐."

꽃같이 예쁘고 마음씨 고운 딸이 혼자라 안쓰러운 영남 씨는 한숨을 내보냈다.

창밖을 바라보는 영남 씨의 눈 끝에 새색시 같이 고운 언니가 곱게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2022년 2월 9일 날씨 몹시 춥다.


<은경>

"은경아!"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한 아이가 넘어져 울려던 참이었다.

딸을 낳게 된다면 이름을 은경이라 짓고 싶었던 나는, 스물넷 여름 낳아주지 못한 아이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이를 일으켜주며 웃었다. 아이는 울지 않고 나를 쳐다보다 이내 제 엄마에게 뛰어갔다. 은경이는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이구나. 다행이다.

-2021년 5월 5일 날씨 구름 조금


<현아>

"엄마는 어떤 할머니가 됐을까? 내가 엄마 떠난 나이 돼 가니까 더 궁금해. 할머니가 된 엄마는 본 적이 없어서."

붉어진 눈에 눈물이 고인 현아언니가 말했다.

평소 심지 굳어 잔잔한 바다 위 돌섬 같던 언니가 순간 파도가 덮친 듯 그리움에 잠겨 정수리 끝만 보였다. 언니의 옆자리에 든 볕이 따뜻하게 웃는 것 같았다.

현아 언니. 언니가 우니까 엄마가 왔어.

엄마는 어디에서든 언제든 온다. 무엇으로든.

-2022년 6월 22일 날씨 맑았다.


<지영>

"엄마는 아들 밖에 몰라. 아들이 뜯어가기나 했지 뭐 해준 거 있다고. 나한테는 맨날 없다는 소리나 하고. 이혼한 게 죄야! 엄마는 꼭 어릴 때부터 나한테만 그런다니까."

엄마랑 싸운 날은 날 찾아 분을 쏟아내며 생맥주를 들이켜곤 집에 갈 땐, 지 엄마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를 꼭 사간다. 혼자 아이 키우며 옆집 사는 엄마와 매일 옥신각신하지만, 누구보다 씩씩한 딸 지영.

지영이네 엄마가 부러웠다.

-2017년 12월 2일 날씨 춥다.





<다른 듯 닮은, 언니와 나>

언니와 나는 엄마도 아빠도 다르지만 한 배에 나온 쌍둥이 마냥 이어져있다. 혈육이라 하면 모두 살짝 놀라워할 만큼 얼핏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우리지만, 친탁을 한 언니와 외탁을 한 나는 들여다볼수록 닮아 우리 사이 거울이 있나 싶을 때가 많다. 종일 언니와 동천을 걸으며 참 다행이다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2022. 4.8. 금요일 날씨 맑다.


<태숙>

내가 마흔여섯 살이 된 오늘, 엄마는 암도 뇌출혈도 코로나도 걷어차며 일어나 이제 정말 누구도 무엇도 잡지 못할 슈퍼 원더가 되어 여전히 오사카에서 작은 술집의 마마로 웃으며 살고 있다.

-2022년 6월 26일 날씨 많이 흐리다.


<옥심의 춤>

어렸을 때, 춤을 배웠다며 갑자기 슬며시 일어나 손끝을 모아 살랑이는 옥심 씨 때문에 나는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 쫌!" 하며 옥심 씨를 붙잡아 앉히며 느꼈다. 딸 같다. 흥 부자 딸. 나는 나보다 서른 살 많은 옥심 씨에 반해 엄마와는 또 다른 모양의 사랑을 배우고 있다.

-2021년 3월 13일 날씨 구름 조금


<옥심>

"엄마가 날 많이 예뻐하진 않았어."

칠십 네 살이 된 옥심 씨는 앞마당 자기만의 숲에 물을 주며 어린애처럼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흥이 나면 벌떡 일어나 덩실대고 혼자서 외로우면 내게 노래라도 부르라던 기운 찬 옥심 씨가 엄지손가락만 하게 작아져 보여 안쓰러웠다. 다음번엔 옥심 씨도 낳아줘야지 싶었다.

2021년 5월 8일 날씨 맑았다.


<미영>

"나한테는 딸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글이 엉엉 울고 있었다. 인형처럼 뽀얗고 방글방글 잘 웃는 미영이가 주먹 같은 눈물을 뚝뚝. 아이가 아팠던 나는 동천을 걷다 그 자리에 서 울었다. 미영이가 울면 아프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속이 상한다. 나는 나 대신 커피를 보냈다.

아프지 마. 미영.

2021.9. 날짜 모른다 날씨 모른다.


<우영>

"나는 엄마 딸이 아닌가 봐. 아빠가 밖에서 낳아온 딸이라서 그런 거면 이해라도 될 텐데."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섬에 사는 할머니 손에 자란 우영이는 종종 상한 마음을 푸념으로 달랜다. 그래도 설움에 지지 않고 고양이들을 거두고 바다 쓰레기를 줍고 텃밭에 갖은 푸성귀를 심어 나눠 주위를 돌본다. 엄마보다 엄마 같았던 외할머니의 손에 잘 자란 우영이가 설움에 지지 않고 평화를 지키길 기도한다.

-2021년 10월 17일 날씨 맑다.


<선아>

"엄마가 저렇게 곱고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놀란 기색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이고 꾸벅 안사를 했다. 누구보다 씩씩하고 유쾌하고 호쾌했던 선아언니는 아름다운 엄마 앞에 무뚝뚝한 아이처럼 별말 없이 평소 같지 않은  미소로 불편해했다. 먹는 듯 마는 듯 라면을 먹고 일어났다. 그 뒤로 그날 왜 그랬는지 묻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오랜만에 들은, 잘 지낸다는 안부에 그날의 모습이 기억난 건 왜일까. 듣지 못한 그 아이의 속내가 마음에 걸린 걸까. 마음이 쓰인다.

-2022년 4월 3일 날씨 걸으니 조금 덥다.


<딸의 숨_01>
<딸의 숨_02>

작업의 바탕에 그림을 세로로 나눠 절반만 그림을 입힌 상태.

천연 광목으로 만든 그림을 입히지 않은 절반과 숨을 불어넣어 그림이 입혀진 절반의 과정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태숙의 춤>

다섯 살 때, 아빠를 피해 속옷만 걸치고 도망치는 엄마를 본 기억이 있다. 텔레비전 속 치타처럼 뛰어가는 엄마를 커다란 달이 따랐다. 그대로 날아올라 멀리 도망쳐 매 맞지 않고 살았으면 싶었다.

열다섯 살 때, 다시 만난 엄마는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로 날아가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마마가 되어 돌아왔다. 시한부 삼 개월 암환자가 되어.

-2021년 8월 27일 날씨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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