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 한 발, 기다림 한 점

잠봉 한 접시, 와인 한 잔

by 파리누나



- 정말 나 진이 다 빠졌어, 저녁 먹고 들어가자.

악명 높은 프랑스 경시청에서 한바탕 체류증 문제로 오후를 보내고 온 나는, 그야말로 짜증이 이백 프로까지 올랐다.

날씨마저 더워서 위장은 꼬르륵꼬르륵 비었음에도 입이 쓰다.

재택근무를 종료하고 출퇴근하는 애인의 퇴근을 조금 기다리다가 그의 회사 앞에서 만났다.

안 되는 불어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는지 경시청에서의 일을 토해내듯이 징징거려본다.


-그럼 파리에서 저녁 먹고 들어갈래? 시내 중심 쪽으로 갈까?


요새 일이 많아 바쁨에도, 내 언짢음을 풀어주고자 맛있는 걸로 달래 보려 하는 애인.


-갔다 돌아와야 하잖아, 이 근처에 뭐 없어?


몇 군데 검색했지만 아직 이른 저녁이라 대부분 체인점 식당이나 패스트푸드뿐. 패스트푸드를 거의 안 먹는 나이기 때문에, 일단 집 근처로 가기로 합의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가는 길에 계속 스마트폰을 붙잡고 여기저기 맛집을 검색해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다.


-후, 너 먹고 싶은 걸로 먹어. 나는 입맛이 안 돌아서 뭐가 먹고 싶은지 모르겠네.


-음 나는 일식이 좀 당기는데, 괜찮아?


별로 안 당겼지만 내가 애인더러 고르라고 했으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데 막상 식당에 도착해 메뉴를 보니, 애인이 먹으려고 했던 냉메밀이 없다. 날씨가 더워 시원한 걸 먹으려 했던 건데 마땅한 게 안 뵌다.


-프랑스인들은 찬 국수를 잘 안 먹나?

-여기 옆 집 내가 가보고 싶던 프렌치 식당, 메뉴 한 번 보자.


너보고 고르라고 했지만 나는 또 내가 예전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식당이 보이자 그를 끌고 갔다. 말만 ‘한 번 볼까’였지 사실, 여기가 좋다, 는 무언의 제스쳐였음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선택을 내게 양보한다.


그런데 아직 저녁 식사 메뉴는 한 시간 여 뒤에나 가능하고 전식과 음료만 먹을 수 있단다. 급 허기가 밀려와 빨리 밥을 먹고 싶으면서도 패스트푸드로 때우기는 싫고, 앞에 서서 한참 고민했다.

나는 매사에 우유부단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다. 그는 또 기다렸다.

-아니면 그냥 집에 가자, 스트레스 풀리게 내가 매콤한 제육볶음 해줄게.

-으으음...


야외석에서 향긋한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을 보니 와인도 먹고 싶어 졌다. 십 여분의 고민을 끝내고 착석했다. 애인이 저도 모르게 내쉰 짧은 숨이 들린 것 같다.



고소한 갈색 바게트 빵 한 바구니와 나오는 잠봉 한 접시와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살짝 가벼운 레드와인이 짭조름하고 기름진 잠봉을 올린 버터 바른 빵에 잘 어울렸다.

전식은 불평할 만한 것 없이 좋았으나,

우리의 대화는 언제부터인지 끊어져있었다.


말없이 빵만 뜯고 와인만 홀짝이고 있으니 열심히 식당과 메뉴를 고른 게 부질없다.

양보하는 척 결국 나 하고 싶은 대로 한 것 같아 괜히 찔리기도 하고, 그 와중에 맛은 있어서 자꾸 먹고 있으니 참으로 인간스럽다.


유일하게 차가운 메인 메뉴였던 육회와 비슷한 소고기 타르타르를 먹은 그는 이튿날 배탈이 심하게 났다.


왜 내 탓인 것만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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