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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Jul 12. 2021

양보 한 발, 기다림 한 점

잠봉 한 접시, 와인 한 잔



- 정말 나 진이  빠졌어, 저녁 먹고 들어가자.

 

악명 높은 프랑스 경시청에서 한바탕 체류증 문제로 오후를 보내고 온 나는, 그야말로 짜증이 이백 프로까지 올랐다.

날씨마저 더워서 위장은 꼬르륵꼬르륵 비었음에도 입이 쓰다.

재택근무를 종료하고 출퇴근하는 애인의 퇴근을 조금 기다리다가 그의 회사 앞에서 만났다.

 되는 불어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는지 경시청에서의 일을 토해내듯이 징징거려본다.


-그럼 파리에서 저녁 먹고 들어갈래? 시내 중심 쪽으로 갈까?


요새 일이 많아 바쁨에도,  언짢음을 풀어주고자 맛있는 걸로 달래 보려 하는 애인.


-갔다 돌아와야 하잖아, 이 근처에 뭐 없어?


 군데 검색했지만 아직 이른 저녁이라 대부분 체인점 식당이나 패스트푸드뿐. 패스트푸드를 거의 안 먹는 나이기 때문에, 일단  근처로 가기로 합의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가는 길에 계속 스마트폰을 붙잡고 여기저기 맛집을 검색해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다.


-후,  먹고 싶은 걸로 먹어. 나는 입맛이  돌아서 뭐가 먹고 싶은지 모르겠네.


-음 나는 일식이 좀 당기는데, 괜찮아?


별로 안 당겼지만 내가 애인더러 고르라고 했으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데 막상 식당에 도착해 메뉴를 보니, 애인이 먹으려고 했던 냉메밀이 없다. 날씨가 더워 시원한  먹으려 했던 건데 마땅한 게 안 뵌다.


-프랑스인들은 찬 국수를 잘 안 먹나?

-여기 옆 집 내가 가보고 싶던 프렌치 식당, 메뉴 한 번 보자.


너보고 고르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예전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식당이 보이자 그를 끌고 갔다. 말만 ‘한 번 볼까’였지 사실, 여기가 좋다, 는 무언의 제스쳐였음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선택을 내게 양보한다.


그런데 아직 저녁 식사 메뉴는  시간  뒤에나 가능하고 전식과 음료만 먹을  있단다.  허기가 밀려와 빨리 밥을 먹고 싶으면서도 패스트푸드로 때우기는 싫고, 앞에 서서 한참 고민했다.

나는 매사에 우유부단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다. 그는  기다렸다.

 

-아니면 그냥 집에 가자, 스트레스 풀리게 내가 매콤한 제육볶음 해줄게.

-으으음...


야외석에서 향긋한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을 보니 와인도 먹고 싶어 졌다. 십 여분의 고민을 끝내고 착석했다. 애인이 저도 모르게 내쉰 짧은 숨이 들린 것 같다.



고소한 갈색 바게트 빵 한 바구니와 나오는 잠봉 한 접시와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살짝 가벼운 레드와인이 짭조름하고 기름진 잠봉을 올린 버터 바른 빵에 잘 어울렸다.

전식은 불평할 만한 것 없이 좋았으나,

우리의 대화는 언제부터인지 끊어져있었다.


말없이 빵만 뜯고 와인만 홀짝이고 있으니 열심히 식당과 메뉴를 고른 게 부질없다.

양보하는 척 결국 나 하고 싶은 대로 한 것 같아 괜히 찔리기도 하고, 그 와중에 맛은 있어서 자꾸 먹고 있으니 참으로 인간스럽다.


유일하게 차가운 메인 메뉴였던 육회와 비슷한 소고기 타르타르를 먹은 그는 이튿날 배탈이 심하게 났다.


왜 내 탓인 것만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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