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누나 May 08. 2022

내 치즈는 누가 만들었을까

치즈 클래스


치즈 만들어보려고 거기까지 간다고?

 

 영국 런던에서 한참 북쪽의 맨체스터를 지나 굽이굽이 기차를 두 번 갈아타면 도착하는 작은 마을이 있다. '작은 아씨들'이나 '오만과 편견'이 어떤 배경에서 쓰였는지 상상해본다면 떠올릴 영국 시골 풍경이라면 좋을까. 그때쯤부터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은 장소.

 비행기와 기차 도합 열 시간이 조금 넘은 여정 끝에 돌돌돌, 작은 캐리어를 가지고 내린 기차역에는 역무원과 나 둘 뿐이었다. 예약해둔 숙소 쪽으로 가는 대중교통이 하나도 없었다. 해가 떠 있을 때 도착하길 천만다행이다 싶다. 버스나 지하철 대신 길 양 옆으로 핀 갖가지 꽃나무가 나를 인도했다.

 기껏해야 3층짜리가 가장 높은 집이 주르륵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데, 번호키가 달린 집은 없어 보인다. 집주인으로부터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건네받아 들어선 소담한 2층 주택. 내 허리만큼 오는 높은 침대가 의외로 포근했고, 이내 내리는 이슬비가 통창에 음표처럼 맺혔다. 

 나는 젖소에서 갓 짠 우유로 만드는 치즈를 만들고자 여행을 떠나왔다. 


  잘 몰라도 맛도 모르는 건 아니라며, 치즈를 알게 된 후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치즈를 만드는 클래스를 검색하며 프로그램을 구경하는 게 취미가 될 만큼. 기어코는 단기 수업을 찾아 가보기로 결심했다. 클릭에 클릭으로 처음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서치  끝에 눈에 들어온 이 학교는 반드시 수강 목적이 아닌 여행만으로 값어치 할만해 보였다. 저렴한 비용은 아니었지만 홈페이지에서 본 그곳의 풍경이 자꾸만 어른어른했다.

 오래된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로 해리포터에나 나올 법한 마법의 성 같은 학교다. 숙소에서 걸어가기엔 다소 멀고 인도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는데, 친절하게도 숙소 주인 분이 아침 일찍 운전해 데려다주셨다. 이튿날도, 그다음 날까지 3일 수업 내내. 본인은 토박이인데도 이런 학교가 있는지 몰랐다며 수강하러 한 번 가야겠다면서.

 일찌감치 도착한 첫날, 이웃 목장에서 새벽에 짠 신선한 우유를 싣고 온 치즈 마스터가 들어섰다. 턱수염이 단정한 선생님은 단호하면서 차분한 인상이다. 스위스,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다른 도시에서 온 열 명 가량의 수강생으로 채워진 교실은 어색하면서 즐겁다.


 치즈를 만드는 과정은 요리라기보다 차라리 과학 아니 화학 수업에 가까웠다. 귀에 잘 안 들어오는 맨체스터 지방 억양이 섞인 영국 영어로 듣는 화학 수업, 절반은 배경음악처럼 흘렀다. 전부 알아듣지 못하는 부족한 영어가 아쉬울 뿐이고 '다시 듣기'도 못하고 흘러가니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비릿함이 가시지 않은 우유가 단계별로 치즈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니 생경하지만 무엇보다 생생하다. 

 치즈 자체도 좋았지만 학교에서 준비하는 점심시간이 하이라이트. 수제 요구르트에 당일 만든 버터, 갓 구운 빵에 마을에서 수확하는 제철 재료로 조리한 갖가지 샐러드, 오븐구이 양고기,  수프까지 여기가 천국인가! 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정규 코스 몇 개월을 등록하고 싶을 만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다이어트, 명상, 디톡스 등의 단어가 필요하지 않다. 


 마스터의 지도 아래 만든 치즈를 한 보따리씩 챙기고 인사를 나누던 수업 마지막 날, 스위스에서 온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런던 공항으로 운전해 간다는 그는 내가 돌아갈 먼 길을 짐작하고 물어봐준 것이었다. 짐도 늘어난 참에 나는 더 거절하지 않고 보조석에 냉큼 올라 세 시간 반 내비게이션을 하겠다고 천연덕스레 웃었다. 낯선 영국 땅이라 그 역할도 결국 제대로 못했지만, 적어도 운전하는 이가 졸지 않게 열심히 말을 붙이기는 했으니 조금은 덜 지루했으리라 믿어본다. 덕분에 본 적 없이 아름다운 영국 시골 풍광을 한껏 만끽하며 편안하고 안전하게 런던에 도착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이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친절까지 받아먹으니 묵직한 가방보다 꽈악 차는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났을까, 메일함에는 학교에서 점심을 만들어주던 선생님의 메일 한 통이 반갑게 들어있다. 내가 요리에 큰 관심을 보이자 선생님이 몇 가지 추천할 만한 요리 코스와 서적을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셨는데, 허튼 말씀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또 와서 함께 하면 좋겠다는 말로 끝맺은 글. 영국 정통 수프들을 끓이기 시작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신다는 그분의 맛있는 요리 냄새가 떠오르는 기분이다.


 먹을 것을 두고 만나게 된 사람들 사이에는 국적을 막론하고 느낄 수 있는 맛이 있기 마련이다. 치즈가 쿰쿰하게 숙성이 되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은 더 깊이 사귀어도 좋을 사람들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소주랑 바꾸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