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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r 04. 2024

구십 이일. 길들여진다는 것

미나리 낙지솥밥


솥밥은 사실 전혀 어렵지 않다. 무쇠솥이 무겁고 세척이 귀찮을 뿐.

마땅한 메인 반찬이 없을 때 하는 게 솥밥인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한 솥밥의 뚜껑을

짠, 열면 재료가 무엇이든 밥상이 한 단계 근사해지는 마법이 펼쳐진다.

같은 레시피로 해도 전기밥솥에서 한 그릇 먹을 것을 솥밥이면 두 그릇 먹게 되는 마법.


일주일 태교여행으로 일본에서 달짝지근하고 기름기 많은 요리들을 먹다가 돌아온 저녁,

산뜻하게 낙지 한 마리에 무를 깔고, 미나리 숭숭 썰어 넣어 간장양념 쓰윽쓰윽 비벼 먹었다.

일본에서 먹은 것들보다 훨씬 맛있다며 넉넉하게 지은 밥을 한 솥 다 비워낸 남편.

“역시 마누리 밥이야!”


이제 결혼한 지 일 년이 된 우리 부부.

외식과 배달보다는 내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한 사람이 나의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것이 새삼스레 묘하게 다가왔다.

남을 위해 요리를 해봤어도 그것들은 보통 내가 평상시 먹는 것들과는 달라지기 마련인데,

남편은 그리고 곧 세상에 나올 아이는 거의 전적으로 내 입맛을 거친 음식으로 길들여질 테다.

요리를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궁극적으로는 균형 잡힌 맛있는 요리들을 해내야 한다는 것,

각종 조미료로 부족함을 감추고 싶지 않은 것이 내 가족의 식사 아니겠는가.

이들이 앞으로 원하고 필요하며 또 추억하게 될 맛을 만들어낸다는 모종의 자그마한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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