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누나 Mar 15. 2024

팔십 일일. 음미를 부탁해

당근 파이


 “오늘 정말 봄 같다. 그냥 들어가기는 너무 아쉬운걸! “


출근을 조금 늦게 한 신랑과 오랜만에 브런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자니, 따사로운 햇살이 창밖에서부터 밀려들어왔다.

곧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십 분도 안 걸려 마셨고,

그를 먼저 보내고 나는 혼자 남아 디카페인 커피를 마저 천천히 마셨다.


밖에 나서니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입고 온 패딩이 무색하게 바람도 찬 기운이 많이 가셨다.

바다를 옆에 끼고 난 산책로를 따라 기분 좋게 뱃속 아이를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임산부 배지가 없어도 아가가 그 안에 있구나 누구나 알아볼 만큼 배가 솟아,

비교적 얇은 상의를 입었더니 단추를 잠그지 않은 패딩 사이로 배가 빼꼼하다.

줄줄이 늘어선 나무 가지가지마다 꽃봉오리도 솟아나고 있다.


봄을 맞이한 살랑이는 마음에 오늘은 고소하고 달콤한 베이킹이 하고 싶어진 날이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머릿속에서 꺼내가며 뭘 만들지 고민하며 걷다가, 묶음으로 사두고 친정 다녀오느라 많이 남은 당근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요리책에서 본 레시피이기도 하다.


당근만큼 익혔을 때 단 맛이 나는 채소도 많지 않다. 제철이면 ‘설탕 당근’이라고 부르기도 하니 말이다.

원래 레시피의 피칸 대신 내가 좋아하는 헤이즐넛을 분쇄해 파이 크러스트를 만들고,

캐러멜 소스를 만들어 전부 당근 필링과 섞는 대신 삼분의 일쯤을 파이지 위에 먼저 발랐다.

그리고 찐 당근을 캐러멜과 생크림, 달걀을 블렌딩해 곱게 내려 파이지 위에 부어 오븐에서 한 시간.


오, 생각보다 이거 괜찮은데.

설탕이 반 컵도 안 들어갔는데 달달한 게, 은은한 단 맛에 아가도 춤춘다.

캐러멜 소스를 샌드 한 것이 보기도 좋고 향도 한 층 더 느껴진다.

당근 싫어하는 아이들도 당근인 줄도 모르고 먹을 만하겠다.

혼자 뿌듯해하며 한 조각을 열두 번쯤 나눠먹었다.


퇴근한 남편한테 한 조각 잘라주면서 반응을 기다렸다.

서너 입으로 한 조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있어서 빨리 먹은 거야? 근데 맛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빠른데…”


“특이하네. 나쁘지 않아.”


낮에 브런치 먹을 때도 국밥 말아먹듯이 버섯 수프를 해치우고, 피자를 접어 올려 뚝딱 먹길래 한 소리 했건만.

입맛 까다롭게 안 굴어 편하지만 이럴 때는 만든 수고가 허무하기도 하단 말이다.

그래,

우리 아가도 아빠처럼 불평 없이 잘 먹어주기만 하자.



작가의 이전글 팔십 이일. 결혼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