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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Apr 30. 2024

삼십팔일. 아쿠아우먼

감자수프


어제까지만 해도 여름이 봄을 밀쳐낸 듯 더운 날이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려 아침에 일어나니 공기가 서늘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맞이하는 아침은, 출근을 하지 않는 나에게는 차분해지는 싫지 않은 날이다.

대파 흰 대와 양파를 버터에 볶다가 햇감자를 넣고 절반쯤 익히다가, 물과 우유, 생크림 약간 그리고 월계수잎을 넣고 한소끔 끓인다.

감자가 다 익으면 월계수잎을 꺼내 블렌더로 곱게 갈아 조금 더 끓여 농도를 맞추고 소금, 치즈로 간을 하면 어렵지 않게 홈메이드 감자수프가 완성이다. 파슬리 약간과 후춧가루로 마무리하고 통밀빵 한쪽을 구워내 곁들였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따뜻한 감자수프 한 그릇은 식사보다 여유고 위로다.


비가 와서 습한 날이면 나는 더 습해진다.

다름 아닌 다한증 때문이다. 긴장하는 상황에서 더 심한 증상이 나타나지만, 평소에도 물리적 자극이 있거나 이렇게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학생 때는 쉽게 젖는 교복 입는 것이 불편했고, 시험 때 갱지가 젖기 때문에 교복 치마에 열 번 스무 번 손을 닦아가며 시험을 치렀다. 성인이 되었을 때는 연인의 손을 잡는 것이 두려웠고, 면접 때 땀이 나면 이 자체로 더 긴장이 되곤 했다. 발에도 마찬가지 땀이 차기 때문에 여름에는 샌들, 겨울에는 부츠를 신기 어렵다.

지금에야 이러한 것들은 조금 불편한 정도로 살아가지만 어릴 때는 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한의원도 여럿 가보고 수술도 생각했지만 부작용이 심하다 하여 결국 난대로 살고 있다. 시험 등 긴장할 일이 있으면 손수건을 챙기고, 샌들은 앞으로 미끄러지지 않는 낮고 튼튼한 것으로 겨울 부츠는 양말 두 개를 덧신기도 한다. 땀이 나는 내 손이 싫어서 손을 안 잡는 연인은 하나도 없었다, 하하. 내가 내 병을 너무 크게만 생각했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여기며 숨기기에 바빴던 어린 날들.


남편은 또 ‘아쿠아우먼’이 되었냐며 손부채질을 해준다.(그 정도로 마를 땀이 아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증상은 아니라 아가에게 유전은 안 되길 무척 바라고는 있다. 이것 말고도 이겨내야 할 무수한 허들이 있을 텐데.

혼자 힘들었던 십 대를 무사히 지나온 나에게는 위로를 건네며 빗물에 땀도 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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