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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r 26. 2020

자신의 생일상을 차린다는 것

셀프 김밥



자신의 생일날 상을 차려본 적 있나요?

미역국을 제외하고, 한 가지 메인 요리를 골라야 한다면 어떤 걸 하시겠습니까.


코로나 19 사태로 모든 이의 일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요즘.

일상의 소중함을 운운하는 것마저 지겨운 소리가 되어버렸다.

프랑스 이동제한령이 떨어지자마자 맞이하게 된 내 생일도 그렇다.

'생일, 이제 뭐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안쓰러운 목소리의 엄마한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넘겼지만,

막상 덩그러니 계획도 없이 앉아 있자니, 분풀이할 상대가 없는 데서 오는 화가 약간 인다.

파리까지 와서 이렇게 조용히 보내야 한다니.


하지만 화를 내기에는 더 억울한, 내 생일이다.

그나마 여기저기에서 오는 축하 메시지들을 읽으며 서러움을 달래고

나를 위한 식사를 해야 한다는, 하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그리고 삐이이이...

신호불량으로 잠시 정지화면이 된 것 같은 머릿속에 당황했다.

일단은 내가 내 손으로 내 생일 상차림을 준비한 적 없는 것 같다는 사실,

두 번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뭘까라는 질문에도 오래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


좋아하는 게 워낙 많아서야,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나 꼽는 게 어려운 건 좀 아니지 않아?

또 작은 성질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메뉴는 냉장고에 있는 걸로 소박하게 해물파전과 김밥을 준비하기로 한다.

프랑스인 것은 티 내려고 치즈 조금과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약간의 특별한 상차림이라는 것도 티 내려고 다양한 색감을 표시하고자 셀프 김밥으로 재료를 다 까발린다.

볶은 당근, 절인 오이, 노른자를 잘 살린 삶을 달걀, 데친 브로콜리, 레드와인 식초로 끓여낸 양파, 그리고 직화에 구워 살을 발라낸 가지까지.

 지지고 볶다 보니 성질이 가라앉고, 완성된 식탁을 보니 그럴듯해 보인다.

와인 한 모금,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에 어깨도 으쓱으쓱 올라가네.

이내 아쉬움은 잊고 룸메이트 언니와 끝없는 이야기꽃을 피우며 와인을 비웠다.


그래도 

잠들기 전에 다시 생각해보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갈비찜, 팥칼국수, 순댓국, 떡볶이, 고등어찌개, 회덮밥, 늙은 호박 부침, 꽃게탕, 

하와이안 포케, 리코타 치즈 넣은 라비올리, 단호박 리조또, 고구마 피자, 코코넛커리,

파인애플 파이, 당근케이크, 단팥빵, 맘모스빵, 시루떡, 쑥인절미, 강냉이....

그래 나는, 박애주의자야.

매일을 생일처럼.


주의: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맛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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