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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Jun 29. 2020

실패에 실패해온 순간들

실패가 두려운가, 두려움이 두려운가

 상장 모아둔 것을 펼쳐보니 부반장 임명장이 수두룩하다. 친구가 나를 반장으로 추천할라치면 나는 곧바로 사퇴 선언을 했다. 그리고 부반장을 택했다. 반장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이 원하면 부반장이 되었는데, 자존심에 그런 식으로 부반장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부반장 후보를 택했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반 친구들은 내 책상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답을 알려주었고, 이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나는 선생님 침을 맞을 만큼 가장 맨 앞자리에 앉아 빽빽한 필기를 하는 모범생이었다. 디지털 기기가 생활이 된 지금 같았더라면 나는 아마 수업을 모조리 녹음했을 거다.     

 고등학교 입시 원서를 쓰는 날이 다가오던 중3의 여름. 나보다 항상 두 세 자리 아래 등수를 차지하던 친구가 외고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 ‘나도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지원했다가 떨어지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괜찮은 일반고에 지원해서 마음 편히 일등 하는 게 나아.’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일반고에 진학했다. 대학교 지원할 때 즈음엔, 내신 97점에 결석 하나 없는 ‘깨끗한’ 생활기록부를 만들었다. 서울에 있는 소위 명문대 여럿 지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받아서 답안을 적는 논술에 약했고, 들쑥날쑥한 모의고사 점수로 수능에도 자신 없었다. 해서 수시 지원으로 몰아붙여, 내신 성적을 가장 많이 보는 대학교 한 군데에 합격했다. 가장 ‘안전한’ 지원이었던 학교 딱 하나. 다음 해에 수능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두려웠다. 일 년 더 공부했는데 더 만족하지 못할 학교로 가게 되면 어쩌나, 실패할 일을 아예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스무 살 언저리의 젊은 청춘의 대학생활은 말할 것 없이 즐거웠다. 그래서 후회 같은 건 없다, 고 여겨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도 나는 실패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임용고사를 볼 자신도 없으면서 '혹시 모를' 언젠가를 대비해 교직 이수를 했다. 정작 더욱 관심 있어 부전공으로 선택한 '문화, 전시 기획'은 생소한 과목들로 하여금 자꾸 뒤처졌기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임용고사는 보지 않았다.


 부반장만 했던 초등학교, 중학교도, 외고나 과학고 아닌 일반 고동학교도, 그리고 유일하게 합격해서 간 대학교 모두 만족스럽게 보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실패하는 데 실패해왔다. 내 인생에서 큰 실패가 무엇이었는지 긴 시간 생각해봐야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 만족하며 행복을 찾아왔던 태도였다. 쿵,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앞으로도 괜찮겠니?'


 사람이 커다란 실패를 해야만 하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성공의 탄탄대로를 누가 거부할쏘냐. 예전처럼 실패 스토리를 영웅담처럼 늘어놓는 것도 재미없다. 차선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최우선의 경우에서보다 몇 배 값질 수 있음도 우리는 많이 목도해왔다. 실제로, 내가 지나온 길들이 잘못난 방향의 구렁텅이들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데 실패하지 않기 위한 길만 골라 가려고 해온 것은 얘기가 다르다. ‘여우와 신포도’ 우화가 딱 들어맞는 게, 내가 바로 그 여우였다니? 나는 나의 최대치를 시험해 볼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고,  나 자신을 일부 속여온 것과도 같다.


 이 글을 적어 내려가며,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해온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이 순간부터 '무조건 최고를 목표로 삼을 테다', '실패를 다 이겨낼 거야'로 삶의 태도를 스위치 켜듯 바꿀 수는 없다. 그동안의 나를 부정하고 탓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정상을 바라보고 동경할 줄 알고 싶어 졌다. 내가 못 오를 것이라고 해서 진작 신발끈부터 고쳐멜 생각도 하지 않는 내 어깨를 툭툭, 독려해주고 싶다. 

 괜찮아, 한 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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