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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Sep 18. 2020

작은 것들을 위한 마음: 부서져도 괜찮아

프랑스 파리 푸드 페스티벌



프랑스에서 내로라하는 셰프들이 모이는 푸드 페스티벌이 나흘간 파리에서 열렸다.

매년 이맘때쯤 푸디들과 푸드 업계 관계자들이 즐기는 큰 이벤트로 자리 잡았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규모나 분위기 면에서 조금 작다.

(취소하지 않고 진행한 것만으로 놀랍기 하지만.)

우리 학교가 이 이벤트에서 보조를 맡기로 한 첫 해 이기도 하다.

초청되어 온 전국 탑 셰프들의 잡일을 돕는 명분 하에 앞치마를 둘러맸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된 10시부터는 방문객들 점차 늘고,

무대에서 다양한 요리 시연과 품질 보증하는 좋은 제품들의 시식으로 행사가 활기를 띠었다.

프랑스 버전의 요리사 토너먼트 'top chefs'에 출연했던 몇몇 셰프들,

이름깨나 날리는 레스토랑 헤드 셰프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면서 모두가 흥분하기도 했다.


둘째 날 오전 브리핑.

토종 일본인인데 정통 프렌치 요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는 평을 받는 셰프가 온다고 했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호기심이 일어 내가 맡겠다고 했다.

(맡는다고 해도 그저 준비된 재료들을 무대 뒤로 옮기고 필요한 것이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것뿐)


시연할 요리에 따라 완벽하게 준비된 트레이.

여느 셰프들보다 예쁜 색들의 재료가 돋보였다.

깡마른 몸체에 비해 강단 있는 기운이 느껴지던 셰프.

준비한 재료들을 구경하다가 장난감 같은 동그란 모양의 무언가가 궁금해 물었는데,

진흙으로 감싼 비트루트로, 진공상태를 만든 것이라 했다.


쇼타임 시작 10분 전,

셰프와 조수를 무대 뒤로 안내하며 재료와 냄비 등 모든 준비물이 실린 트레이를 끌었다.

쿵.

문턱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 내가 물어본 그 동그란 진흙덩이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조수 두 명과 무대 관리자를 포함해 나는 순간 얼음이 되어 3초간 정적.

셰프는 조각난 비트루트를 집어 들더니 내 얼굴 앞에 갖다 댔다.


"냄새 맡아봐요. 얼마나 향긋한지."


이 사람, 뭐야 대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토닥이며 괜찮다고 곧바로 무대에 당당하게 오르던 셰프.

불어까지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며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시연한 요리까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쇼가 끝나자 관객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고 명함을 셰프에게 들이밀었다.

나는 정신없는 무대에 인파를 뚫고 올라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에게 비트루트 한 조각을 썰어 내어 준다.


정말, 이 사람 뭐지?




많은 박수를 받은 셰프의 시연 요리, 유기농 채소 키쉬


레스토랑에 한 번 찾아가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마무리했다.

이튿날,

우리 학교 관계자 분이 나에게 보여주신 메시지.


"저를 도와준 학생분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이름난 셰프들 중 다수는 학교를 졸업도 안 한 우리를 신경도 안 쓰기 마련이었다.

의도적이지 않아도 시연 전에는 신경이 곤두서 있기도 하다.

행사를 지켜보며 유명한 셰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어떤 셰프가 되고 싶은가를,

야마구치 셰프를 보며 다시 고민했다.

작은 것들에 대한 배려, 관심, 의연함 그리고 실력까지 갖추기 위해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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